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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성경 속 하나님과 연결된 아름다운 내면

ⓒ pixabay

“스미스는 결코 반지성적 신앙(anti-intellectual faith)을 옹호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기독교 진리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이성을 뛰어넘는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시대를 특정하는 단어는 온전함(wholeness), 흠 없음(intactness) 그리고 완전성(integrity)에 대한 깊은 갈망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무너진다.”라는 사실을 전 세계적으로, 국가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고통스럽게 목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만물을 하나로 묶으실 뿐 아니라(골 1:17), 타락하고 분열된 세상에 완전한 치유를 가져오기 위해 다시 오실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사이에 발생하는 일이다. 행여 너무 강한 압박으로 인해 주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개인적인 수단마저 무너지는 건 아닐까? 조심하지 않으면, 약한 믿음을 지키려는 상한 마음의 노력이 오히려 영혼에 더 큰 균열을 일으킬 수도 있다.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개인적인 회고록에서 자신을 종교적인 수준에 이르는 이성의 힘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린 철학자로 묘사한다. 스미스는 결코 반지성적 신앙(anti-intellectual faith)을 옹호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기독교 진리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이성을 뛰어넘는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정열과 감정까지도 이성이 지배하는 인간에 대한 플라톤의 기본적 그림”이 가져다주는 정서적 황폐함과 목회적 부적절함을 비난한다.

(그가 스스로 표현한 대로) 철학에 대한 스미스의 자신감은 절망의 구덩이에 빠진 그 자신을 구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깊은 우울증을 앓는 동안 이성이 그의 상태에 관한 그 어떤 설명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그는 추상적 심리 분석을 제공하는 대신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와 그냥 옆에서 함께 있어 준 카운슬러의 존재를 향해 찬사를 보낸다.

자신과 같은 개인적 절망이 문화 속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을 본 스미스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나는 이 혼란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을 스스로 생각할 수 없다.” “지적 진리”와의 거래에 지친 그는 또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이제 내 운명을 시인과 화가, 소설가 그리고 작곡가와 함께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내 목적은 단지 스미스에게 어떤 답을 주기 위한 게 아니다(이미 많은 이들이 그런 시도를 했다.) 스미스가 거부하는 것이 단순히 합리주의와 그로 인한 서구 신앙의 잔류물이라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속이 다 시원하네.” 신앙 및 인간의 온전함과 관련해서 창조적 예술에 이바지하는 그의 비전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부족(tribe)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금 시대를 고려할 때,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얼마든지 좋을 수도 있는 것을 부분적으로 경시하고, 그가 보기에만 좋은 것을 찬양하는 스미스에게는 경고가 필요하다.

파편화된 신앙

스미스는 새로운 운영 방식(modus operandi)에 필요한 동기로 다음의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의 말을 인용한다. “믿을 수 있는 건 사랑뿐이다. 다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고, 다른 어떤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 스미스는 이렇게 추론한다. “만약에 믿을 수 있는 게 사랑뿐이라면 문학이 철학보다 더 진실하다.” 그는 “고양된 상상력”이 작동하는 방식으로, “예리함보다는 매력”을 가진 글을 쓰고 싶어 한다. 철학은 “상상을 ‘말하지’ 않기”에 실격이고, “마음에 맞지 않는 방언을 말하는” 논리학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둘 중 하나(either)/또는 단절이라는 식의 사고는 사랑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존재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거라면(신 6:4; 마 22:37), 논리적 분석조차도 각자가 느끼는 마음의 언어를 통해 서로 따뜻하게 소통해야 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우리는 왜 철학과 상상력이 서로를 필요로 하지(commiserate) 않는다고 가정해야만 하는가? 이성과 그 변증법적 액세서리야 제자리를 찾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신앙과 관련한 이성의 제한된 기능 때문에 꼭 기피 대상이 되어야 할까? 이성이 가진 한계가 항상 부채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가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이성은 오로지 인간의 능력에 의존한다고 선언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 전체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이러한 내적 분열이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전체성의 신학(Theology of Totality)

스미스가 추구하는 전통의 한 축을 담당하는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신앙의 “일방성(one-sidedness)”에 대해 경고했다. 이런 영적 “병리학”은 기독교 신앙을 지성이나 감정과 같은 하나님과의 상호 작용에 필요한 특정 영역 속으로 가둔다. 바빙크는 이렇게 주장했다. “종교를 완전히 정의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의 기능을 구별하는 데 기초가 되는 핵심적 일치(unity)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성경이 마음(heart)이라고 명명한 것으로, 거기에서부터 삶 속의 정신(mind)과 감정 그리고 의지의 모든 표현이 나온다.” 바빙크에게 있어서 인간 내면의 연결성은 우리가 마음을 다한 신앙의 추구라는 과정(arts)에 참여하도록 한다.

