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보는 이슬람(08)
이제 종말론적 확신으로 마지막 세대를 사는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시급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우리 주위의 잃어버린 자, 소외된 자, 고난 겪는 자 그리고, 버림받은 자를 애타게 찾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주변에 아직 주님의 복음이 필요한 이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헌신을 통한 섬김과 봉사의 수고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받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선교적 계획이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주님은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매우 적절히 전하고 있다. 이 비유는 한 율법 교사와 예수와의 대화로부터 시작한다. 즉, 한 유대인 율법 교사가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영생을 얻을 방법’을 물어보며 시작한다. 이 율법 교사가 매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던 영생을 얻을 방법은 다름 아닌 신명기와 레위기 말씀의 인용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신 6:5),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레 19:18).
위의 신명기 말씀은 십계명의 전반부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피조물 인간의 일편단심 충성과 사랑을 요약한 부분이다. 또, 위의 레위기 말씀은 십계명의 남은 후반부 즉, 피조물 사이에서의 계명을 요약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이웃’이라는 단어는 유대 어법상 집단적 의미로 사용된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동족, 같은 종교권에 있는 사람, 혹은 같은 유대인에게만 국한했다. 이는, 이방인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 유대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던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려는 성령의 의도라든지,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 제자들조차 같은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했던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인들의 선교를 위해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사역을 옮겨가게 한 사건을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행 11~13장).
그러므로, 배타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을 이 ‘이웃’이라는 단어 범주에서 제외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에 대한 유대적 생각을 의도적으로 바꾸려는 의도가 있었다. 예수는 율법 교사를 향해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것을 삶에서 행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신다(28절). 그러자, 율법 교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느끼면서 계획에 없던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더 던져서 또다시 예수를 시험하고자 한다(29절).
이것이 바로 ‘이웃’의 개념에 관한 것이다. 즉, 율법 교사가 예수로부터 기대했던 답은 당시 유대 문화권 안에서의 ‘이웃’의 개념이었고, 이에 반해 예수는 율법 교사가 생각하는 유대식의 이웃 개념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셨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유대권 안에서만이 아니라 그 밖에 사는 사람도 언제나 이웃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친다. 이는 율법 교사의 생각뿐 아니라 당시 유대 사회, 더 나아가 성경을 읽는 모든 독자를 향해 이웃에 대한 개념을 올바로 일깨운다.
사실 우리도 지금까지 율법 교사가 생각하던 것과 별 차이 없이 이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누군가를 향해 그가 과연 우리의 이웃이냐 아니냐, 혹은, 우리의 이웃이 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에만 관심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비유를 통해 그가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그가 누가 되든지 지금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면 그가 바로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하면, 어려운 처지에 빠진 그가 누구든지, 전혀 상관없이 우리가 먼저 다가가서 그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깔뱅도 이웃 사랑에 있어서 그 사람의 가치를 따지지 말 것을 얘기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거의 전부가 자기 자신의 공로에 있어서 무가치하기 때문이며, 이에 따라 사랑의 의무를 행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먼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입장에 설 것을 얘기하고 있다.[i]
예수는 늘 그러했듯이, 여기에서도 율법 교사가 ‘이웃’의 올바른 개념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하나 사용하시는데, 바로 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이다.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도 하지 않았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했다.
오늘 이 비유를 살펴보면, 유대인 하나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을 위기에서 같은 유대인 그것도 신명기와 레위기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죽어가는 유대인 동족을 보고도 차례로 피하여 지나간다(31~32절).
이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이 아니라 만약 사마리아인이었다면 위에서 언급한 유대식 관점으로 보고도 피해 지나가는 것이 어느 정도 타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은 유대 사회 안에서 이웃으로 보기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 유대인 동족을 보고도 피해 지나갔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율법을 잘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아는 것을 삶에서 적용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받은 것이다.
