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미션스쿨인 고등학교 때 들은 말씀이 잊혀지지 않았어요”“ミッション学校であった高校の時に聞いた御言葉が忘れられない”

기도로 인도를 섬기는 최철수 선교사

기도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인도로 간 이후에 현지인 사역자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인도 전역을 돌면서 미전도종족 마을에 들어가 예수영화사역을 하는 선교사가 있다. 그는 “아무런 능력도 재주도 계획도 없지만, 주님이 먼저 말씀하시면 단순히 따라가면 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인도에서의 첫 7년을 보내고 한국에 들어와 제 2기의 인도사역을 준비하고 있는 최철수 선교사를 만났다.

– 오토바이를 타고 인도 전역을 돌며 기도하신다구요?
“인도에 간지 2년 정도 지났을 무렵, 기도하던 중 인도 전체에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소망을 갖게 됐어요. 그 마음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여러 지역과 마을을 직접 다니면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 그 얘기는 조금 뒤에 자세히 듣기로 하고, 아무래도 유년시절 얘기부터 나눠 주시는 것이 삶을 이해하는데 좋겠죠?
“고추장으로 유명한 전라북도 순창 출신이에요. 불교가 강한 지역이어서, 동네 어르신들이 쌀을 짊어지고 절에 가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어요. 교회에 대해선 몰랐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왔고요.”

– 그러면 서울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셨겠네요.
“청소년기엔 많이 엇나간 삶을 살았어요. 공부가 정말 싫었죠. 그리고 제가 유도부에서 운동을 했거든요. 그러다보니 거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고, 술 담배는 기본으로 하게 되고, 이러 저리 놀러 다니며 엉망으로 지냈죠. 특히 싸움을 많이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겁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겁이 나니까 객기를 부리고, 강한 척을 했던 거죠.”

– 혹시 복음을 들을 기회는 없었나요?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미션스쿨이었는데, 첫 채플시간에 목사님이 들어오셔서 ‘마음속으로 짓는 죄도 죄’라고 하신 말씀이 제 마음에 꽂혔죠. 그 이후로 다른 수업시간에는 잠만 잤는데, 이상하게 채플시간에 성경이야기는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나요.”

– 그러면 교회를 처음 나가게 되신 때는 언제인가요?
“결혼하고 둘째 아이가 100일 정도 되었을 때, 한 친구가 저를 교회로 인도해서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어요. 그때 성가대에 앉아 있는 친구를 보면서 ‘깨끗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나 교회가 제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죠.”

– 왜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당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깨끗해 보여서, 근처에도 못 가겠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교회는 가고 싶긴 했는데 ‘나 같은 사람이 교회에 가도 될까’ 하고 머뭇거리게 됐죠. 왜냐하면 마음속으로 짓는 죄도 죄라는 것을 아는 저로서는 마음속으로 사람을 몇 번씩 죽인 나와 교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죠.”

– 결국 교회 나가는 것을 포기하셨나요?
“아니요. 이사를 하고 가게를 차리게 된 곳이 바로 교회 앞이었어요. 교인들이 계속 전도를 하고, 찾아오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되었는데, 집사람은 성실하게 교회를 다니더라고요. 그리고 저에게 “교회를 그렇게 다니면 안 된다고, 그러다 지옥 간다.”고 쓴소리를 하기도 했죠(웃음).”

– 그러나 정말 주님을 만나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직장을 내려놓게 되었어요. 그리고 방바닥에 누워있기만 했는데, 그게 은혜였죠. 어느 날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2000년 전에 죽으실 때, 나도 그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면서 정말 큰 감격이 있었어요. 울고 또 울었죠. 잠을 자고 나면 베개가 눈물로 흥건히 적셔져 있곤 했어요. 구원의 확신과 감동이 늘 있었죠.”

– 구원의 감격 이후에 위기는 없으셨나요?
“헌신과 충성을 고백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 6개월 정도 지나니까 다시 슬슬 화를 내고, 남을 판단하기 시작했죠. 당시 직장이 안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먹고 사는 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도 밀려오기 시작하고요. 기도모임이나 예배 때에는 감동을 받으면서, 그것이 끝나면 생각 속에서 솟아나는 죄악은 정말 고통이었어요.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몰라 더 괴로웠던 것 같아요.”

– 그 고비를 돌파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지는데요.
“그런 힘든 시간이 1년 정도 지났을 때, 어느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새벽에 일어나 시편 36편의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을 묵상하며 기도를 하는데, 성령 하나님께서 공기보다 더 충만하시며,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사는 것이라는 진리가 깨달아지면서 제 영혼의 엄청난 울림이 되는 시간이 있었어요.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바뀌었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복음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 그런 믿음의 삶이 선교와 이어지기까지는 또 다른 과정이 필요하셨겠지요.
“성령 하나님이 제 삶을 직접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또 주님을 바라보면 제 생각이 죽어진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죠. 다시 말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연약한 제 삶을 통치하시는 거죠. 여러 과정을 통해서 점점 선교적 삶으로 인도함을 받았던 것 같아요.”

