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은 자”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나이에 비해 모든 면에 탁월했습니다. 거인 골리앗을 때려 눕힐 정도로 용맹하고 담대 했으며, 믿음 또한 또래 나이에 비해 성숙했습니다. 그는 거룩하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양을 치는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윗입니다. 사무엘상 13:14절이 증언하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마음의 중심이 하늘의 주인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다윗이 인생의 절정기에 매우 악랄한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욕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의 부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여 아이를 임신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우리아를 전장터에서 소환하여 아내와 동침하도록 두번이나 유도를 합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모두 실패로 돌아갑니다. 충직한 군인이었던 우리아는 전장에 있던 동료들을 생각하며 아내 곁에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결국 자신의 죄의 흔적을 모두 없애 버리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래서 군대장관 요압에게 우리아를 최전방의 맹렬한 격전지 속으로 들어가게 할 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여 그를 죽음에 이르도록 명령합니다.
그 후로부터 1년 간 그는 마치 자기죄의 흔적이 사라진 것처럼 뻔뻔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으로부터 1년 뒤,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십니다. 그때 나단은 그에게 한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군이시여. 한 부자와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았지만,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에게 어떤 손님이 왔을 때, 부자는 그토록 양과 소가 많이 있었지만, 자기의 것을 잡지 않았습니다. 되려, 부자는 가난한 자가 자신의 자식처럼 귀히 여겼던 그의 암양 새끼 한 마리를 대신 잡았습니다.” 다윗은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삼하 12:5-6). 나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삼하 12:7).
책망의 예리한 칼날에 깊이 찔린 다윗의 양심은 갑자기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저 심연 속에 깊이 가라앉아 잘 보이지 않던 범죄의 암덩어리가 수면 위로 정체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죄를 지었던 당시보다 책망을 받고 있는 지금 더 강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죄악의 실체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내면을 관통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아만 죽이면 모든 범죄를 덮을 수 있다고 착각했던 그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범죄자처럼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때 쓴 시가 바로 시편 51편입니다. 제 6계명(살인)과 7계명(간음)을 범한 악랄한 죄인이 주께 살려달라 울부짖는 시입니다. 곧 최악의 죄인이 최고의 주권자에게 용서를 간구하는 상한 심령의 노래가 바로 시편 51편 입니다.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1-5).
다윗의 표현을 유심히 살펴보면 두가지 상충되는 개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완전한 범죄와 완전한 용서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의 고백은 매우 뻔뻔해 보입니다. 어찌 감히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 추악한 범죄자가 자신의 죄악을 지워 달라는 말을 그 입에 담을 수 있는지 참 뻔뻔하기 그지 없어 보입니다. 한 때 우리나라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연쇄살인마가 용서를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1절 하반부와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그는 용서해 달라는 간구를 세 가지의 표현으로 요청합니다. “지워주십시오. 씻어 주십시오. 정결케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무거운 죄를 저질렀을 때 전과기록이 남게 됩니다. 다윗은 마치 전과기록을 없애 달라 요청하는 것 같이 그의 죄악을 지워 달라 간구하고 있습니다. 마치 찌든 때와 기름에 완전히 뒤범벅이 된 흰색 옷을 (다시 흰색으로 되돌릴 수 없을 것만 같은) 다시 새하얗게 만들어 달라 요청하는 것과 같이, 또는 악취가 진동하는 썩은 물을 먹을 수 있는 생수로 정화시켜 달라 요청하는 것과 같이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아마도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이런 생각이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파렴치한 모습이 아닌가? 매우 거만한 처사가 아닌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지금 뻔뻔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겸손한 참회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결코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되려 회개는 자신의 범죄를 진정한 범죄로 여기는 자에게 허락되는 주권자의 긍휼이자 은총입니다. 전혀 용서받지 못할 것같은 자에게 마저도 허락되는 하늘의 자비입니다. 그런데 참 회개는 용서를 베푸시는 분, 곧 은혜 베푸시는 분의 성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회개의 첫 번째 원칙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회개는 주님의 속성에 대한 참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는 선한 감정을 낳습니다. 참된 지식으로 말미암은 감정은 올바른 의지를 촉발 시킵니다.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길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발을 내딛게 만듭니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인생들이 회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속성을 왜곡해서 이해/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값싼 은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값싼 은혜의 다른 이름은 극단적 칼빈주의(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책임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 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교리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책임을 절대 무시하지 않습니다. 한 예로, 인간이 심판 받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 심판 받는 이유는 스스로 은혜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요 3:16-21).