그리고, 당시 유대인으로부터 원수 혹은 인간 이하로 취급받던 사마리아인 하나가 지나가다가 보고도 피해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설명하면서 이웃의 개념과 역할에 대해 자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고 불쌍히 여겼다(33절)
본문에서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동족을 원수로 여기던 유대인 하나가 길가에서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불쌍히 여겼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단어를 영어 성경으로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NIV에서는, ‘pity’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측은하고 불쌍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또한, KJV에서는, ‘had compassion’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어려움을 당한 자와 함께 하고 그것을 나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결국, 이는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향한 마음이 이런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둘째, 가까이 갔다(34절)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같은 동족도 아닌 원수지간에 가까이 갔다고 말하는 예수의 의도는 그가 누구이든 간에 가까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동족 유대인을 보고 사실 가까이 가야 했던 제사장과 레위인을 당시 사회에서 가까이 가지 않아도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았을 사마리아인을 서로 대조시키면서 실제 삶에서의 적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재차 강조한다.
셋째,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었다(34절)
당시 여행 중이던 이 사마리아인에게 기름과 포도주는 분명 생명처럼 귀한 것이었고, 가장 필요한 음식이었다. 이 사마리아인은 가장 귀한 그의 음식을 자기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인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사용한다. 물론, 이런 행동의 발상은 강도 만난 유대인을 처음 보았을 때 그가 가지고 있던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에서였다.
넷째,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34절)
요즘 같은 길도 아니고, 당시의 좋지 않은 길을 여행 중이던 사마리아인에게 유일한 교통수단인 짐승에 죽어가는 유대인을 태웠다는 것은 여분의 짐승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은 걸어갔다는 의미이다. 또한, 자신의 갈 길도 연기하고 시간을 내서 주막으로 데리고 갔으며 돌보아 주기를 계속했다.
구약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웃’의 개념은 단지 가까이 함께 사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 ‘이웃’과 ‘형제’는 매우 비슷한 동의어이다. 이에 반해 타국인, 이방인 또는, 객은 유대 밖에 거주하는 비유대인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관계는 ‘언약’과는 관련이 없으며, 일반적인 환대의 관례를 따랐다. 그러므로, 타국인과 우거하는 객은 이웃과의 관련해서 율법에 예외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레 19:18) 당시 율법은 같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만 해당한다.
예수께서는 레위기 19:18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큰 계명이라 말한다(마 22:39, 막 12:31). 그런데, 유대교에서의 윤리적 딜레마는 율법 교사가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이웃에 대한 개념이 예수의 개념과는 다른 것이었다(29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은 상인이나 일반 평민을 이웃의 개념에서 제외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예수는 율법 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사용해서 사랑과 이웃의 관계를 다시 정의해 준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약적 의미에서도 ‘이웃’이 분명한 죽어가는 유대인 동족을 외면하는데, 이는 명백한 율법 위반으로 보아야 한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함께 거주하는 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더욱이나 유대인도 아닌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유대인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을 보여준다(33절).
예수의 관점은 ‘이웃’에 대한 친절은 사랑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먼저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결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설명하는 ‘이웃’의 자격은 불쌍히 여기며 자비를 베푼 자이다(36절).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의 모든 행동은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웃 개념과 같은 것이며, 이러한 행동을 삶에서 보이는 자가 진정한 이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자들의 실천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도 이렇게 이웃을 생각해야 하며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연 무슬림들이 “우리의 이웃이냐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해 더는 이론적이고 원칙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누구든, 무슬림이든 유슬림이든. 지금 우리의 주변에 죽어가는 자들, 아파하는 자들, 상처받은 자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우리의 마땅하고도 옳은 일이며 그것이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지극히 당연한 삶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복음기도신문]
[i] 한철하, 『21세기 인류의 살길』, p. 94.
김종일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졸업, 전,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현, 터키어권선교회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M-NET KOREA) 회장, 저널 ‘전방개척선교(KJFM)’ 편집인,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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