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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칼럼] 자아 처리 (1)

사진: pixabay

이 말씀은 여러분을 절망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탄식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살라는 말이야!’ 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절망의 끝에서 진짜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자아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아실현이고, 하나는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자아실현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아가 죽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자아의 죽음이 아니라 자아실현의 길 끝에는 반드시 심판과 저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구체적인 ‘때’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에 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경배하지만 마음은 주님과 먼 것이 외식이고 위선입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결코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바라는 것은 세상 것이지만 입술로는 주님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 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눅 17: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재림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지금 주님의 때가 오고 있습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수 있는 세상의 조건은 점점 갖춰지고 있습니다. 재림의 때를 특정해 말하는 것은 이단이 하는 일이지만, 시류를 보고 재림의 때를 생각해보는 것은 지혜입니다. 제자들은 인자의 날, 즉 재림의 때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개념의 재림의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때가 오고 있습니다

흔히 ‘이것을 보고 죽는다면 더 원이 없겠다!’는 말을 합니다. ‘합격하면, 당선되면, 해방되면 더 소원이 없겠다.’ 모두 특정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특정 시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 몸이 있기에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몸이 있기에 무엇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누적되어 형성된 것이 세계관이고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온 마음을 그것에 빼앗깁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재림의 때를 말하지만 결국 몸이 있기에 필요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 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눅 17:23-24)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하는 말에 속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이 시공간의 개념이 찢어집니다. 재림의 때에 한국에서 번개가 치면, 대척점인 아르헨티나에서도 그 번개를 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번개를 본다면 지구 반대편 파나마에서도 그 번개를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의 개념이 아닙니다. 공간의 개념이 해체됩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열심’이 있는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구별된 제자들까지도 시공간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아 때문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실현시키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욕구를 실현하는 장소와 때기- 바로 시공간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지향합니다. 자아는 ‘땅에서’ 실현하고자 합니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이 땅에서 무언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재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노아와 롯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경계선이 있다면 마음 안에는 속사람이 있고 마음 밖에는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 자아는 속사람보다 마음 밖 세상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마음 속에 관심이 있습니다. 마음에 거룩한 영이 있어야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세상을 다스리고 싶어합니다. 세상에 마음을 둡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마음 안이 바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속사람이 바뀐 사람입니다. 속사람이 바뀌지 않고 믿음의 열심을 부리는 것은 고약할 뿐입니다. 영향력을 행사하며 무언가 봉사하며 교회에 일조하지만 말 그대로 일조만 할 뿐입니다. 그것은 유사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스며들지 않고 흘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 17:27-28)

아담에서 노아까지 시대는 1500년 정도입니다. 세대로 보면 대략 10대입니다. 아담은 950년, 노아는 960년을 삽니다. 노아가 아담을 봤다는 말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직접 봤던 사람입니다. 에덴동산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집 한 채를 잃어버리게 되면, 아니 100만 원을 잃어버리거나 신발 하나만 잃어버려도 마음이 시끄러워집니다. 어떤 사람은 누가 자기에게 인사를 안했다며 한 달 동안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속았습니다. 사탄에게 사기를 당한 셈입니다. 한이 맺힌 마음을 자녀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너희들 그렇게 살면 큰일난다. 그렇게 살면 넘어진다니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들 가인은 살인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파는 경제활동에 마음이 다 팔려 있습니다. 자아실현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들어도 자아가 정돈되지 않는다면 결국 세상에서 자아실현 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영향력이 커지고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 자아실현을 해도 끝은 멸망입니다. 자아를 죽이려는 몸부림과 싸움이 없다면 그냥 세상에 푹 빠져 사는 미물이 됩니다.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 들을 멸망시켰느니라 (눅 17:29)

유황불이 비오듯 하는 곳에서도 자아를 실현하려고 합니다.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사고 파는 일은 건전합니다. 그러나 죽는 줄도 모르고 그것에 온 마음을 다 쓰게 되면 건전한 것이 아니라 속은 것이 됩니다. 미련한 짓이 됩니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눅 17:31)

재림의 때에 주님의 오심을 누구나 다 알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 날’에는 공간의 개념이 무너지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이 오심을 압니다. 그런데 ‘그 날’에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이 세간이 있는 집으로 내려갑니다. ‘그 날’이 왔는데도 세간살이 건지러 집으로 내려갑니다. 영광이 가득하고 천군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주님이 오시는데 세간살이가 뭐라고 집으로 내려갈까요? 죄는 씻겨야 하지만 자아는 죽어야 삽니다. 더 실감나게 말하면, 세간살이 챙기러 집으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세간살이를 가지러 가는 것은 곧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멈추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세간살이를 가지러 가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자아가 죽기 전까지는 길이 없습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눅 17:32)

롯은 아브라함과 갈등이 있었을 때 물 좋은 땅 소돔으로 가서 정착했습니다. 롯은 미혼이었습니다. 소돔에 정착해 뿌리를 내렸고 자녀들도 두었습니다. 소돔에는 동성애가 만연했습니다. 주의 천사들과도 관계를 맺으려고 롯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올 정도로 타락 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시대가 소돔이었고 지금 시대도 그렇습니다

동성애에 대해 분별해야 합니다. 낙태죄가 폐지됐습니다. 부모가 자녀 동의 없이 자녀의 이메일을 열어 보면 고발하라고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다고 합니다. 속이 뒤틀립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대내외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 탄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성교육 그림이 포르노 수준입니다. 에이즈의 대부분이 남성들끼리 동성애에 의해 나타난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교과서에서는 그것을 경고하지 않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남성이나 여성이 여러 이성을 만나면 문란하다고 가르치지만 동성애는 문란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끔찍합니다. 양성평등과 성 평등을 구분해야 합니다. 양성평등은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는 개념이지만 성평등은 제3의 성이 있고 제4의 성이 있다는 개념입니다. 중성도 있고 남성임에도 여성이 되고자 하는 성도 있고, 여성임에도 남성이고자 하는 성도 있다는 말입니다. 반역입니다. 그런 시대가 소돔이었고 지금 시대도 그렇습니다.<계속>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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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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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칼럼] 자아 처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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