–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요.
“첫째는 실질적인 삶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초월하는 믿음을 허락해 주셨어요. 쌀이 없어도 두려움이 없었어요. 아내에게 “여보, 우리 주님 한 번 믿어봅시다.” 이렇게 믿기로 결정하면 정말 필요들이 채워졌어요. 안 믿으려 해도, 안 믿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죠.
쌀을 사야할 돈으로 기도정보 책을 사서 다른 사람들을 나눠주곤 했어요. 먹고 사는 것 보다 열방을 더 걱정했죠. 둘째는 기도에 대한 마음을 많이 부어주셨어요. 그때 ‘우리의 입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입술이며, 우리의 기도는 공중 권세의 세력을 뚫고 하늘 끝까지 관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필요보다 열방을 위해서 계속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보냈죠.”

– 인도 선교사로 나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있다면.
“주님을 제대로 만나고 나서 ‘선교’는 제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었어요. 2003년에 인도에 아웃리치를 다녀왔는데, 그 땅을 향한 마음이 간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주님 저 여기에 보내주세요’라고 기도를 했어요. 그 후 2년 만에 주님께서 ‘인도에서 기도로 섬기라’는 부담을 주셔서 인도로 가게 되었고 그리고 벌써 7년이 지났네요.”

– 그동안 인도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셨는지 소개해 주세요.
“먼저는 웨스트벵갈에서 인도와 열방을 품고 40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금식 후에 ‘오라는 곳으로 무조건 가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했는데, 한 선교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그분이 계시는 비하르의 주도(州都)인 파트나에 있는 고아원에 머물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말씀읽기와 열방기도를 했는데 한 5,6개월 되었을 때 한 현지인 청년이 말씀읽기와 기도에 참여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 청년이 변화되고, 주변의 친구들을 데려오면서 ‘선교센터’가 두 군데 생겨났어요. 그리고 주변 마을들로 들어가 전도를 하게 되면서 교회가 개척이 되고, 마을에서 예배가 드려지게 되었죠.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그 청년이 처음에는 대학에 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에게 접근했다고 하더라구요.”

– 지금은 어떤 사역을 하시는지요.
“파트나에서 한 2년 정도 사역을 한 이후에 우타르프라데시 주(州)의 바라나시로 가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에 한 선교사님을 통해서 발전기와 프로젝터가 허락이 되면서, 그때부터 현지인 마을들을 다니며 예수영화사역을 했어요.”

– 예수영화사역에 대해서 좀 더 알려주시겠어요?
“현지인 사역자와 함께 미전도종족 마을에 들어가서 성경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영화를 보여주고, 복음을 제시하는 사역이죠. 처음에는 어디를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주님이 현지인 사역자들과 동역을 하게 되면서 사역이 가능하게 되었어요. 시골 마을에 들어가면 보통 700여 명 정도가 예수영화를 보러 나와요. 그런데 결국 이 사역의 성패도 기도에 달려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 장비를 싣고 인도 전역을 오토바이로 다니면서 힘든 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힘든 부분이 오히려 은혜라고 생각해요. 사실 더운 날 500여 킬로미터 씩 떨어진 곳으로 이동할 때는 오토바이 운전이 힘들어요. 그런데 그럴 때에 주님이 비를 주장하셔서 제가 가는 길에만 시원한 비를 내려주시는 것도 몇 차례 경험했고, 외딴 곳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이 없을 때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공급받기도 했죠. 그 중에서 제 둘째 아이를 태우고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가 사고가 났을 때, ‘이제 죽었다’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이 붙들어 주셔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경험도 있고요. 모든 것이 은혜죠.”

–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서 누리는 기쁨도 클 것 같아요.
“네. 한번은 한 미전도종족 지역에 들어가서 말씀을 함께 읽고 기도하는데, 한 현지인 형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복음을 깨닫고 기뻐하며 뛰쳐나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 정말 기쁘죠. 그리고 제가 발전기와 프로젝터를 사준 한 현지인 형제는 지금 엄청나게 돌아다니면서 예수영화를 보여주고, 복음을 전하고 있어요.”

