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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문화 변증이란 무엇인가?

사진: Ben Duchac on Unsplash

몇 년 전 나는 사회학자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에게 당시 정치 캠페인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문화 전쟁”(culture war)이라는 말을 도입한 이 사람보다 내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는데, 그는 손을 흔들며 자기는 일기 예보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가 연구하는 것은 말하자면 기후학(climatology)이다. 일기 예보가 아니다. 

그의 말이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이제는 더 많은 문화 기후학자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하루도 빠짐없이 쏟아지는 뉴스(“날씨”)에 습관처럼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화 속에서 작동하는 뿌리 깊은 가치, 이데올로기, 내러티브 및 패턴(“기후”)을 능동적으로 연구하고 평가하는 이가 필요하다. 

켈러 센터가 그렇다고 오로지 문화 변증(cultural apologetics)만이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는 유일한 방법, 심지어 시대를 초월한 최선의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문화 변증이야말로 우리를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지혜의 중요한 원천에 연결함으로 세속 시대에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적용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종류의 변증을 사용하건 당신은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공감하리라 기대하는 바에 맞춰진 특정 언어로 구성된 특정 규칙을 따라 논쟁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변증은 언제나 해당 문화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농업 사회였던 당시의 이웃과 연결되는 일상생활의 예를 수시로 사용하셨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와 바울의 마르스 언덕 설교는 똑같은 복음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그리스 철학자라는 전혀 다른 청중에 맞게 각각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2세기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First Apology와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극적으로 다른 순간에 알맞게, 각각 시기적절한 방식으로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선포한다. 

마크 앨런과 조쉬 차트러는 곧 출간될 The Augustine Way: Retrieving a Vision for the Church’s Apologetic Witness에서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항상 문화라는 맥락 안에서 변증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대학의 철학과는 동네 술집만큼이나 문화적인 곳”이라고 지적한다.

이처럼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사례를 통해서 문화 변증이 전혀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슨 전략을 쓰더라도 문화를 피할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문화 자체가 종교가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숭배한다”라고 말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는 옳다.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에서 문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문화라는 단어 속에는 인간 집단에 의해 개발되고 세대를 거쳐 전달되는 생활 방식의 총체가 담겨있다. 문화의 중심은 언어이다. 한 민족의 언어는 그들이 사물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방식을 표현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언어를 중심으로 시각 및 음악 예술, 기술, 법률, 사회 및 정치 조직이 그룹화된다. 거기에 더해서, 모든 문화의 근본으로 포함해야 하는 것은 사물의 궁극적인 본성을 파악하고 표현하려는 일련의 신념, 경험, 관행, 삶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 등이다. 이것은 본질상 궁극적인 충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중에서도 종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종교는 문화의 하위 영역이 아니다. 문화야말로 의미와 영원을 갈망하는 인간의 필연적 추구의 결과인 종교의 하위 영역이다. 앞서 소개한 뉴비긴의 인용문은 문화 변증의 광범위한 특성을 포착한다. 신학자 케빈 밴후저(Kevin Vanhoozer)가 강의한 “문화 해석학” 과정에서 내가 배운 것처럼 마케팅 슬로건도 사회의 가장 깊은 염원을 전달할 수 있다. 영화와 노래, 스포츠 경기도 문화가 가지고 있는 희망과 두려움의 한 단면을 표현한다. 이 모든 것이 다 단지 날씨가 아닌 기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복음에 뿌리를 둔 변증자가 수정하고 연결할 기회를 제공함으로 불신자가 죄와 구주의 필요성을 볼 수 있게 만든다. 

희망의 다리

기후는 우리가 바라는 바를 형성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에 뿌리를 둔 문화 옹호론자는 욕망을 믿음의 주요 동기로 인식한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직감과 이성의 관계를 코끼리와 기수로 묘사했다. 이성은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지만, 직감은 동기 부여가 있을 때만 작동한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머리가 합리화하고 직관은 열망을 따라갈 뿐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또는 같은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던져보자. 누가 내 동족(tribe)인가? 우리는 자신을 객관적 진실을 신중하게 고려해서 다양한 논쟁을 저울질하는, 매우 독립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훨씬 더 자주, 우리는 동족 본능에 따라서 움직인다. 객관적 진실에 입각한 삶의 변화는 고사하고, 동족 본능은 믿고 싶은 것만 믿도록 거르는 필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변화를 원할 때까지, 새로운 공동체 속에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결코 내가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문화 변증은 불신자가 복음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도 복음이 진리이길 원하도록 돕는다. 우리는 세상 정사와 권세의 주재권이 드러내는 추함과 정반대되는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가진 아름다움을 제공한다(엡 6:12).

“변증의 임무는 소망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테드 터너(Ted Turnau)는 그의 책 Popologetics에서 말한다. 선함, 아름다움, 정의, 희망, 평화, 활력, 자비를 논하며 그는 우리가 믿음을 제시해야 하는 다양한 이유를 열거한다. 그러나 뉴비긴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에서 지적했듯, 교회는 그 자체로 복음이 무엇인지를 풀어쓴 해석(hermeneutic)이다. 교회는 주변 문화의 기상 시스템이 가져다주는 먹구름에 도전하는, 생명을 주는 대안적 기후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소망과 비그리스도인 사이를 잇는 가장 좋은 다리이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은혜와 진실로, 또 사랑으로 함께 사는가를 확인함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문화 변증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증언하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영적, 도덕적 갱신을 추구한다. 

