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보는 이슬람(43)
지구촌 이슬람권 선교의 시작
1906년,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북아프리카 이집트에서는 세계 개신교 선교사들이 모여서 선교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당시 세계 복음화가 가장 안 되고, 어려운 지역인 이슬람권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열정을 가지고 개최된 첫 이슬람권 선교대회였다.
지구촌 무슬림들을 향한 우리의 선교가 비록 힘들고 우리를 지치게 하고, 그만큼 인내를 끝없이 요구하기도 하지만, 이슬람권에서의 복음 전파는 지금까지 수많은 승리의 소식과 간증을 남겼다. 그 이면에는 보냄을 받아 이름도 없이 수고한 수많은 선교사의 고독한 헌신과 고군분투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애환이 숨겨져 있다.
이슬람권 선교를 되돌아보면 주님께 감사드릴 적지 않은 조건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초기 소수의 현지 형제만이 외롭게 신앙생활을 하던 선교 현장에서 어느덧 현지 교회의 탄생과 현지 지도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지하교회들이 존재하며 핍박이 끊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수많은 무슬림 회심자가 계속해서 새로운 삶을 찾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무슬림들이 가진 부정적 생각
지금 무슬림들이 가진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생각 중 하나는 교회의 잘못으로 생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 지역에 퍼져 있는 거짓 영들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교회가 그 땅에서 무슬림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보여 준 실수와 잘못은 복음 전파에 심각한 장애 요소가 되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무슬림들의 예수는 성경 속 예수와 차이가 있었다. 무슬림 대부분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인정하지 않으며, 성경은 변질, 왜곡되었다고 믿고 있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조차 하나님, 예수, 마리아의 세 신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또, 무슬림들은 교회 내 기독교적 형상(아이콘)들을 우상 숭배로 규탄한다. 또, 역사 속에서 십자군들의 부정적 영향은 무슬림들에게 적대적 생각을 하게 했다.
또 하나의 부정적 반응은 이슬람권에 퍼진 거짓 영들의 활동을 통해서이다. 예를 들면, 모든 무슬림은 태어나기 전부터 원래 무슬림이며, 태어나서도 그리고, 죽어서도 반드시 무슬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퍼져 있어서 무슬림들의 회심은커녕 복음 자체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무슬림들의 이런 고정관념과 편견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슬림들의 이런 생각을 바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현지에서 예수를 믿는 형제들의 변화 받은 거룩한 삶과 교회의 희생적이고도 헌신적 삶이다.
무슬림들이 가진 종교성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강한 단일 신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이 믿는 단일 신의 개념이 다른 외부의 압력에 의해 위협받거나 파괴될 조짐이 있다고 생각하면,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철저한 종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무슬림들은 일반적으로 집단행동에 따른 강한 감정을 표출한다. 지구촌 이슬람권의 모든 무슬림은 한 형제요, 한 가족이라는 강한 결속력을 보인다. 저들은 하나의 신앙, 집단,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에 평상시 평화롭게 사는 무슬림들조차 자기들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외부의 어떠한 움직임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대처한다.
무슬림들의 이런 일반적 성향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새 생활을 시작한 무슬림 회심자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무슬림 회심자 대부분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움마) 안에서 계속해서 갈등과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기 마련인데, 이들을 향한 교회의 지속적 양육과 끊임없는 개인적 접촉이 꼭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이들은 자기들의 상황을 못 견디고 다시 예전의 무슬림 공동체 안으로 꼭꼭 숨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우리 선교사들과 나누고 싶은 얘기
이슬람권 사역 현장에서 우리 실수 중 하나는 그곳의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것을 나쁘다고 판단한다든지, 반대로,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무조건 좋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 예수를 닮아가는 과정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사역자들은 그들보다 더 많이 알기 때문이라든지, 기독교라는 종교가 이슬람교보다 우월하다는 이유로 다가가서는 안 된다. 성경 어디에도 기독교라는 종교가 기록되고 있지 않다. 오직 성경에는 하나님 아버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이 계실 뿐이다.