기독교 은혜는 한 영혼을 기계적인 인간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 은혜는 인간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격하시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홀로 완성하시는 작품이지만(빌 1:6), 은혜를 베푸시는 주인께서는 불가항력적인 신적 숨결을 불어넣으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반응/책임(회개와 믿음)하도록 이끄십니다(갈 1:16).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면, 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반드시 그리스도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값싼 은혜는 인간의 반응 마저도 하나님이 모두 떠안으셔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성화에 대한 인간의 책임(회개와 믿음, 그리고 순종)을 부인합니다. 이러한 은혜 교리는 기독교적인 은혜를 왜곡시켜 재창조시킨 결과물입니다. 방탕주의를 조장하는 인본주의적 사상일 뿐인 것이지요(율법 폐기론).
값싼 은혜를 사모하는 자의 뚜렷한 특징은 회개의 기능을 부인합니다. 은혜가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회개 없이도 그리스도의 거룩(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성경적인 은혜를 배격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미 죄의 대가를 지불해 놓으셨으니(죄에서 해방됐으니) 더이상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를 지급합니다. 값싼 은혜는 위선적 가면 속에 가려진 사탄의 얼굴입니다. 죄를 자백하고 돌이켜야 하는 스스로의 책임 마저도 하나님께 떠넘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전가는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여기는 고약한 마음이자 열매입니다. 아담이 사탄의 뜻을 받아들여 범죄한 후,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전가시키려 했던 죄악이자 원죄의 첫번째 결과물 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하지만 주님의 은총을 입은 다윗은 다르게 반응을 합니다. 은혜의 빛에 노출된 다윗의 심령은 더이상 범죄를 숨기지 않습니다. 그는 애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
은혜를 구하는 자는 자신의 인격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되려 주님의 인자와 자비/긍휼에 신선을 고정 시킵니다. 본문의 “긍휼”이라는 단어는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됐습니다. 이사야 49장 15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이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여자는 임신해서 엄마가 될 때, 자기 품에서 난 자식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끈끈한 모성애를 갖게 됩니다. 전에는 없던 새로운 애정을 소유하게 됩니다. 아기가 울면 자신이 울고 싶고, 아기가 아프면 자신이 아프기를 원하며, 아이가 배가 고프면 가슴이 먼저 미어지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자비/긍휼 마저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결코 넘어설 수 없습니다. 육신의 어머니는 자식을 잊을지라도 완전하신 하나님은 자녀를 영원토록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 그 완전하신 자비의 창시자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인자하신 하나님을 묵상합니다. “인자”라는 단어는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 거두지 않는 사랑. 등 돌리지 않는 사랑. 집중하는 사랑.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사랑. 희생을 감수하는 사랑. 인자라는 단어는 곧 언약적 사랑을 가리킵니다.
