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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칼럼] “온 이스라엘”(롬 11:26)과 대체신학 이슈 (4)

사진 : pixabay

목 차
I. 들어가는 말
II. “온 이스라엘”(롬 11:26)에 대한 네 가지 해석
III. 교회 공동체로서 “온 이스라엘”(롬 11:26)과 대체신학 이슈

  1. 종말의 메시아와 바울의 메시아 왕국에 대한 이해
  2. 유대인을 위한 전무후무한 구원의 시대?
    1) 톰 라이트의 해석
    2) 팔마 로버슨의 해석
    (1) “현재”
    (2) “편견과 오해”
    (3) “더러는”
    (4) “까지”
    (5) “그리하여”
  3. “이방인의 충만한 수”(롬 11:25)의 반대 짝과 대체신학 이슈에 대한 응답
  4. 구원자가 시온에 오심
  5. 후회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
    IV. 나가는 말

(4) “까지”(11:25)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될 것이라”(11:25)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 속에 “까지”라는 단어가 어떤 의도로 사용되었는가? 존 스토트(John Stott)는 “까지”라는 말이 일시적인 점을 강조하고, 그것을 다음 단계, 즉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11:26a)를 가져온다고 해석한다.[1]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그치게 되고 전무후무한 구원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한 세대주의자들은 그렇게 유대인을 위하여 새롭게 펼쳐지는 그 시대는 더 이상 이방인의 시대가 아니고 오직 유대인만을 위한 시대가 펼쳐진다고 주장한다. 스토트를 비롯한 여러 비세대주의자가 세대주의자들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는 않지만, “까지”(아크리스)라는 말이 귀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사용되었다고 해석하는 데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그러나 “까지”에 대한 로벗슨의 해석은 출발점의 의미가 아니라 귀착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칼빈도 “‘까지’로 번역된 헬라어 ‘아크리스’는 시간의 경과나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위하여’를 의미한다”라고 해석한다.[2]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고 나면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게 될 때까지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까지”라는 단어가 출발점이 아니라 귀착점으로 사용되는 성경 구절 몇 구절을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행 22:4).

여기서 “까지”가 가리키는 것은 바울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 행위가 그들이 죽은 후에 그쳤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본문의 요지는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를 궁극적인 지점, 최종점인 지점에 이르기 “까지” 하였다는 것이다.[3]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 “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바울은 “까지”를 통해서 주의 만찬이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는 가운데 주의 죽으심에 대한 전파가 계속될 것을 강조한다. 주의 만찬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는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가 아니다.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방식으로 주의 만찬에 참가하고 주의 죽으심을 계속 기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4]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 “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바울은 율법이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만 그 타당성과 효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타당성과 효력이 상실되고 무효화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 “까지” 굳게 잡아라(계 2:24~25).

이 구절의 뜻은 사단의 깊은 것을 좇지 않는 두아디라 교회 교우들의 옳은 신앙 태도를 말한다. 그들이 바른 신앙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을 때가 도래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고 그때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바른 신앙생활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5]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 “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마 24:38).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 더 이상 먹고 마시지 않는 날이 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말이 이르기까지 먹는 것과 마시는 일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까지”는 단어가 출발점이 아니라 귀착점으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 “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고전 15:25).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아 대행했던 왕권을 온전히 수행하여 마지막 원수까지 정복할 것이다. 그때까지 그가 위임받은 왕권을 계속 수행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난 후 그 왕권을 하나님께 반환하게 될 것이다(고전 15:2~-28).[6] 이제 1967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탈환이 성경 예언의 성취적 사건이라는 근거 구절로 활용되고 있는 누가복음 24장 21절에 주목하여 보자.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

이 구절이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땅에 관하여 언급을 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을 위한 땅에 관한 구약 성경의 약속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반복되지 않는다. 예루살렘이 어느 날 이방인의 통치에서 자유하게 될 것을 약속한 것으로 이해되어, 1967년 이스라엘의 아랍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통한 예루살렘 탈환 사건이 그 약속의 성취적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존 스토트(John Stott)는 “까지”(롬 11:26)에 대한 그의 해석과 달리, “‘이방인의 때’는 이방인의 통치가 지난 후 예루살렘이 자유롭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세계 질서가 끝이 난 후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오시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라고 해석한다.[7] 이제, 로마서 11장 26절의 “까지”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관찰하여 보자.