폴 굴드(Paul Gould)는 문화 변증을 “특정 문화 내에서 그리스도인의 목소리와 양심, 상상력을 확립함으로 참되고 만족을 주는 기독교를 세상에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정의한다. 소음으로 가득한 문화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관심을 끌기 위해 무한 경쟁하는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불신자가 품은 생각을 포착한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23에서 기도하신 내용이다.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세상은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단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목격한다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하늘과 땅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바로 결론 내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들이 죄를 회개하도록 경고하고 믿음의 길로 초대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복음의 효과를 확인할 때, 그들은 복음을 더 잘 깨달을 것이다. 우리를 대면하여 볼 때, 그들은 복음에 담긴 공격성과 분열된 교회에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너무나 자주 미치지 못하는 죄인의 공격성을 더 잘 구별할 것이다. 

찾기 위해 잃다

문화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너무 많은 날씨, 불충분한 기후)는 오늘날 교회의 일치를 위협함으로 결과적으로 선교에 악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서 너무도 멀리 벗어났기에, 오늘날 우리는 더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세상에 순응해서 살면서도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복음은 중산층에게 필요한 액세서리로 전락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 반대자의 악을 저지한다는 의미로, “문화를 구하는” 투표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주의와 편리함 및 안락함이라는 문화의 포로가 되어버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행여라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세상 사람들의 귀에 기독교 신앙이 단지 편안함이라는 목적을 향한 또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해석되는 건 아닌지, 나는 종종 두려움을 느낀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경고하셨다. 우리 모두에게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 10:38-39). 문화 변증은 우리를 사회 구조의 이면으로 인도함으로 내가 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찾기 위해 내가 어떤 희생을 해야 하는지를 보도록 한다. 

조쉬 채트러(Josh Chatraw)는 Telling a Better Story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신학적으로는 복음 자체에 뿌리를 내린 성숙한 변증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신앙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는 방법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듣는 이의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십자가를 지는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결점과 역사 속에서 교회가 저지른 실패까지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문화 변증은 기후가 어떻게 변하는지 예측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모색한다. 기독교 국가의 종말은 서구를 혼란에 빠뜨렸다. 서구 문명의 기초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니라 관용, 소수자 권리, 동등한 정의 등의 기독교 가치이다. 그러나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세속주의의 “빼기 이야기”(subtraction story)에서, ‘기독교만 빼 버리면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라고 묘사한 것처럼, 기독교는 (잘해야) 잊히고, (최악으로는) 욕을 먹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 없이는 기독교가 주는 유익을 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서구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포스트-자유주의 시대에는 기독교의 가치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로 향할 것인가? 문화 변증은 우리 사회가 물어야 할 이 시대의 본질적인 질문이 종교적이라는 사실을 보도록 돕는다. 뭔가를 숭배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인간에게 더 새롭고 더 나은 에덴을 만들 능력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Christian Smith)가 To Flourish or Destruct에서 설명한 것처럼, 포스트 계몽주의 딜레마는 신성한 선을 추구하는 영적 프로젝트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것, 과거에서 벗어나는 것, 어떤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것, 최대한의 선택권을 누리는 것,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것,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는 것, 그리고 원하는 대로 인생을 누리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근대성 영적 프로젝트를 이끄는 비전이다. 이 모든 비전은 (단지 이데올로기적 또는 문화적이 아니라) 영적이다. 신성불가침한 것, 궁극적인 관심사, 개인의 삶을 초월하는 의미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에 대한 비전을 명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이다. 개인의 가장 깊은 주관성, 선에 대한 가장 초월적인 비전, 그리고 궁극적 성취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비전을 명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이다. 문화 구조의 심층 단계에서 볼 때, 현대 서구에서 근대성이 무너뜨린 전근대 기독교계에서 높이 평가되던 하나님의 구원과 동급 수준(homologous)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이다. 신성하기에 보호하고, 방어하고, 치안을 유지하고, 싸우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고, 나아가서 타인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지금 세속 시대는 여전히 매우 종교적이다(행 17:22). 문화 변증은 기독교 세계(Christendom)를 계승하려는 영적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내러티브의 근간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한다. 이제 우리는 톰 홀랜드의 놀라운 책 도미니언에서 분명하게 확인하듯, 서로 연결하고 또 수정할 점을 식별하기 위해서 성경의 구속 이야기를 문화 속에 투영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떤 대안보다 더 궁극적으로 호소력 있음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발견한 모델이자, 크리스토퍼 왓킨의 새 책 Biblical Critical Theory를 그토록 설득력 있게 만드는 접근 방식이다. 그리고 곧 출간될 조슈아 라이언 버틀러의 Beautiful Union: How God’s Vision for Sex Points Us to the Good, Unlocks the True, and (Sort of) Explains Everything 이면에 담긴 정신이기도 하다. 

이전 세대를 살았던 뉴비긴은 그리스도인들이 서구 문화에서조차도 선교적 만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했다. 그런 선교적 만남은 우리 시대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선교사의 임무는 문화의 세계관(이야기)에 공감하면서도 그 문화가 전하는 이야기에 도전하고 수정(re-tell)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해피엔딩할 수 있음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에게 문화 변증이 필요한 이유이다. 절박한 세상은 지금 일기 예보가 전하는 천둥 같은 어둠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새벽이 올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다가오고 있다. 해피엔딩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음을 세상은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해피엔딩은 오로지 죄에서 돌이키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에게만 해당함을 눈을 뜨고 볼 수 있어야 한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What Is Cultural Apologetics?

콜린 핸슨 (Collin Hansen) | TGC의 편집장으로 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저널리즘과 역사를 전공했고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MDiv)를 졸업했다. 현재 Beeson Divinity School에서 자문 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대표 저서로 ‘Young, Restless, Reformed: A Journalist’s Journey With the New Calvinists’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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