또, 선교 현장에서는 사역자가 가진 생각과 배운 지식을 현지인들에게 그대로 옮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회당에서 설교할 때 당시 그들이 사용하던 구약을 인용하여 전도했다. 그가 아덴에 갔을 때도 시민들의 광장에서 그곳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와 철학을 인용해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무조건 무시하고 짓밟으면서 예수를 전하려는 노력은 매우 민감하고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한 사람을 계속 나쁘다고 비판하면서 결국 그가 좋게 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빛을 비추기만 하면 어두움은 저절로 없어지게 되어 있다. 생각건대, 우리의 실수는 오랜 기간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어두움의 세력들과 싸우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어두움을 이겨내는 것은 우리 사역자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말씀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어느 선교지나 마찬가지이지만, 선교사들은 자기 나라에서 배운 것들과 자기가 속한 교회 전통을 선교지에 일방적으로 심으려는 억척같은 고집이 있다. 그래서 현지 교회와 때로는 선교사들 간 갈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에서 사역하든지 성경에 근거를 둔다면, 다양한 환경에서 모인 선교사들이나 현지인들과도 조화를 이루면서 일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사역자들이 자기 방법과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고집할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가 배운 것을 다 사용하실 수도 있지만 때로는 여과기에 걸러서 그중 필요한 것만 골라서 사용하실 수도 있고, 전혀 사용하시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역할 준비가 되어 있나?
이슬람권 사역에 나타나는 두 커다란 장벽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사역자들의 생각과 결단이 중요하다. 고린도전서 2장 3~5절에 보면, 사역자로서의 태도와 자세가 기술되어 있는데, 이 말씀에 따르면, 모든 사역자가 하나같이 다 강하고 용감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주님을 믿겠다는 고백으로 태어난 무슬림 회심자들을 향해서 우리 할 일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고, 자기의 환경에서 온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라도록 양육하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말의 지혜나 지식으로만 접근하거나 전통적 복음 전도 방식만 고집하려다가는 사역에 실패를 맛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권 사역에서 정말 중요한 점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무슬림들을 대하는 것이다. 이것에 이슬람권 사역의 성패가 달렸다.
현재 이슬람권 현지에서 그리스도인 교회(공동체)는 아직 미약하고 이제 시작 단계이다. 사역자대부분에게는 올바른 열매를 맺지 못할까 하는 조바심이 있다. 과거 소아시아 교회들이 건물의 유형은 존재했지만, 그 안에 성령이 역사하지 않았으므로 망해 없어져 버렸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음 세대에 의해서 성령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판단 받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향후 이슬람권 사역
이슬람권에서 세워진 교회는 어떤 기초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이슬람권 한 선교지 속담 중에는, ’눈썹을 빼려다 눈을 뺀다.’라는 표현이 있다. 좋은 의도로 좋은 일을 하려다 실수해서 그보다 더 커다란 부정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실수가 우리 사역자에게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아무리 가슴이 뜨겁고 목적이 좋을지라도 성령께서는 주시는 지혜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언제든지 부정적이었음을 많은 사역자가 이미 잘 알고 있다.
감사하게도 우리 주님은 선하고 긍휼하셔서 우리의 많은 실수와 잘못을 가려주시고 덮어주셔서 오늘도 우리를 현장에서 사역하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음성에 민감하지 않고, 우리 고집대로 일을 계속 처리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우상 숭배자는 아니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해보면 그들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아브라함과 모세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서로 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구태여 성경을 읽고 다른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냐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형식적이고 교리적 접근보다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게 될 때 승리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무슬림들과 별 차이가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보일 수만 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슬람권 사역에서 필요한 것들
무슬림들은 살아계신 우리 주님의 능력을 꼭 체험해야 한다. 이를 위한 첫 시작은 변화 받은 현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다른 무슬림들에게 보여 주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 사역자들은 절대 성급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무슬림 회심자들이 예수 믿었다고 재정적 문제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문제가 갑자기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몇몇 사역자는 주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무슬림 회심자들을 향해서 교회의 리더로 세우려 하거나, 혹은, 신학교로 보내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좀 기다리면서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들이 주 안에서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그가 하나님과 스스로 교제하고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참아야 하는 사역이 이슬람권에도 매우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있듯이, 무슬림 회심자들도 모두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든자, 전도자가 될 수 없다. 모든 이가 같은 성향을 보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올바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돕는 일이 사역자들에게 우선되어야 한다.
불모지 이슬람 땅이라 해서 예수 믿는 형제들이 모두 신학교에 가야하고, 모두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법은 없다. 사역자들은 교회 내에서 무슬림 회심자들의 환경, 학벌, 유능 정도에 따라서 지도자를 고르려고만 한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사람은 교회와 주변 형제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는 자이다. 주님은 섬기는 자를 원하시며, 결코 지도자를 원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도 이 땅에 섬기러 오셨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의 성급함과 실수가 여기에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사역자가 무슬림들에게 다가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겸손하고 섬기려는 자세로 무슬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주님의 나라는 어느 곳에서든지 참 겸손과 섬기는 자들을 통해 오기 때문이다. 그런 겸손과 섬김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통해 나타나서 우리 주변의 무슬림 친구들이 복음을 접하고 변화 받는 그날을 믿음으로 기다린다.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졸업,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FOT 선교회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저널 ‘전방개척선교(KJFM)’ 편집인,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무슬림 이해하기’(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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