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중국 추방기(2)
이 글은 중국에서 추방된 조용선 선교사가 2018년 1월 5일부터 18일까지 중국 ‘구어바오’(国保) 요원에 의하여 체포되어 추방된 과정의 자전적 기록이다. 중국 공산정권의 극심한 종교탄압으로 2020년 2월초 현재 중국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 성도들이 모이는 예배가 사라지기 직전 단행된 중국의 선교사 추방과정을 담았다. 현재 중국교회 성도들은 정부의 불허로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대부분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편집자>
이상한 꿈
나는 소파에 앉아 지난 일을 회상(回想)했다. 아니 나는 당장 새벽에 꾼 꿈을 생각했다. 나는 참으로 이상한 꿈을 새벽에 꾸었다. 그것은 나를 선교사로 보내고 후원했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여장(女裝)을 하고 등장했다. 그 모습은 정말 보기에 이상했다. 왜냐하면 그 목사는 노년에 배가 나오고 키가 작고 얼굴의 선이 굵고 눈, 코, 입, 손 등 모든 것이 크고 두꺼운 느낌을 주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여장을 한 모습이니 보기에 기괴(奇怪)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담임목사가 나에게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모시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꿈에서 그의 집은 2층 단독 주택이었다. 나는 그의 집에 도착해서 헤어지려고 하는데 그 담임목사는 쇠로 된 파란 문을 손으로 잡고 나를 쳐다보면서 “너를 두고 보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깼다.
무엇일까?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 꿈을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후 3시에 ‘구어바오’(国保) 사람이 내게 왔던 것이다. 나는 나의 영적 감각이 매우 흐려졌음을 느꼈다. 2000년 중국에 선교사로 입국할 때에 나는 이 땅에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적인 직관력이라고 생각했었다. 2003년 선배 선교사들이 추방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3년에 한 번씩 위기가 오고 9년 정도 될 즈음에 큰 위기가 온다고 추정했다. 2009년에 안식년을 할 때에도 당시에 나는 후배 선교사의 소개로 북한 사람 한 가정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다른 이유 때문이기는 하지만 북한 보위부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됐다. 아내는 당시에 내가 안식년을 하지 않았으면 큰 위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내의 추정이 옳았을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나의 안식년으로 내가 현장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나는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그러한 영적인 시간의 흐름이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19년째가 되는 2018년은 안식년을 했어야 했다. 이전에 한 번 안식년을 가진 것도 북한을 선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국에서 얻을 수 있다는 아내의 권고와 일련의 상황들 때문에 그렇게 결정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안식년을 갖지 못했다. 2017년에는 어떤 의미에서든 1년 동안 중국을 떠나 있어야 했다. 그러나 2009년에 1년 동안 중국을 떠나있는 동안 교인들은 여러 면에서 힘들었다. 그런데 내가 다시 1년 동안 떠난다면 ‘목자가 없이 지내는 양들’에 대한 측은함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므로 나는 중국을 떠나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 중의 하나인 가정교회를 1년 동안 떠난다는 것이 현실에서 볼 때 어려웠다. 게다가 이전에는 후배 선교사가 있어서 그 일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내가 있는 지역에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결국 머물러 있었던 그 시간으로 말미암아 나는 ‘구어바오’(国保) 사람에 의해 추방됐다.
나는 먼저 이와 같이 영적으로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생활에 무뎌짐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꿈으로 징조를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피신하지 않은 나의 모습과 태도를 반성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내게 새로운 일을 맡기시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최근에 감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성경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선교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일 등등 한국을 중심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저녁에 Z 집사를 불렀다. 그는 긴급하게 부르는 전화를 받고는 불안감을 갖고 왔다. 나는 ‘구어바오’ 사람이 다녀간 것을 말하고 추방당하게 된 상황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 날 밤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한밤중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앉았다. 내게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이제 정말 중국을 떠나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제 정말 중국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느껴졌을 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울었다. 언제든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말 떠나야만 하는 시간이 왔을 때, 나는 내가 선교사로 행한 일들에 대해 주님 앞에 한없이 부족하고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음성가 중에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주께 드릴 열매 가득 안고∽’ 라는 가사가 있다. 나는 이 노래를 부를 때 종종 울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 다음에 정말 주님을 뵐 때 선교사로서 내가 무슨 열매를 드렸는지를 돌아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운다. 왜냐하면 나는 그 상황을 생각만 해도 주님께 너무나 부족한 열매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2018년 1월 6일 새벽에 주님 앞에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주님께서 나를 선교사로서 너무나 부족하다고 여겨 이제 추방시키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나 이내 나는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비록 내가 부족한 선교사이기는 하지만 주님을 향한 내 마음을 주님께서 아신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18년간 중국의 S지역 선교사로 나를 두신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밤은 지나고 새벽의 빛이 창가로 스며들었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섰다. 나는 마음속으로 주님께 왜 이런 일어났는지를 여쭸다. 주님께서는 내게 말씀하셨다. 나에게는 다른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중국을 떠날 때가 된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주님과 약 20분 정도 말씀을 나누었다. 그런데 그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나의 기도는 주님께 아뢰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선명하게 주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지금까지는 없었던 것 같았다.<계속>
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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