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뗄 수 없는 연결의 끈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다음의 세 그룹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살았던 시대는 물론 인종, 언어, 직업도 전혀 다르다. 완벽하게 단절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운명적인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 후 2020년,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는 카렌 청년들’
‘주 후 33년, 스데반 집사의 순교 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흩어진 초대교회 신자들’
‘주 후 1796년, 영국의 런던선교회에서 파송된 폴리네시아 군도의 초기 선교사들’
이들의 연속성과 연관성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연관성 중 하나는 각 시대의 최초 선교사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이나 한국의 선교사 파송과는 너무 다른 환경 속에서 파송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기준으로 보면 선교사로 불리기가 너무 안쓰럽다. 선교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연관성은 그들의 사회적 위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출한 재능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주변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새롭게 속한 사회에서 그렇게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핍박도 있었고 때로는 폭동으로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안타깝게도 또한 이들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점에서도 연관성이 있다. 보호 장치나 안전시스템이 거의 없는 상황에 내버려진 듯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경험한 시행착오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 영국에서 남태평양에 파송된 최초의 선교사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19세기에 세계 선교를 주도하였던 영국의 선교단체였던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 Society)는 1795년에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796년에 최초로 30명의 선교사들을 남태평양에 위치한 폴리네시아 군도에 파송하였다. 안정된 수입과 생활이 보장된 영국성공회 신부들은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다. 정책을 바꾸어 선교사 후보생의 자격을 대폭 낮추어 일반인들을 받았다. 비성공회 소속 4명의 목회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평범한 평신도들이었다. 이들의 직업을 보면 알 수 있다. 목수 6명, 직조공 2명, 재단사 2명, 벽돌공 2명, 제화공 2명이고 마구 만드는 사람, 통 만드는 사람, 모자 만드는 사람, 가게 주인, 귀족의 하인, 대장장이, 외과 의사들(당시에는 이발사와 관련된 사람), 면 기술자, 직물 장사, 가구장이는 각각 한 명씩이었다. 동반자로 부인 6명과 아이 셋이 있었다.
그런데 영국을 출발하자 마자 문제가 발생하였다. 뱃멀미로 한 가정이 포기한 것이다. 1796년 8월 10일 출항하여 거의 7개월이 걸려, 1797년 3월 5일 타히티 섬에 도착하였다. 통가, 마르키즈 제도에 내렸을 때 후 폭력사태가 발생하여 3명의 선교사들이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11명이 떠나 30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시작한 선교사는 15명이었다. 아내는 한 명만 남았다. 1년 만에 반으로 줄어든 선교사들은 5년이 지난 후 소수만이 남았다. 나머지는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무기력으로 선교사의 길을 포기하였다. 4,3000㎞가 넘는 지리적 환경과 돌봄의 구조가 없었기 때문에 초기 선교사들은 사실상 방치된 채 대부분 사라져 갔다.
카렌침례총회에서 파송되어 한국에서 일하는 자비량 선교사들의 형편이 그들보다 아주 좋아 보이지 않는다. 본국 교회가 격려를 위해 방문할 수 없다. 재정적으로 그들을 돕고 지원하지 않는다.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은 경우는 드물다. 선교사라고 인정을 해주지도 않는다. 한국의 일반인들이 볼 때는 힘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직업을 마음대로 바꾸지도 못한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본인이 원하여도 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연약한 주변인들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꼭 하고 싶었던 것이 이들을 직접 만나 격려하는 것이었다. 평소에서도 2주에 한 번씩은 메신저나 카톡으로 연락을 하여 이야기를 듣고 기도를 해 준다. 그런데 이번 태국으로 돌아가면 직접 대면하는 것은 앞으로 최소1, 2년은 기다려야 한다. 주일 예배가 오후이어서 미리 아내와 같이 포천에 가서 만났다. 교회에서 식사를 간단히 하고 밖으로 나가 까페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의 어려움도 듣고 격려로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생활하면서 어려움은 없는지 질문한다.
“식사 시간이 너무 짧아서 음식을 해 먹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잘 있습니다.”
‘짜뚜롱’의 이야기이다. 공장은 일이 많아서 야근을 늘 한다. 식사시간이 점심은 한 시간, 저녁은 30분이니 제대로 챙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대충 먹는데, 앞으로 건강을 잘 챙기고 생활할지 걱정이다.
“공장 직원이 코로나로 교회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도 다른 이유로 나오는데, 마음이 괴롭습니다.”
타이교회에서 찬양 리더를 하는‘손찓’의 이야기이다. 코로나가 확산되니 공장 직원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이야기를 듣고, 격려를 해주고 기도를 했다. 이후에 근처에 있는 마트에 갔다. 아내가 영양가 있는 일회용 음식을 알려주고 몇 가지를 구입해서 주었다. 태국에 온 신임 선교사들을 여러 번 돌 본적이 있지만 내용이 너무 다르다. 한국에서는 파송 받기 전에 선교훈련을 마치고 성대한 파송식을 한다. 이후 선교지에 오면 선교사들을 위한 관리는 언어훈련, 자녀교육, 적당한 주택, 차량 안내 등등이다. 새로운 문화 속에서 적응과 생존은 동일하지만 상황과 돌봄 구조는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물론 선교훈련을 받고 선교지에서 적절한 돌봄을 받는 것은 중요하다. 때로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상식과 다름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 언급한 세 부류의 연약한 공동체의 공통점은 또 남아 있다. 그들과 접촉한 세상을 전혀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런던선교회가 1895년에 파송한 선교는 실패처럼 보인다. 그런데 인간적인 아픔과 시행착오 속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30명 중 소수의 남은 사람 가운데 헨리 노트(Henry Nott)가 있었다. 그는 언어를 완벽히 습득 해 토착어로 설교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50년 가까이 일을 하였다. 그를 통하여 타히티의 왕 포마르(Pomare) 2세가 예수를 믿고 집단 개종이 일어났다. 현재 폴리네시안 군도의 50%가 넘는 인구가 개신교가 된 원인 된 것이다. 그는 벽돌공이었고, 공식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선교지에 도착할 때 고작 22살이었다. 연약함 투성이로 교육받지 못한 평범한 젊은이가 새로운 세상을 연 것이다.
초대 교회의 중심이었고 유일했던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으로 흩어져 기독교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이 비로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전에는 복음의 불모지인 안디옥이 세계 선교의 중심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실패자처럼 흩어진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환영 받지 못하는 곳에서 세계 선교의 새장을 열었다
한국의 변두리 포천에 있는 카렌 자비량 선교사들도 연약함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도 새로운 세상을 열게 될 역할과 부르심이 있다. 한국에 들어온 태국인 노동자 20만을 위한 새로운 세상이다. 능력과 웅장함과 권세와 너무 멀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여시는 시간과 방법은 세상과 다르다.
역사의 주인으로 세계교회와 선교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하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위 세 부류의 선교사들의 연관성과 연속선은 그것을 다시 느끼게 한다. 그의 중심은 연약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새 세상을 열게 한 것이다. 크신 주님 앞에 겸허히 서야 하고 배워야 함을 다시 고백한다. <무익종(본지 통신원)>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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