– 이번에 어떤 계획을 갖고 인도에 다시 돌아가시나요?
“이번에 인도로 돌아가면 교회개척을 위해 본격적으로 전도를 하려고 해요. 특별히 미전도종족과 무슬림들을 향해서 더욱 본격적인 복음전도 사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특히 무슬림들을 향한 커다란 부담감이 있어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들이죠. 저는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고요. 기도는 기본이죠. 사역은 안하더라도 기도는 해야죠.” [GNPNEWS]

J.S

お祈りでインドに仕えているチェ・チョルス宣教師

お祈りに対する負担感を抱いて、インドへ行った以来、現地の働き人たちと共にオートバイに乗って、インド全域を回りながら未伝道種族の村へ入って、イェスの映画上映の働きをする宣教師がいる。彼は‘何の能力も才能も、計画もないが、神様がまずおっしゃると単純に従うのが一番重要な事である’と告白した。インドでの初の7年間を過ごして、韓国へ帰って第2期のインドでの働きを準備しているチェ・チョルス宣教師に会った。

-オートバイに乗ってインド全域を回って祈っているんですか。
‘インドへ行って2年ほど過ぎた時、祈っている中でインド全体に福音を伝えないという希望を抱くようになりました。その気持ちでオートバイに乗って、いろんな地域と村を直接回りながら祈り始めました。’

-その話は少し後で聞くことにして、幼年時代の話しから分かち合ってくださったら人生を理解するのによいと思います。
‘コチュジャンで有名なジョンラ北道のスンチャン出身です。仏教が強い地域で、村の年寄りが米を背負って、寺に行く姿を頻繁に見ていました。教会に対しては知らなかったです。小学校5年の時、ソウルへ引っ越ししました。’

-ソウルで青少年期を過ごしましたか。
‘青少年期には違った人生を生きました。勉強がとても嫌いでした。そして私が柔道部で運動しました。それで荒い友たちと付き合って、お酒とタバコは基本で、あっちこっち遊びまくっていました。とくに喧嘩をたくさんしました。いま思うと、私が怖がり者だったからだと思います。強いふりをしたんですね。’

-もし福音を聞く機会はなかったですか。
‘私が通っていた高校がミッション学校でしたので、初の礼拝時間に牧師さんが来て、’心の中で犯す罪も罪である‘と言った御言葉が私の心にささりました。その以来他の授業の時間には寝っていましたが、おかしく礼拝時間には聖書の話を熱心に聞いた記憶があります。’

-教会を始めて行った時はいつですか。
‘結婚して二番目の子が生まれて100日暗いなった時、ある友たちが私を教会へ導いてくれて始めて教会に行くようになりました。その時聖歌隊に座っている友たちを見て、’清い‘という感じをうけました。しかし教会が私には似合わないと思いました。’

-なぜそんな考えをしましたか。
‘当時教会に通う人たちは清くみえて、近くに行けなかったです(笑)。それで教会は行きたかったですが、’私のような人が教会に行ってもいいのか‘と迷いました。なぜならば心の中に犯す罪も罪であると知っていた私としては、心の中に人を何回も殺した私と教会は合わないと言う結論になるしかなかったです。’

-結局教会に行くのを諦めましたか。
‘いいえ。引っ越しをしてお店を開いた場所が、教会の前でした。聖徒たちがずっと伝道をして、訪問してくれて自然に教会へ通うようになりましたが、家内は誠実に教会に通いました。そして私に、’教会をそのように通うといけない、そうすると地獄にいくよ‘と言ったりもしました(笑)。’

-しかし本当に主を迎えたきっかけがあったと思いますが。。
‘健康が悪くなり、職場を辞めるようになりました。そして横になっていましたが、それが恵みでした。ある日、イェス様がその十字架で2000年前に死んだ時、私も十字架で死んだ事実が信じられて、本当に大きな感激がありました。泣いてまた泣きました。寝て起きると枕が涙でぬれていました。救いの確信と感動がいつもありました。’

-救いの感激以後に危機はなかったですか。
‘献身と忠誠と告白して、罪を犯さないように熱心に努めたような気がします。しかし6カ月程度が過ぎると再び怒って、他人を判断し始めました。当時職場が安定的でなかったので、食べていく事に対しての心配が寄せ押しました。祈祷会とか礼拝には感動を受けながらも、それが終わると考えの中でわき出る罪悪は本当に苦痛でした。そんな現状がなぜ起きるのか分からなくて、もっと辛かったです。’

-その苦しみを超えるようになったきっかけが知りたいですね。
‘そんな辛い時間が1年ほど過ぎた時、ある集会に参加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そこで朝早く起きて、詩編36編の’主よ、あなたのいつくしみは天にまで及び、あなたのまことは雲までおよぶ。。‘を黙想して祈っている時、聖霊様が空気より充満して、その主を依頼することが信仰であり、ただ義人は信仰だけで生きることだという真理が分かってきて、私の魂の響きがありました。努力で出来ることではなく、存在が変わった事を信じる信仰でいきることが、福音を感謝できる人生であると気付きました。’

