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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를 위한 격려

▲ 사진: unsplalsh

“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여, 예수께서 그런 곳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 ”

필자의 부친은 메인(Maine)주의 시골 지역에서 삼십 년 간 목회했다. 그 대부분 기간 동안 아버지는 각각 다른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 세 개의 교구에서 목회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모르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전혀 인지도가 없는 곳에서의 목회가 주는 기쁨과 희생이 무엇인지 경험하며 자랐다.

아버지께 듣기로, 몹시도 춥던 어느 겨울 주일 아침, 섬기던 교회 예배에 나이 지긋한 여자분 두 명만 참석했다고 한다. 예정대로 예배를 진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버지가 물었을 때 그분들은 예배를 드리자고 했고, 아버지는 설교를 하고, 찬송과 기도를 인도했으며, 다같이 헌금도 했다.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셨다.

이후 계속하여 나는 우리가 살았던 작은 마을에서 목회의 기쁨과 산고를 직접적으로 맛보았고,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온 시골 교회 목회자들을 만나보는 특권을 누렸다. 내가 만난 많은 시골 교회 목사들은 모두 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비전, 에너지, 열정, 그리고 능력이 있다. 다른 모든 목회자들처럼, 그들 역시 격려가 필요하다.

작은 마을에서의 목회는 힘들다. 사람들이 그다지 감사하는 것 같지도 않고, 소위 더 넓은 세상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격려가 필요한 곳이다. 마가복음 6장 1–6절을 보면 고향에서 사역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전 세계의 작은 마을과 시골 지역에서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는 사역자들을 위한 강력한 격려가 이 짧은 본문에 적어도 세 번 등장한다.

예수님은 작은 마을을 사랑하신다

나사렛은 인구가 200명에서 400명 정도에 이르던 별 볼일 없는 곳이었다.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9마일 정도 떨어진 더 크고 부유한 마을이었던 가나 출신인 제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을 무시했다(요 1:46; 21:2). 하지만 마가의 묘사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결코 나사렛을 무시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나사렛에 가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도 데리고 가셨다.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자 하는 완벽한 사역 계획도 있었다.

어디든 갈 수 있던 하나님의 아들이 이 작은 마을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오늘날의 “도시의 한복판을 취하라” 식의 접근법이 아니다. 사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결코 자신이 작은 마을 출신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려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레이 오트룬드(Ray Ortlund)의 지적처럼 예수님은 부활과 승천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이 그 작은 마을 나사렛 출신임을 말씀하셨다(행 22:8).

중요한 것은, 마가복음 6장이 나사렛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이 일탈이 아님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고향이기 때문에 나사렛에 대해 특별히 호의를 보이신 것이 아니었다. 나사렛에서 그가 시간을 보내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은 크든 작든 상관 없이 모든 곳을 똑같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6절은 예수님은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라고 말한다. 뒷부분에서 마가는 예수님이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사역하셨다고 기록한다(막 6:56). ‘마을’로 번역된 이 단어는 사실 ‘밭’으로 번역되어야 하는데, 그리 보면 예수님은 심지어 사람들이 일하던 밭으로도 찾아가셨다는 의미다.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여, 예수님이 그런 곳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 당신이 사역하는 곳 역시 그가 알고 계시며, 당신이 그 마을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 곳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곳을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을 초청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낙심한 모든 작은 마을 목회자들이 겪는 어려움들을 아주 소상히 알고 계신다. 예수님 자신 역시 어려운 작은 마을 사역을 감당하셨다. 나사렛에서의 사역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떤 교회 지하에서 원탁을 중심으로 접이식 의자에 앉아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목회에서의 어려움들을 함께 나누고 있는 한 무리의 목회자들을 한 번 상상해 본다. 예수님도 바로 거기에 계신다. 예수님은 “그래, 나도 나사렛에서 멋진 사역을 할 수 없었단다. 대부분이 나를 거절했지. 아주 ‘척박한’ 땅이었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마주하셨던 문제는 모든 작은 마을 사역에 있어 공통된 문제였는데, 그것은 바로 서로를 너무도 잘 안다는 것이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미 잘 안다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에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그들 가운데서 자랐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던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들에 대해 불편해 했다.

