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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팔복(2): 애통하는 자

사진: Pixabay

“슬퍼하는 사람들”(우리말성경)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특히 예수님께서 ‘슬퍼하는 자’가 슬퍼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가령 주식으로 전 재산을 날려 슬퍼하는 사람도 복이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무슨 복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우리는 본문 말씀과 성경 다른 곳을 참고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복을 베푸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 복의 수혜자로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

누가복음에는 산상수훈(마 5:1-12) 말씀과 유사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오늘 말씀(“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에 상응하는 말씀이 있는데 바로,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다.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해 기록된 두 말씀 모두 현재 상태 그리고 미래의 축복을 말하고 있다. 지금 우는 자, 현재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는데, 그 복은 후에 웃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나중에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을 웃게 만드는 분, 위로하실 분은 복의 근원이자 수여자이신 예수님이시다. 계시록 말씀에서 예수님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계 21:4).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보장된 축복, 그들이 기다리는바 곧 주님의 위로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라고 말했고(벧전 1:7), 이 미래의 복은 현재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벧전 1:8).

‘그동안 고생 많았어.’, ‘네가 얼마나 수고한 지 내가 잘 알고 있어.’, ‘정말 착하고 충성스러웠어.’라고 누군가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수고와 슬픔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 같을 때가 많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그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해주실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 “내게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모든 심판의 권한을 가진 그분께서 그렇게 최종 선언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즐거움에 영원히 참여하게 하시고, 더 큰 것을 맡겨 섬기게 하실 것이다.

예수의 제자는 애통하는 자다

‘팔복’의 가르침에서 예수님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팔복은 그리스도의 제자의 참모습을 설명한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하다. 온유하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긍휼히 여긴다. 마음이 청결하다. 화평하게 하는 자이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다. 이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반드시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바로 이런 자들이 천국을 소유하고, 위로를 받으며, 땅을 기업으로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으며, 큰 상을 받을 것이다.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모습을 갖추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는다. 교만하고 사나우며 악을 사모하고 긍휼하지 못하고 마음이 더러운 죄인, 사람 사이에 분쟁을 가져오는 죄인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겸손하고 온유하며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께서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영원한 화평을 맺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죄인의 죗값을 대신 치르셨기 때문이다. 그 마음에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께서 마음이 부정한 자들을 대신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팔복’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이런 면에서 ‘주여, 저는 이런 복을 받을 수 없나이다!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탄식하며 은혜를 구해야만 했다.

한편,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들에게 ‘팔복’은 실제로 주님의 축복을 얻는 방법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닮고 살아내야 할 그리스도의 본이기도 하다. 우리는 주님의 겸손와 온유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하며(마 11:29), 긍휼을 얻은 자처럼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약 2:13). 화평을 누린 자처럼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약 3:18), 은혜를 받은 자처럼 겸손해야 한다(벧전 4:10). 의롭다 함을 받은 자처럼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고, 거룩함을 입은 자처럼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롬 6:22).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누구나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 성자 하나님의 성품을 그 속에 빚어가신다(롬 8:30).

예수의 제자는 왜 우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현재 그리스도의 제자는 왜 울고 있는가? 왜 애통하는가?’

팔복에 나오는 다른 성품을 생각해볼 때, 여기서 말하는 ‘애통’, ‘눈물’은 광범위한 개념으로서의 ‘애통’이 아니다. 그냥 아무런 이유를 불문하고 우는 것을 몽땅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합당한 눈물, 애통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복이 주어진 것이다.

주석가 R. T. 프랜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다”(틴데일, 178p). 데이비드 터너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애통하는 가장 가능성 있는 이유는 죄 혹은 박해 때문이다….아마도 천국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들과 박해들에 대해 애통하는 자들에게 초점이 더 있을 것이다”(BECNT, 209-10p).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이고(마 5:10),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욕을 먹고 박해를 받고 악한 말을 듣는 자들이었다(마 5:1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5:19).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래서 운다. 그래서 애통한다. 예수님을 위한 삶이, 의를 위한 인생이 힘들고 고달프기 때문이다. 대적이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의인 욥이 가진 모든 것을 갈취하고 그의 육체를 초죽음까지 몰아가면서 사탄은 의인이 죄를 낳기를, 의로우신 하나님을 향하여 욕하고 죽기를 갈망한다. 이 세상의 신은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하나님께 속한 영혼들을 심히 미워한다. 사도 베드로는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을 가리켜 이 세상에 ‘흩어진 나그네’라 불렀고, 나그네는 이방인으로서 세상이 주는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는 삶을 산다(벧전 1:1, 6).

이것을 극복하며 싸워 이기는 삶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은 눈물이 넘친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사시지 않았는가?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물으셨고(눅 24:26), 사도 바울은 이에 대답하듯,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고 힘주어 말했다(롬 8:17).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 편안한 삶을 즐기며 살 수 없다. 제자의 부르심 자체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다(마 16:24).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주(히 12:1), 씨름(엡 6:12), 싸움(딤전 6:12)이다. 훌륭한 선수의 삶은 눈물로 촉촉히 적셔있다. 위대한 전사의 전투복은 땀과 눈물범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왜 우는가?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생각할 때, 종종 역으로 나는 이런 질문을 한다. ‘나는 주를 위해 얼마나 울고 있는가? 나의 눈물은 정말 주를 위한 눈물인가?’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 ‘내가 바로 그 애통하는 자인가?’라고 스스로 물을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주 안에 참된 복, 그분의 위로가 약속되어 있는 복있는 사람이 바로 나인지, 이미 그 복을 얻은 자라면, 내가 그에 합당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택하여 불러 모은, 이 세상의 나그네로 있으면서도, 이 세상 사람들이 우는 것을 위해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특별히 물질적인 복과 성공, 사람들의 인정과 인기를 열심히 추구하는 삶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래서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사도 요한이 말했다(요일 2:16).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온 그것을 위해 수고하고 그 수고로 인해 애통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칭찬과 위로를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팔복’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10, 11). 그들에게 천국의 상이 있다고 약속하셨다. ‘의를 위한 박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욕과 박해 그리고 악한 말’에 해당하는 상급이다. 죄가 있어서 받은 박해는 포함되지 않는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울며 씨를 뿌리는 자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는 자,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의 복을 주실 것이다. 수고와 눈물에 대한 보상을 기쁨으로 받게 하실 것이다. 팔복에서 약속하신 대로 분명히 복주실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으셔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섬기게 하시고 그에 대한 상급을 주시며 천국을 상속받게 하셔서 함께 다스리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어찌나 큰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일로 근심하게 되고 울고 애통하더라도 기쁨으로 이 일을 감수하기 원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그러므로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 함께 씨를 뿌리러 나가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로 이 세상의 신과 그 권세 아래 눈이 가려진 자들 속에서 복음의 씨를 충성스럽게 말과 삶으로 뿌리자. 우리는 울게 될 것이다.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게 될 것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참아야 할 것이다. 충성스럽게 일할수록 우리의 삶은 땀과 눈물범벅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기뻐하라. 우리에게 복이 있다. 우리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 영광 앞에서 우리의 단을 주님께 바치면, 주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위로하고 칭찬하실 것이다. 우리의 모든 수고를 다 안다고 말씀해주실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장차) 웃을 것임이요(눅 6:21, “장차” 추가).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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