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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다시) 세워야 할 때이다

사진: Josue Isai Ramos Figueroa on Unsplash

 불행히도 해체에 관한 대화에서 너무나 자주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부패를 옹호함으로써 진정한 보수의 의미를 저버리고,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근본 기조를 과하게 선전함으로써 진정한 진보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요즘 “해체”(deconstruction)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의 정서에는 “붕괴”(collapse)라는 표현이 더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헌신의 붕괴, 확신의 붕괴, 이 말에는 기관과 지도자들, 교회에 대한 신뢰가 포함되어 있다. 더욱 심각하게는 기독교 진리가 가진 아름다움과 선함에 대한 (또는 우리는 결국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는) 확신의 붕괴도 있다.

설문조사나 여론조사의 결과는 세속주의와 무종교의 확산뿐 아니라 종교기관에 대한 신뢰가 나날이 잠식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강력한 교회나 친밀하게 결속된 가족이라는 구조적 도움 없이도 세상의 압박에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주의자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만다. 이렇게 자신이 신뢰했던 것의 붕괴를 경험한 사람은 한동안 불확실성은 높아지고 자신감은 낮아진 상태에 머물게 된다.

충성의 진공 상태

그러나 이러한 불확실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로버트 니스벳(Rober Nisbet)의 말처럼, “인간은 충성의 진공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한다.”

이내 어떤 프로젝트나 또 다른 무언가에 충성을 다짐하게 된다. 설사 그것이 당장의 욕구를 만족시켜 줄 뿐인 쪼그라든 욕망일지라도 말이다. 충성은 이렇게 돌아오는 법이다. 우리는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어떤 것(실은 뒤처질 명분)을 찾아 나서게 된다. 오늘날 “해체”라는 용어를 채택하는 일부 그리스도인을 위해 말하자면, 확실성과 신뢰가 돌아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신뢰의 붕괴는 또 다른 입장의 강경한 확신이 되어 버렸는데, 바로 기독교 믿음은 가망이 없을 정도로 타협에 넘겨졌으며 전면 수정하거나 폐기해야 할 것으로 전락했다는 입장이다.

파편들로 다시 세우기

한편, 헌터 버몬트(Hunter Beaumont)가 “탈문화”(disenculturation)라 명명한 긍정적 해체가 있다. 그는 여기서 교회가 문화라는 덫에서 진짜 기독교를 분별해야 하며, 낡은 바닥과 벽은 벗겨 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이런 유의 해체에는 회개와 겸손이 내포되어 있다. 곧 교회가 자행한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돌아가, 그분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드러나도록 그분의 형상대로 우리를 다시 빚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는 생각의 표출인 것이다.

불행히도 해체에 관한 대화에서 너무나 자주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부패를 옹호함으로써 진정한 보수의 의미를 저버리고,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근본 기조를 과하게 선전함으로써 진정한 진보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자, 건물의 낡은 부분은 그냥 무너지게 두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근시안과 이기심에 맞서 도전하실 때, 진리와 맞바꾼 거짓을 버리게 하시고, 구원자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모든 것이 우리의 눈에서 벗겨져 우리 마음이 변화되게 하시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러한 부패의 싹을 잘라내는 일은 우리가 서 있는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곰팡이가 핀 바닥을 벗겨 내는 이유는 집을 위해서이며, 바닥 아래에 견고한 기초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올바른 종류의 해체는 개조와 재건과 회복의 첫걸음이다.

회복적 해체

이러한 회복이 일어나려면, 확신이라는 것은 일단 흔들어 놓아야 만족하는 현시대의 분위기에 저항해야 한다. 진보는 우리에게 할머니 시대의 믿음 따위는 거부하라고 한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보여주었던 교회의 어리석음을 비웃어 버리라고 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교회의 교훈 따위에 더는 자신을 옭아매지 말라고 한다. 이처럼 이 시대는 귀로 듣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으라고 우리를 압박한다.

회복은, 회개의 길이 그렇듯이, 해체에서 시작된다. 회개는 기독교 진리에 담긴 흔들리지 않는 은혜에 대한 믿음, 교회가 은혜의 아름다움을 더욱 드러낼 것에 대한 소망,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죄인들을 향한 사랑 이것으로 가득한 길이다.

다시 세워야 할 때

앞으로의 날들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시고자 그 뜻 안에서 허락하시는 종말론적 재난을 주의 깊게 살펴볼 때, 철저하게 삶의 모든 영역(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서)의 부패한 곳을 제거하는 일에 자신을 드릴 때, 다시 세우라는 부르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회복이 목적이다. 다시 지어지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스도인 교수의 올바른 역할에 관한 통찰력 가득한 두 편의 글을 쓴 브래드 이스트(Brad East) 교수는 그가 자기 일을 왜 성을 쌓는 일(fortification)의 하나로 여기는지를 (학생들의 믿음의 기초를 다지고 지키는 의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해체는 그저 파괴일 뿐입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집을 세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질문을 피하거나 의심과 씨름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공동체에 전해 내려오는 명제들을 아무런 의문 없이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렇게 성을 쌓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난제에 봉착한다. 그러나 이 씨름은 우리 이전 세대에도 있었으며 우리 이후에도 있을 것임을 생각하면서 성경과 위대한 기독교 전통으로 돌아가 이러한 질문을 가감 없이 던진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기독교 공동체를 불신하고 그 권위를 무시하는 방법으로 잘못에 대해 비난하기를 즐기는 질문자와 기독교 공동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잣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공동의 헌신에 의지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죄와 악을 인정하는 질문자는 다른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브래드 교수는 자신의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 가운데 그들의 교회에서 은연중에 유사 마르시온주의, 곧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성경,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암묵적인 회의론”을 흡수한 학생들에 관한 글을 쓴 적 있다. 그 학생들의 마르시온주의 신앙을 ‘해체’하기 위해 브래드는 그 학생들의 가정과 교회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해야 했다. 그들의 목사와 교사들이 성경의 3분의 2나 되는 부분[구약성경]과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간과해 왔는지를 거듭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대신에, 만약 브래드 교수가 그들의 마르시주의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그 학생들의 교회가 가진 확신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구약성경에 대한 암묵적 무시가 그 학생들이 항상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바로 그 신앙에 얼마나 반하는지를 보여주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 세우는 일”임을 상기시켜주는 회복적 감수성이다. “이 세우는 일을 하는 동안 재건축, 슬레이트를 교체하는 일, 또는 벽과 건물의 토대를 더욱 튼튼하게 고정하는 일 같은 작업이 수반된다. 목적은 세우는 것(edifice)이 목적이다. 사도 바울이 서로 덕을 세우라(edification)고 촉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살전 5:11].

영적 재충전으로 가는 길

(서구) 기독교의 미래는 해체를 자기네 “브랜드”로 내세우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세상과 교회의 타락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심령이 가난한 이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겸손한 이들, 평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교회를 떠난 위선자들에게서 조롱당하는 마음이 순결한 이들의 것이다.

영적 재충전은 성령의 역사,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 우리가 교회 안에 거하며 교회 사랑하기를 힘쓸 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은 비록 얼룩은 졌더라도 그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다시 빛날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우리가 교회 안에 거하며 교회 사랑하기를 힘쓸 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은 비록 얼룩은 졌더라도 그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다시 빛날 것이다 

트레빈 왁스(Trevin Wax) | 트레빈 왁스는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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