미국에서 소위 기독교왕국(Christendom) 이후 등장한 도시들처럼 진보적이지 않은 시골 지역에서는 기독교 신앙과 문화들이 여전히 주류를 형성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겉치장 수준에서 받아들여질 뿐 깊은 내면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곳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교회 출석, 전통 가치, 문화적 기독교 같은 것들이지 예수님의 권능과 임재가 아니다.

내 친구 중 하나가 남부에 있는 어떤 작은 마을에서 역동적인 교회를 개척했는데 전통적인 지역 교회들의 저항을 받았다. 어떤 가난한 시골 지역에서 학령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다른 친구 한 명은 내게 말하길 그 지역의 비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지만 자기 사역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지역 ‘교회들’이라고 했다. 기독교 전통의 문화적 유산을 너무도 잘 아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작은 마을에서 역동적이고도 실천적인 신앙에 대한 경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사렛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작은 마을에서의 삶에 있어 바로 그러한 국면들은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에 대한 장애물로 작용한다. 마을 구성원 사이의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는 외부인을 적대시하는 죄를 조장한다. 지금껏 지켜온 전통을 지키고 현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습성은 변화와 적응을 기피하게 만든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과당 경쟁과 혁신 일변도의 삶을 피하고자 하는 욕구는 역설적이게도 그저 그런 평범함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현상을 초래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작은 마을의 그러한 면들이 그곳에서의 우리의 사역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알고 계신다. 그 자신이 그것들을 경험하셨다.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여, 예수님은 당신이 겪는 어려움들을 이해하신다.

예수님은 작은 마을에서도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예수님의 작은 마을 사역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소망을 주기도 한다. 이 본문에 숨겨진 작지만 위대한 격려는 예수님이 그의 고향 사람들 중에서 믿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사실이다. 이 본문에 나온 예수님의 네 형제들 중 두 명이 훗날 신약 서신의 저자들이 될 것이었다. 유다와 야고보는 예수님을 형으로 두고 자랐고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이 단순히 자기들의 형이 아니라 그들의 주요, 그리스도요, 주인이심을 깨닫게 되었다(유 1; 약 1:1).

예수님은 작은 마을에서도 그를 따르는 자를 찾으신다. 그 자신이 몸소 그런 곳에 가셨고 제자들 역시 그런 곳에 보내심으로써 이를 보이셨다(마 10:11; 눅 9:6). 예수님 이후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바울은 회심한 후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행 26:20)을 향해 복음을 전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와 더베 뿐 아니라 그 근방으로도 가서 복음을 전했다(행 14:6–7).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여, 예수님이 ‘당신’을 그곳에 보내신 것은 그가 당신이 섬기는 그 작은 공동체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웃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찾고 계신다.

예수님은 작은 마을들을 사랑하신다. 그런 곳에서의 목회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아시지만 그 자신이 그런 곳에 가시고 그를 따르는 자들 역시 그곳에 보내신다. 담대하라. 당신의 사역지에 그가 구원코자 하는 이들이 있다(행 18:10). 그들을 구하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라.

“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여, 예수님이 ‘당신’을 그곳에 보내신 것은 그가 당신이 섬기는 그 작은 공동체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스티븐 위트머 Stephen Witmer | 매사추세츠주 페버럴 크리스천 펠로우십교회의 부목사. 케임브리지 대학교(PhD)를 졸업했고, 현재 고든 콘웰신학대학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며, 소규모 교회와 목회자들을 섬기는 단체인 스몰타운서밋의 공동 설립자. 대표 저서는 ‘영원이 변화시키는 모든 것(Eternity Changes Everything)’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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