언약은 결혼을 지탱하는 근간입니다. 따라서 저는 결혼식에서 하는 여러가지 의식 중에 결혼 서약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내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 약속하는 선언 말이지요. 독일의 본회퍼 목사님은 결혼 주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맺은 이 서약이 일생 동안 사랑을 지탱해 줄 것입니다. 사랑이 서약을 지탱하는 것이 아니구요.” 매우 의미 있는 주례사입니다. 결혼이 지켜지는 것은 서로의 약속 때문입니다. 약속을 철저히 이행하겠다는 서약이 결혼을 안정적이고 아름답게 유지하게 만듭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은 자신이 한 약속은 언제든지 깨버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게 만듭니다. 사회 풍조는 점점 부부 사이 마저도 쉽게 등돌릴 수 있는 것처럼 흘러갑니다. 이는 약속보다 감정이 더 소중하며, 순간적인 느낌에 근거해서 살도록 인생들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는 언약의 주인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이 이를 증명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짐승을 가져와 그 중간을 쪼개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언약”의 히브리 원어 “베리트”는 “자르다, 죽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행해졌던 언약은 약속을 한 당사자 중에 누구라도 약속을 파기했을 시에 짐승이 반으로 갈라진 것과 동일한 죽음을 겪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목숨을 담보로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는 언약의 주인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이 이를 증명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짐승을 가져와 그 중간을 쪼개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언약”의 히브리 원어 “베리트”는 “자르다, 죽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행해졌던 언약은 약속을 한 당사자 중에 누구라도 약속을 파기했을 시에 짐승이 반으로 갈라진 것과 같은 죽음을 동일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목숨을 담보로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15:17). 횃불은 주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잠들었을 때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가십니다. 이는 홀로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인생들은 언제든 약속을 어길 수 있는 불완전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몇 분 몇 초 만에 얼마든지 언약을 파기하고도 남을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홀로 약속하십니다. “너는 실패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너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에 대한 사랑을 저버릴지라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그 죄를 가지고 내 앞에 나아와라.”
따라서 회개는 언약의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며,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리이며, 실패를 모르시는 여호와께 자신의 실패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겸손의 행위입니다. 내 죄가 아무리 주홍 같을지라도 이를 자복하는 자에게 자비를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여호와를 다시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낮아짐의 시간입니다.
회개의 두 번째 원칙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회개는 초자연적 신비입니다. 얼핏 보면 회개 가운데 터져 나오는 비통함과 상한 마음이 죄인을 모두 삼켜 소멸시켜 버릴 것 같지만, 도리어 환희와 평안과 감사라는 천상의 열매가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축복의 통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의인만 누릴 수 있는 하늘의 평강을 맛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회개를 비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어서 우울증이나 허무주의 혹은 고립주의에 빠지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는 죄에 신음하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금 그리스도라는 소망을 가슴에 품게 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책감과 회개를 구분 지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 자이든 죄책감이라는 것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죄책감이 씨앗이 되어 진정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려는 자가 있습니다.
가롯 유다와 베드로가 매우 적절한 예라는 생각이 듭니다. 둘은 모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둘은 모두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둘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유다는 자살을 선택했고, 베드로는 회개를 선택했습니다. 무엇이 달랐습니까? 유다는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베드로는 주님을 다시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또한 유다는 자신의 죄인 됨의 실체를 바라보기를 거부했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직면하기를 원했습니다.
다윗 또한 베드로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3절). 그는 자신의 죄과를 안다고 말합니다. 그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지적으로만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남편과 아내가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서로 친밀하게 연합하는 것처럼, 자신이 과거에 지었던 간음/살인죄를 피부로 생생히 느끼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범죄의 깊이와 너비를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암세포가 전이되 듯 자신의 죄가 온몸 구석구석 퍼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즉 죄의 심각성을 영적인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 가지 단어로 그가 지은 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3절에서 말하는 “죄과”라는 단어는 반역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는 지금 한 나라의 왕 임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왕은 하나님이시며, 자신이 그분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침범했다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반역자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 스스로를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순종의 자녀라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개하고 있습니다. “왕이시여, 종인 제가 감히 주님의 권위에 반항을 했습니다. 아버지시여. 아들인 제가 감히 아버지의 뜻에 불순종했습니다. 저는 반역자이자 불순종의 아들입니다.”
두 번째는 2절의 “죄악”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왜곡되고 뒤 틀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곡된 렌즈는 진리를 거짓으로 해석합니다. “밧세바와 동침하면 하늘의 기쁨과 맞먹는 환희를 경험할 것이야. 우리아만 처단하면 나의 죄는 없어질 것이야.”
