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교사로 다음세대를 위해 한 평생 교단에서 봉직하다 2011년 퇴직한 윤해균 장로의 인생 이모작은 이역만리의 섬나라 스리랑카에서 지난해 시작됐다. 그러나 그 뒤에는 한평생 교회를 섬기며 선교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아내 임희순 전도사의 기다림과 중보도 빼놓을 수 없었다. 2013년 실버 선교사로 삶을 결단, 선교지로 삶의 터전을 옮긴 윤해균·임희순 선교사를 스리랑카에서 만났다.
– 스리랑카로 오신지 얼마나 되셨나요?
“이곳 생활은 이제 1년 조금 지났어요. 그런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벌써 10년은 지난 것 같네요. 그래도 여전히 초보로 병아리 선교사에요.”
– 이곳에 오신 뒤에 특별히 기억나는 사건들이 있으신가요?
“사실 초보 선교사로서 저희들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어요. 언어를 배우며 모든 것이 낯설고,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지내왔어요. 저희들이 이곳에 정착한 뒤, 감사한 것은 한국에서 함께 열방을 품고 기도해온 믿음의 동역자들이 이곳까지 찾아와 현지 성도들과 함께 기도한 시간이었어요. 이 땅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위해 기도했던 시간들을 잊을 수가 없네요.”
평소 두 사람만 있을 때는 새벽 3:30분에 기상, 열방을 품고 매일 1시간씩 기도하는 24·365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말씀보고, 시장에 가고, 그 후 이곳에 먼저 와 있던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 스리랑카의 삶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듣기로 하고 먼저 두 분이 어떻게 주님을 만나셨는지 믿음의 첫 출발을 들려주세요.
윤해균(이하 윤): “저는 우상을 믿던 가정에서 성장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때 처음 교회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성실하게 교회만 출석하는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그 생활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믿음 없이 집사가 되고 마침내 장로까지 됐어요. 평일에는 죄 가운데 머문 채 평생 살아왔어요.
그러다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지인에게 빌려줬다가 어려움을 겪게 됐어요. 이 문제로 고민하던 중 명예퇴직해 퇴직금으로 재정문제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정했어요. 그 이후, 한 선교단체에서 주관하는 복음신앙훈련과 공동체 훈련과정에 참여했어요. 그 시간을 통해 제가 얼마나 죄 된 존재였는지 실감하게 됐어요. 오랜 세월이 흘러 비로소 주님이 저의 삶을 새롭게 빚어주셔서 선교사로 헌신할 수 있었어요.”
임희순(이하 임): “저는 결혼 전에 신학교를 다녔어요. 그리고 80세계복음화 대성회 등에 참석하는 등 믿음에 아주 열심을 내었어요. 그러다 그 무렵 한 선교단체가 주관하는 ‘나는 찾았네’라는 주제로 열린 선교대회에 참여했어요. 그때 선교사로 헌신할 사람을 콜링하는데 큰 감동으로 일어섰어요.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서 사역자로 섬기며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내다 10여 년 전 한 집회에 참여하면서 주님이 그 사실을 기억나게 하셨어요. 그때가 2003년 12월이었어요. 이미 그때는 한 가정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상황이 달라졌어요. 그때 주님이 남편도 동일한 마음을 주신다면 헌신하겠다고 기도하며 기다렸어요.”
복음 만나 선교적 존재 깨달음
– 2013년에 선교사로 스리랑카로 오셨으니 10년 만에 주님이 그 일을 이루어주신 거군요.
임: “남편은 언젠가 아이들이 선교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어요. 실제 큰 딸은 이미 선교사로 헌신해 열방을 섬기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부부마저 선교사가 되면 온 가족이 함께 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교사로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주저하게 했어요. 그러다 만약 ‘이 땅에서 그게(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어렵다면 하늘나라에서 모이면 되지’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 남편이 ‘나이든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겠냐’며 명예퇴직을 얘기하더군요. 그렇게 주님이 저희 부부의 마음과 상황을 자연스럽게 선교사로 헌신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어요.”
-그렇게 선교적 삶을 결단하는 과정에서 이곳 스리랑카라는 나라로 와야겠다는 결정은 어떻게 하시게 되셨나요?