뛰어난 바빙크 전기를 쓴 제임스 엘링튼(James Eglinton)은 바빙크가 가졌던 근본적인 부담은 다름 아니라 전체성의 신학을 수행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바빙크는 피조물의 세계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을 때 창조의 “측량할 수 없는 상호연관성”, 즉 온전함(integrity)을 즐겼다고 고백한다. 사랑에 관한 작품에서 바빙크는 무엇보다 미학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기뻐했다. “우리를 만나 비추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 자연과 예술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인간과 세계는 둘 다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같은 이유를 가지고, 같은 정신으로, 또 같은 질서 속에서 이 둘이 함께 존재한다.” 이 존경스러운 바빙크 교수는 예술을 인류학(인간에 관한 연구), 심지어 종말론의 교사로까지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구체적인 한 에세이에서 바빙크는 아름다움이 가진 계시적 능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름다움은 잠자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이미지와 기분 그리고 감정을 일깨운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나를 나 자신에게 드러낸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느끼고 또 전달한다. 그것은 예언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멸망할 운명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속 갈망이 추구하는 영광을 향해 가고 있다.

아름다움은 우리 인간성의 숨겨진 측면을 드러내고 완전한 치유가 우주를 향해 오고 있음을 보증한다. 성령님이 성경에 그토록 많은 아름다움을 더해 주셔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경은 예술적 영혼을 키운다

성경은 종종 예술적 영혼에 영양을 공급하는 스타일로 인간의 마음 전체에 이야기한다. 많은 사례가 있지만, 성경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장소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작은 성경”이라고 부른 시편이다.

시편은 내용과 구성 면에서 성경이 어떻게 둘 다(both)/그리고에 관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마음의 외침은 삼단논법적 추론을 특징으로 하지만(시 66:18-19), 또한 논리적 분석은 마음이 가진 창조적 한계도 알고 있다(시 131; 139:6). 때로는 건전한 전제를 설정했음에도 추론된 결론에 이르지 못하기도 한다(시 42).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시편은 나머지 성경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다윗 왕의 애처로운 시(시 32)는 자기 의를 향한 사도 바울의 분석적인 공격(롬 4장)의 토대가 된다. 시편에서 독단적 교리는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승화된다. 인간이 만든 학문 속에서 발견되는 잘못된 이분법은 찾을 수 없다. 에스더 믹(Esther Meek)은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표현한다. “사상 최고 철학자이신 하나님 편에서 베푼, 과도할 정도로 관대하고 예술적인 사랑의 행위로 성경을 바라볼 때 성경의 가치는 비로소 가장 빛난다.” 성경은 예술적으로 말해서 절대적인 진리이다.

나머지 성경과 마찬가지로 시편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동시에 완전히 인간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영적인 노래는 육신이 되신 영원한 말씀, 예수님의 마음을 채웠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하기까지 했다. 시편은 우주적 완전함이 되신 예수님을 예언했고, 또한 그 일을 이루신 그분 영혼의 양식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분리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치유의 찬양을 통해서 우리 마음 전체를 하나로 묶는다. 비인간적인 양극화와 종교적 환멸의 시대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으로서 우리의 고결성을 잃도록 만드는 유혹이 사방에서 공격할 때, 하나님이 주신 사랑스러운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지 않고 온전히 지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복음기도신문]

“예수님이 우리의 존재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거라면(신 6:4; 마 22:37), 논리적 분석조차도 각자가 느끼는 마음의 언어를 통해 서로 따뜻하게 소통해야 하는 게 아닐까?”

루트레지 에더리지 (Rutledge Etheridge III) | Geneva College의 성경학 조교수. 지은 책으로는, ‘하나님이 숨쉬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 다른 사람, 자연 세계, 그리고 당신 자신과 연결하기(God Breathed: Connecting Through Scripture to God, Others, the Natural World, and Yourself)’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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