-そんな信仰の人生が宣教とつなぐまでどんな過程がありましたか。
‘聖霊の神様が私の人生を直接導きてくださると信じられました。また神様を見上げると、私の考えが死んでいくことを経験しました。もう一回いうと、命の聖霊の法が弱い私の人生を統治することですね。いろんな過程を通してだんだん宣教的人生へと導かれました。’

-具体的に神様がどのように導いてくださいましたか。
‘まずは実際の生活で食べて行く問題を超越する信仰を許してくださいました。お米がなくても怖くなかったです。家内に’あなた、私たち神様を一回信じて見ましょう‘と、このように信じることを決定すると本当に必要な物が満たされました。信じないようにしても、信じるしかない境遇になりました。お米を買うべきお金で祈祷情報本を買って、他の人たちに配りました。食べて生きることより、この世のことをもっと思いました。二番目はお祈りに対する心を沢山注いでくださいました。その時’私たちの唇はイェス・キリストの血がついた唇であり、私たちのお祈りは空中権勢の勢力を突き通って、天の先まで貫通できる’と気付きました。それで必要より、この世のために続けて祈る時間を持ちました。‘

-インドの宣教師になった直接的なきっかけがありますか。
‘神様をちゃんと会ってから’宣教‘は私にとても当然なことになりました。2003年にインドにアウトリーチに行ってきましたが、その地への気持ちが切実でした。それで’神様、私をここに送ってください‘と祈りました。その後、2年ぶりに主が’インドでお祈りをもって仕えろ‘という心をくださって、インドへ行くようになり、そしてもう7年になります。’

-その間インドでどんな時間を過ごしたか紹介してください。
‘まずはウェストベンガルでインドとこの世を思い、40日間断食祈祷をしながら、神様の苦しむみ心を経験しました。断食後に’導くところに無条件に従います‘と祈りましたが、ある宣教師さんから連絡があって、その方がいるビハルの州都であるパトナの孤児院に住みました。そこで聖書読みとお祈りをして、5,6カ月になった時にある現地人青年が聖書読みとお祈りに参加し始めました。そしてその青年が変わり、周辺の友たちを連れてきて’宣教センター‘が二か所できました。そして周辺の村へ入り、伝道をして教会が開拓されて、村で礼拝をささげるようになりました。後で偶然に知った事実ですが、その青年は始めは大学に行くお金をもらうために私たちに接近したそうです。’

-いまはどんな働きをしていますか。
‘パトナで2年ほど働いてから、ウタルプラデシ州のバラナシへ行くことになりました。その時からオートバイに乗って回りながら、祈り始めました。その中、ある宣教師さんを通して発電機とプリジェクトが与えられて、その時から現地人の村を回りながら、イェスの映画の働きをしました。’

-イェスの映画の働きに対してもっと教えてください。
‘現地人の働き人と共に未伝道種族の村へ行って、聖書とイェス様に対する話がある映画を見せて、福音を伝える働きです。始めはどこを行けばいいのか、どのようにすべきなのか全然分かりませんでした。神様が現地人と共に働くようになってから、可能になりました。田舎の村に入ると、普通700人程度がイェスの映画を見にきます。しかし結局この働きもお祈りにかかっていると感じます。’

-装置を持ってインド全域をオートバイで回るのは大変だと思いますが。。
‘大変な部分が逆に恵みだと思います。事実熱い日に500キロメータほど離れた所へ移動する時にはオートバイ運転が辛いです。しかしその時に神様が雨を降らせてくださって、私が行く道だけ冷たい雨を降らせてくださることを何回も経験したし、離れた所で食べる物と寝る場所がない時にもいろんな方法で与えられたりもしました。その中で、私の二男を乗せてオートバイで行ったときに、事故にあったとき、’もう死ぬのか‘と思いましたが、主が守ってくださって無事だった経験もあります。全てが恵みです。’

-福音が伝えられる現場での喜びが大きいと思いますが。。
‘はい。ある時は未伝道種族地域に入って御言葉を読んで祈っていましたが、ある現地人の兄弟がイェス様の十字架の福音を悟って、喜んで出て行って福音を伝える事がありました。そんな姿を見る時、本当にうれしいです。そして私が発電機とプロジェクトを買ってあげた現地人の兄弟はいまいろんなところを回りながら、イェスの映画を見せていて、福音を伝えています。’

-今度はどんな計画をもってインドへ帰りますか。
‘今度インドへ帰ると教会開拓のために本格的に伝道をしようとします。特別に未伝道種族とムスリムたちのためにもっと本格的に福音伝道の働きをしようと思っています。特にムスリムたちのための思いがあります。この全ては神様がなさることです。私は福音を伝える義務があります。お祈りは基本です。働きはしなくてもお祈りはしないといけないです。’[GNPNEWS]

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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