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적으로 드러난 가족구성원 자체가 여느 한국의 가정과는 사뭇 다르다. 42살과 40세의 젊은 부부는 다섯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4남 1녀의 자녀들은 18세, 16세, 14세, 12세 그리고 막내는 이제 3살이다. 아이들도 많고 40대 초반인 부모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이들 나이도 많다. 4명의 아이들이 학교는 다니는데, 한국의 학생과는 다른 학년이다. 첫째가 만 18세인데 고2이다. 친구들보다 2년이 늦다. 둘째는 더 늦다. 만 16세이면 고1이어야 하는데 초등학교 6학년이다. 셋째는 넷째 딸과 두 살 차이가 나는데 같은 5학년이다.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2015년 12월 23일 한국에 정착하여 부평에서 살고 있는 한 카렌족 난민 가족이다.
가족들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일반 한국가정과 다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학교라는 곳에 다녀본 적이 없었다. 나이를 고려하면 이곳에서 태어난 막내를 제외하고 학교를 다녔어야 했다. 그런데 누구도 난민캠프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안 다닌 것이 아니라, 다닐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우리 부부가 같이 밖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난민촌 근처의 태국 카렌 마을의 옥수수 밭에서 일을 했다. 시민권이 없었기에 불법이었다. 밖에 다닐 때는 차를 탈수가 없었다. 태국 군경의 검문이 철저했고 적발되면 벌금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아이들도 같이 옥수수 밭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아이는 8살부터 말린 옥수수를 빼내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10여 년 전 어른들의 일당은 하루에 50받이었을 때 아이들에게는 25받을 주었습니다.”
어른들은 하루에 2000원도 안 되는 품삯을 받았고 아이들은 1000원도 안 되는 액수였다. 점심도 본인이 해결해야 했다. 오기 직전에는 임금이 올라서 100받인데, 당시 약 3000원 정도였다. 난민촌에 많은 난민들이 일을 하고 싶어하는데,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으니 터무니 없는 임금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큰 아이는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자연스럽게 일을 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한국도 난민 재정착 프로그램으로 받아준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전쟁 가능성이 있다고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막연히 좋은 것 같아서 신청하였다고 한다.
“미국은 8년을 기다려도 안됐는데, 한국은 3개월만에 입국허락이 되었습니다.”
절차를 마치고 2015년 12월에 도착하였으니 거의 6년이 되었다.
그 가정의 형편을 돌아보니 한국사회에서 저소득층으로 겨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가장인 아버지는 근처에 있는 공장에서 야간 일을 한다. 저녁 8시반부터 아침 8시 반까지 12시간 일한다. 그렇게 받은 수입은 약 300만 원 정도이다. 부인은 어린 아이를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다.
“수입이 적지는 않는데 남는 것은 없습니다.”
집세 50만원, 네 명의 자녀교육비, 생활비, 교회 헌금, 교통비, 통신비가 적지 않다. 난민촌과 카렌 지역에 있는 식구들을 위해 매달 20만 원을 송금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사용하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 야간 작업을 해서 상대적으로 많이 받지만 낮에 잘 쉬지 못한 점은 힘들다고 한다. 아직 차량을 가질 엄두도 없다. 수입도 작고 운전면허증도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빠듯하게 살고 있었다. 여유롭지 못한 삶이라고 해서 그들의 삶이 안되었다라고 생각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의 자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그저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할 뿐입니다.”
부모와 대화하다가 중간 중간 끊임없이 나오는 단어가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이다. 이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곳에 와서 좋은 학교와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 공부할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큰 아들이 다니는 학교는 인천에 있는 해양과학고등학교이다. 대학입학 목적이 아닌 학교이다. 일반적으로 그런 학교를 다니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그리 좋아할 일은 아닌 듯싶다.
그런데 큰 아들 기태의 입에서 감사가 끊이지 않는다. 학교에서의 공부, 좋은 기회, 안전한 환경, 친구들과 놀 수 있는 시간, 친구들과 교사의 도움…
“난민촌에 있으면 희망도 안정도 없었을 것입니다.”
큰 결핍과 불안, 두려움이 복잡하게 얽혀진 카렌난민 캠프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면 이곳은 그냥 너무 좋은 곳이다. 6년 이전에는 전기도 전화도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도시에는 가본 적도 없다. 전혀 새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들의 감사는 상대적인 풍요로움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 가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관점으로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의 보통 가정이 이런 조건이라면 감사보다는 불평이 자연스러울 환경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삶을 가난한 중에서 풍요롭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들에게 더 큰 꿈이 있다.
“앞으로 직장을 얻고 난 뒤 카렌난민들이 요청하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돕겠습니다.”
큰 아들의 소망이다.
“저의 자녀 가운데 한 명은 의료 분야에 일을 하면서 카렌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고백은 여유롭지 못한 자신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더 어려운 민족을 위한 이타적인 마음이 여전함을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병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고 있었다.
“오 목사님께서 이렇게 방문하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는 큰 힘과 격려가 됩니다. 가능하면 매주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내가 한 것은 거의 없다. 방문하여 요청에 따라 환자 가정을 찾아가 기도해 주고 그들의 형편을 묻고 기도해 주는 정도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오히려 그들을 통하여 힘을 얻는다. 은혜와 감사에 대한 고백, 여유롭지 못한 중에도 이웃을 돌아보고 돕는 삶의 자세는 내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지를 보여준다. 부평의 변두리에 있는 변두리의 카렌 난민 가족의 모습 속에서 ‘감사와 은혜’를 다시 배운다.
한국은 뭔지 모르지만 ‘불만족과 분노’로 가득 찬 것과 같은 사회이다. 이 카렌 난민의 가족들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감사와 은혜’를 배울 수 있다는 생각하는 것은 너무 무리인가? 변변한 학교를 다니지 못하였던 가족이지만 그들의 자세와 태도는 우리가 마땅히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느끼는 날이다. <무익종(본지 통신원)>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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