지금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계신가요? 아니면 여러분 스스로의 렌즈로 진리를 왜곡시켜 재해석하고 계십니까? 혹시, ‘나는 다윗과 같은 중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기 때문에 회개할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런데 예수님은 형제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자마다 살인한 자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고 사는 자마다 간음한 사람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왜곡된 마음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정도 죄는 남들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아. 남들도 품는 생각이기 때문에 괜찮아. 이 정도는 죄도 아니야. 나 정도면 남들보다 더 선하고 의로워.’ 상대적으로 눈에 잘 보이거나 커 보이는 죄만 죄이고, 시기나 질투 혹은 탐심과 같이 겉으로 잘 보이지 않는 마음의 죄는 죄로 여기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죄인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세 번째 단어는 2, 3절에 나오는 “죄”라는 단어입니다. 4절에는 “범죄”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죄라는 단어의 의미는 목표지점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목표를 빗겨 나갔다는 뜻입니다. 활이 과녁을 빗겨나 듯,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벗어난 것은 모두 범법행위 입니다.
우리 인생은 한 명도 빠짐없이 주님께서 본래 정하신 목표를 다 벗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할 피조물일진대 자신이 조물주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자기만족에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꿈꾸는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삶을 허비합니다.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달음박질 합니다.
여러분은 현재 다윗이 정의한 세 가지의 죄에 대해 영적으로 깨어 계십니까? 눈을 떠서 죄악을 직시하고 계십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지적하는 것처럼, 잠시 멈추고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깊이 묵상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정체 알기를 일부러 외면하고 계십니까? 하지만 다윗의 다음 고백을 주목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절). 다윗은 결국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 보입니다. “나의 죄악은 이미 예견된 일이구나. 나는 이미 영적으로 완전히 무력한 존재구나. 죄는 항상 나와 함께 붙어 있구나. 어머니의 태에서 날 때부터 지금까지 죄인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구나. 나의 본성은 결코 선한 것을 낼 수 없구나. 나는 죄인 자체로구나. 그래서 내가 범죄했구나. 오~~ 나는 나를 도울 수 없는 존재로구나.”
회개하는 사람은 이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부정할 수 없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본질적인 죄성에 눈을 뜨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죄를 지은 대상이 먼저는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4절).
영안이 열린 다윗은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우리아와 밧세바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범했던 죄악은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한 범죄였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됐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형제 자매에게 죄를 범한다면, 그것이 크던 작던 간에 먼저는 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다음 고백을 통해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를 알게 됩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인 됨과 죄악 된 행위에 대해 변명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기준 앞에 죄를 인정하고 고백할 뿐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통회하는 자는 주께서 죄를 물으실 때 이렇게 반응합니다. “주님 저는 진정한 죄인입니다. 저는 범죄했습니다. 형제 자매에게 악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님를 반역한 범법 행위였습니다. 저는 주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주께서 저를 고발 하셔도 주님의 고발은 의롭고 정당하십니다. 주께서 저의 죄를 심판하셔도 그 심판은 모두 옳으십니다. 저를 벌하셔도 할말이 없습니다. 의로우신 주여. 저는 주 앞에 죄인 그 자체입니다.”
결론
회개는 믿는 자의 특권입니다. 나 자신을 온전히 마주한 자에게 허락되는 영적 성장의 기회입니다. 회개하는 자는 이웃에게 저질렀던 범죄가 하나님을 향한 범죄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선고 앞에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되려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깊이와 너비를 더 깊이 깨닫습니다. 죄악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할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발견되는 용서의 선물을 충만한 기쁨과 함께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깊이 아는 자일수록 회개의 좁은 문을 통해서만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러 갑니다.
여러분은 현재 주님을 매일 만나고 계신가요? 주님을 매일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죄를 성실하게 자복하십시오. 자신의 능력을 맹신하는 것은 결국 자책으로 끝나버립니다. 그 늪에서 이제 그만 나오십시오. 거짓 겸손인 자기 연민의 늪 중앙에 있는 회개의 줄을 붙잡고 나오십시오. 교만으로부터 돌이켜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오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최악의 범죄자처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구세주와 주인으로 선포되신 예수님은 우리 죄의 값을 이미 십자가에서 모두 지불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 자는 반드시 회개합니다. 한번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회개합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사랑하는 자는 죄를 미워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회개 없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죄에서 돌이킨 자만이 예수님의 품에 안길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부디 은혜의 복음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하심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죄에서 신실하게 돌이켜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기도신문]
강민구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리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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