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카셀의 북서부 지역에는 근사한 트레킹 코스가 있다. 블루 레이크라는 호수를 끼고 조성되었는데, 빼어난 자연경관 외에 이 코스가 유명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트레킹 코스를 따라 미술작품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을 볼 수 있다고 해서, 갤러리나 조각 공원의 작품을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무덤이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미술 행사 ‘카셀 도큐멘타’에 초청된 여러 미술가 중 헨리 크레머(Henry Kramer)는 이곳에 자신과 함께 묻힐 40인의 예술가들을 초청했다. 이 ‘예술가들의 무덤(The Artists Necropolis)’에 초청된 예술가 대부분은 카셀 도큐멘타에 참여한, 국제적인 명망 있는 작가들이었다. 크레머는 이들에게 그들의 무덤이 치열한 미술계에서 겪어 온 경쟁과 고통이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작품이 되길 주문하였다. 이러한 취지에 맞춰 제작된 무덤은 주인의 명성과는 달리 아주 소박했고, 또 고요했다. 아직은 빈 무덤이지만, 팀 울리히(Timm Ulrichs)는 자기 두 발바닥만 찍힌 작은 판을 설치했고, 브랄라 홀만(Blalla Hallmann)은 A4 크기의 회화 한 점을 나무에 건 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죽음에 화려한 장식을 더하지 않았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신앙의 여부를 떠나 인간 그 누구라도 순응할 수밖에 없는 불변의 진리를 보여주었다.
1997년 무덤이 ‘개장’했을 때, 기획자 크레머가 가장 먼저 자신의 무덤에 누웠다. 그리고 가장 최근인 2018년 하인리히 블룸막(Heinrich Brummack)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블룸막의 작품은 작은 분수 같은 형태로, 제목은 <새 물통>이다. 비가 와서 무덤에 물이 고이면 새들이 날아와 물을 마시곤 한다. 소박하고 고요한 예술가들의 무덤들을 둘러보면, 하나님의 주권 앞에 입을 가리고 조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동시에 고통과 실패, 아픔과 좌절을 잊게 된다. 마치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 앞에, 그토록 참담한 고통을 겪었던 욥마저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라고 한 것처럼. [복음기도신문]
이상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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