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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북송 60주년…김일성과 조총련의 거짓선전에 속은 사람들 “우리는 노예였다”

(사진: 미래한국 futurekorea.co.kr 캡처)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진행된 재일교포북송은 조총련의 거짓선전에 속아 노예로 전락한 사기극이었다고 한 재일교포가 밝혔다고 미래한국이 18일 보도했다.

‘재일교포 북송’ 60주년이 되는 올해 이 신문과 인터뷰를 한 재일교포 목화선생은 ‘선전에 속아갔던 북한에서 자신은 노예로 전락했다’고 밝혔다.

1959년 900여 명의 재일교포를 태운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新潟)항을 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북송사업은 1984년까지 25년간 180여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이 북송사업으로 북한에 보내진 재일교포들은 약 10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이들의 삶은 경제의 자유는 물론, 사상 감정을 표현하는 표현의 자유도 없으며, 직업의 자유나 학업의 미래도 없는 흑암의 삶이었다. 목화 선생은 북송 이후 우여곡절 끝에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재일교포는 북한과 조총련의 거짓선전에 속아 1961년 6월에 부모님과 5형제 모두가 북송을 택했다. 당시 16세였던 그는 “60만 재일교포들의 일본에서의 삶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가난한 중에 조총련이 북한을 지상천국으로 선전하니 북송을 택한 재일교포들이 많았다”며, “북한의 김일성과 한덕수 조총련 의장 두 사람이 짜고 도쿄로부터 큐슈까지 일본 전국을 돌며 재일교포들에게 북한이 대우가 좋으니까 가라고 부추기는 거짓선전을 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조총련 간부들이 재일교포들을 거듭 찾아가 북송을 설득했다고 전했다.

북송, 어떻게 시작되었나?

북송 문제의 발단은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서 시작됐다. 1000여 명이 사는 집단 부락이었던 이 곳에서 1958년 8월경 한 모임이 열렸다. 그 곳에서 일어난 한 사람이 ‘공화국 북반부에 진출해서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하고 싶다’며 이미 일본 정부에서 허락도 한 일이라고 발언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20~30명이 모인 가운데 만장일치로 찬성해서 김일성한테 편지를 보낸다.

편지의 내용은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차별과 멸시, 학대를 받고 월급도 제대로 받을 수 없으며 어렵고 힘들게 살면서 자식들의 교육에 있어서도 차별교육을 받는다, 그래서 도저히 못살겠다, 그래서 김일성 수상님(당시 칭호)이 우리 재일교포들을 받아주면 좋겠다’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은 김일성은 1958년 9월 9일 공화국 창건 10돌 경축대회에서 ‘60만 재일동포들로부터 귀국 열망을 받았으니 내각 결정을 거쳐 조치를 취하겠다’며 60만 재일교포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하고 생활 문제에 아무 걱정 없도록 모두 국가에서 책임지고 해결해 줄 것이라고 답했다. 그 답을 받은 당시 한덕수 조총련 의장에 의해 1958년 9월부터 선전 사업이 진행되었다.

북송 당시 한국과 북한의 배경

당시 재일교포 95%는 이남 출신이었고 0.5%만이 북한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었다. 고향에 가고 싶다고 신청한 사람보다 일본에서의 생활고로 신청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증거다. 당시 한국과 일본간 교류보다 일본과 북한간 교류가 많았다. 또한 한국은 북한보다 경제성장이 뒤떨어져 있어 재일교포 60만 명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일본 정부에서 재일교포들을 보내겠다고 할 때 1명당 배상금을 주면 받겠다고 한 것이 당시 한국의 현실이었다.

아무도 북송을 원한 사람은 없어속아서 간 북한은 노예의 땅

북송된 재일교포 대부분은 탄광에 배치 받아 석탄을 캐거나 공무과에 가서 선반도 돌리고 기계작업을 했다. 통행증이 있어야 이동의 자유가 허락되는 등 인간으로서 인권이라든가 자유는 전혀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다. 특히 일본에서 온 재일교포들은 북한 현지인보다 교육을 받기 힘들어 조총련 소속 생활을 했던 사람들 일부를 제외하고는 고등전문학교 이상 상급학교에 가기도 힘들었다.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북송을 택했던 재일교포들은 좌절했다.

목화 선생은 “동물원에 있는 원숭이나 동물 같은 인간이 되고 말았다”며 “그때는 북한에서 탈북한 사람들을 일본 정부가 안 받아줘 탈북 결심을 못하다가 1980년대 말경 북한의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김만철 씨가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배를 타고 한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19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 당시 북한의 모든 정책, 경제, 행정기관들이 마비되고 배급이 단절되어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아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중국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목화 선생도 기회를 보다 2006년 탈북해 중국을 거쳐 2007년 일본에 갈 수 있었다.

탈북 후 일본에서도 안 받아줘북송의 원흉 상대로 북한인권운동 할 것

그러나 북한에서 탈출했다 해도 일본 정부는 이들의 체류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스스로 북한으로 가겠다고 손을 들고 일본 정부에 제기해서 간 이들에게 본인의 책임도 있지 않는가라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북송은 더 이상 신청자가 없자 1984년 완전히 종료됐다. 북한은 국제적으로 비판 여론이 높자 당중앙위원회 산하에 납치 등을 관여하는 대남연락소를 통해 행하던 일본에서의 납치나 남파간첩, 외국에 스파이나 공작원을 보내는 수위도 일단 중단했다.

목화 선생은 ‘관동탈북자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김일성과 함께 북송을 시행했던 조총련 앞에서 항의 집회를 갖고 일본 사회나 기업을 대상으로 북한인권 심포지엄도 가지려고 한다며 한국과 국제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단체들과 연대해 북한 정권의 반인도적 범죄를 계속 알리는 활동도 전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크리스찬 퍼스펙티브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다. 가난하고 헐벗은 재일교포들을 속여 그들의 고통을 미끼삼아 인생을 짓밟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한 북한을 위해 기도하자. 지금도 수많은 북한주민들을 고통에 내던지고 여전히 자기의 배만 불리는 김정은 정권과 위정자들에게 죄를 감각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돌이키게 하시길 구하자. 북송 재일교포들에게 북한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되찾을 수 있도록 생명의 삶을 허락해주시길 기도하자. 상처와 오류로 가득한 이 땅의 역사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어 모든 굽은 것들을 바로 잡아주시고, 공의와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땅으로 회복시켜 주시길 구하자. 또한 이 세대가 지나간 역사를 바로 알아 지금의 북한과 사회주의의 실체를 깨달아 각성하도록, 역사 안에서 눈을 뜰 수 있게 하시길 간구하자.[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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