형제들아…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는 날부터 이스라엘의 더러(일부)는 그 완악함이 줄어들거나 없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더러(일부)의 완악함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다 찰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중에서 완악하게 되는 것이 그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완악하게 하시는 일은 전 역사를 통해서 계속된다는 점을 선언하였다. 위 말씀의 구약 배경이 되는 이사야 6장의 경우에는 이스라엘의 굳어짐이 계속되더라도 “남은 자”만큼은 구원을 받게 된다. 이사야는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6:13)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더러(일부)가 완악하게 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남은 자들”(“그루터기”)이 되어 구원받게 된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유대인들의 “남은 자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고 나면, 이스라엘의 더러(일부)가 더 이상 완악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도 아니다. “까지”라는 말은 출발점보다는 결말이나 귀착점을 가리킨다. “까지”라는 단어를 통해 유대인을 위한 전무후무한 구원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날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 재림의 날이 이르기 직전까지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자만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11:25)나 “유대인의 충만한 수”(롬 11:12, 25)에 들어가 구원받은 “온 이스라엘”(11:26)에 통합된다.

(5) “그리하여”(11~26)

“그리하여”를 “그 후에”라는 시간적 의미로 해석하는 자들도 있다.[8]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받게 되는 교회 시대가 끝나고 나면, “그리고 그 후에” “온 이스라엘”의 전무후무한 구원의 역사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 시대가 전개될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기만 하면 구원받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이방인 중에서도 유대교로 개종하여 유대인이 되도록 한다든지, 유대인과의 결혼으로 많은 후손을 갖도록 하는 일도 유대인의 구원을 위한 전초적 일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리하여”로 해석되는 이 단어가 시간적 의미를 지닌 “그리고 그 후에”로 번역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205회 등장하는데 그중에 시간적 의미를 지닌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그 단어는 “그리고 그 후에” 가 아니라, “그리하여” 또는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로 등으로 번역되어야 한다.[9] 바울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고 난 후에 장차 유대인의 구원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진행 중인 환상적인 구원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그 점에 대하여 로벗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로마서 11장 이전 구절에 표현된 패턴대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패턴은 이렇다. 맨 먼저 이스라엘에게 약속이 주어졌고 메시아가 오셨다. 그 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획대로 그들의 메시아를 저버렸고 그들의 특권적인 지위에서 잘려 나갔다. 그 결과로 메시아가 오셨다는 소식이 이방인들에게 알려졌다. 그 후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힘으로 찾음으로써는 얻지 못한 것을 만국은 믿음으로 얻었다. 자기들의 메시아 왕국의 복이 이방인들에게 쌓이는 것을 보고서 낙담한 유대인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시기심이 발동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그들도 회개하고 믿어 원래 그들에게 주어졌던 약속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즉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는 지점 “까지” 현시대 내내 계속될 이와 같은 환상적인 방법으로 말미암아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다.[10]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고 난 후에 유대인의 구원 시대가 장차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동시대에 각각 구원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그 둘 다 메시아 예수의 초림으로 시작된 메시아 왕국의 동일 주인공인 “온 이스라엘”이 된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1] John Stott, 『로마서 강해 』, 402.

[2] John Calvin, 『존 칼빈 주석 로마서』, 362.

[3] O. Palmer Robertson, 『하나님의 이스라엘』, 208.

[4] 위의 책, 209.

[5] 이필찬, 『에덴의 회복에서 읽는 요한계시록 1-11장: 때가 가까우니』, (서울: 에스카톤, 2021), 433.

[6] John Calvin, 『존 칼빈 주석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441.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369.

[7] Steven Sizer, 『시온의 크리스천 군사들?』, 261.

[8] O. Palmer Robertson, 『하나님의 이스라엘』, 210.

[9] 위의 책, 211.

[10] 위의 책,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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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 아신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교수 및 GMS 아랍권 선교사(천안장로교회 파송. since 1989). 그의 책으로 『이슬람과 메시아 왕국』CLC, 2009)과 아랍권 및 이슬람권 선교와 관련된 여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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