윤: “저는 한국에서 섬기던 교회에서 외국 이주민을 섬기는 부서에서 활동했어요. 당시 교회에서 11개국에서 온 이주민이 있었는데, 그때 배정받은 이주민이 스리랑카 사람들이었어요. 그때 만난 한 형제가 9년간 한국에서 일하다 귀국하기 직전 놀랍게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됐어요.
그리고 스리랑카로 돌아간 이후, 현지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기도하며 재정으로 후원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스리랑카 사람들을 섬기며 주님이 저에게 이 땅을 이해할 수 있는 과정을 허락하셨어요.”
부부가 선교 비전 주시도록 기도
필자는 윤해균 선교사가 한국에서 선교훈련을 받던 중 만나게 되어 그가 사용하던 차량의 10년간 기록한 차계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차계부는 각종 부속과 부품, 정비 일정과 예정사항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을 실감나게 보여준 것이었다.
– 윤 선교사님은 꼼꼼하신 성격이셔서 당시 스리랑카 사람들도 분명히 성실하게 섬겼을 것 같습니다.
임: “정말로 성실하게 그분들을 섬기던 기억이 납니다. 스리랑카 사람들을 알아가면서 그들이 이주민으로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지켜보던 중 주일마다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갔어요. 이곳이 더운 나라라서 그런지 음식들이 짜고 매워요.
그런데 한국에서 주일날 교회에서 나오는 음식이 이들 입맛에는 너무 싱거운 거죠. 또 일주일에 두세 번씩 이주민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의 집을 찾아가 심방하곤 했어요. 또 주일날에는 이들 형제들을 집에다 데려다주려고 승합차를 구입해 새벽까지 모두 실어다주곤 했어요. 어떤 때는 평일에도 스리랑카 형제들을 심방한다고 새벽 서너시에 들어오기도 했어요.”
10년간 헌신적인 이주민 섬김
– 선교에 대해 먼저 자원하고 비전을 품었던 임희순 선교사님이 어느 나라를 섬기고 싶다거나 그런 나라나 민족은 없었는지요?
“선교사로 본격적인 삶을 살기에 앞서 6개월간의 공동체 훈련을 받으며 기도했어요. ‘주님! 남편이 결정한 나라에 함께 갈 수 있도록 순종하는 마음을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며 준비했어요. 그런데 정말 주님이 그 훈련을 마칠 때 남편이 선교지로 선택한 스리랑카를 믿음으로 취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어요.”
– 처음 선교의 부르심에 자원한 때로부터 꽤 오랜 시간을 걸려서 선교지로 오셨군요. 이 땅에 대해 가졌던 기대나 생각했던 모습과 차이가 있나요?
“이 땅의 사람들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식민지 상태를 경험한 것이나 종족간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것이나 비슷해요. 그런 아픔을 겪은 만큼 변화에 대한 갈망도 매우 큽니다. 그러나 분명 이들에게도 인간으로서 연약한 부분이 있는데, 십자가 진리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 안 될 것도 없어요.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이 땅이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어요.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지금 당장 이 나라 말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요즘 열심히 언어훈련을 받고 있어요.”
– 한국에 있는 자녀 중에 최근에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경험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들도 선교사를 소망하며 선교훈련을 받던 중 기도하다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건강했던 아들에게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했지만, 주님이 곧 마음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다른 소망없는 일을 하다가 쓰러졌다면 정말 허망한 일이겠지만, 기도하다 쓰러졌으니 주님이 친히 다스리시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아들은 수술을 받고 극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아직 싱할라어가 서툴지만, 이들은 이 땅의 회복과 주님 나라의 부흥을 소망하며 현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도의 자리를 계속해서 갖고 있다.
현지인들과 기도하며 부흥 꿈꿔
– 끝으로 기도제목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막내가 한국에 있는데, 아직까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 너무 신앙을 강요한 듯한 시간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어, 이제는 주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주님의 때에 주님이 친히 일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황혼의 나이이지만, 병아리 선교사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윤해균.임희순 선교사 부부는 오직 복음을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하는 것뿐이며,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이 친히 일하신다는 단순한 믿음으로 오늘도 가족과 열방의 회복을 위해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GNPNEWS]
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