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암 선고받은 성도 위해 감사예배 드렸어요” “부족한 교회? 오해예요!”‘ガン宣告された聖徒のために感謝の礼拝をささげました’‘足りない教会?誤解です!’

진정한 교회개척을 꿈꾸다 박영주 목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멸시와 천대와 온갖 수난과 심지어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의 형벌을 감내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죄인들이 거룩한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을 개척하셨다. 또한 믿음으로 그 길로 나아온 자들을 교회로 세우시고 친히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개척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개척자이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교회를 개척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있다. 이제 십자가복음으로 ‘건물’이 아니라 진정한 교회개척을 꿈꾸며 달려가는 박영주 목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유년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강원도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강원도 홍천 분이셨어요. 화전민으로 개척, 개간생활을 하시다가 춘성군 봉명리 산골짜기에 정착을 하셨고 그곳에 제 고향이 되었죠. 그때 산나물을 캐고, 산짐승들을 잡아먹고 살았어요.

요즘 말로하면 ‘웰빙’이지만, 거의 신석기 시대 주준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웃음).”

– 신앙생활을 하기에도 어려운 환경이었겠어요.
“서낭당 문화 속에서 자랐죠. 마을에 서낭당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가끔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 음식은 배고픈 우리들의 몫이었죠. 어머니가 정한수를 떠놓고 달에 비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보며 자랐어요.”

초등학교 시절, 화전민 생활

– 언제까지 화전민 생활을 하셨나요?
“초등학교 3학년에 춘천으로 나왔어요. 제가 보기에, 아니 실제로 어느 정도는 부유층 학생들이 다니는 도심지 학교로 전학을 온 거죠. 그 학교에 다니면서 냉장고, 전화기, 세탁기.. 그런 단어를 처음 들었어요. 문화충격이 컸죠.”

–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군요.
“애들이 저한테 “넌 어느 유아원을 나왔니?”라고 물어보면, 저는 “유아원이 뭔데?” 이런 식이었죠. 모든 영역에서 이랬으니 제가 정말 촌놈이라는 것이 계속 드러났어요. 하루는 애들이 저를 놀리려고 저에게 바나나를 주면서 먹으라고 했죠.

그런데 저는 바나나를 처음 봤거든요.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책상 서랍 안에 넣어뒀어요. 애들이 “왜 안 먹냐?”라고 했고, 저는 “지금 배부르다.”라고 둘러댔던 기억이 나요.”

– 교회는 어떻게 다니게 되셨나요?
“춘천 시내에 먼저 나와 계셨던 큰아버지를 통해서 다니게 되었어요. 당시 제게 교회 생활은 일종의 놀이문화 외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었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주시는 주일 헌금을 ‘띵겨먹기’도 하구요…. 개념이없었죠.”

– 본격적인 믿음 생활은 언제부터였나요?
“중학교 때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가 가자고 해서 중등부 수련회를 참석하러 기도원에 가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영적인 체험을 하고, 신앙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인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집, 학교, 교회. 이렇게 세 곳만 다녔어요. 제 나름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 삶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하게 된거죠.”

기도원에서 영적 체험 이후 삶의 변화

– 목회로의 부르심은 어떻게 확증하게 되었나요?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신학교로 진학을 했어요.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신학교 시절의 제 삶은 부끄러운 점이 많네요.”

– 어떤 점에서 그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일종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물들었던거죠. 신학생이라도 술과 담배를 해야 깨어있는 의식을 가진 지성인이라는 허황된 사상에 동조했어요. 그리고 철학과 사회과학서적들을 보면서 운동권에 가담을 하게 되었죠. 전대협과 한총련 활동을 했어요.

주중에는 정치 투쟁을 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하는 그런 이중적 생활을 했던 거죠.”

“지금 돌아보면 제가 진정한 복음을 몰랐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보다는 굴절된 학문을 편향되게 수용하면서 그것이 진리인양 여기면서 자기 의를 내세웠던 거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면서 하나님도, 복음도, 성경에 대해서도 정말 몰랐었죠.”

– 운동권에서 계속 활동하셨나요?
“개척교회를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어요. 강원도 화천에 성도가 없는 산골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목회성공에 목마른 생활이 시작된거죠.

시골에서는 목회성공이 불가능해 보여서 목사 안수를 받고 삼척에 다시 개척을 했죠. 그리고 다시 춘천에서 또개척을 했구요.”

– 지금 이곳 춘천에는 언제 오게 되셨나요?
“2003년에 오게 됐어요. 4번째 개척을 한 거죠. 좋은 조건으로 건물이 허락이 되었어요. 이전 교회에서 단 2명만 따라왔지만, 건물만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빈자리는 채워지고, 교회가 성장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실제로 몇 년 만에 성도수가 150여명까지 늘어나서 교회가 꽉 찼어요. ‘고생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죠. 개척교회 자립 성공사례로 선정되기도 했구요.”

– 그리고 교회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늘어난 교인들을 양육할 프로그램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한 선교단체에서 진행하는 훈련학교에 참석해서 양육 프로그램을 도입할 계획이었는데,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거죠. 제가 십자가복음 앞에 깨어지고 완전히 변화되는 일이 일어난 거에요.

성공적인 개척교회, 그러나 …

– 목회자로서 십자가복음앞에 깨어진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조금 풀어서 설명해주세요.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죄를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임한거죠. 내가 얼마나 존재적으로 ‘자기 의’와 자기사랑으로 똘똘 뭉쳐진 타락한 죄인인지를 본거에요. 저는 ‘자기 의’가 죄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청년시절 정의를 부르짖으며 민중운동을 하던 모습도, 다른 사람의 설교를 인용하지 않는 저의 설교 방식에 대한 자부심도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저의 모든 삶과 생각의 터가 무너졌던 거죠. 그리고 십자가만이 유일한 소망이며 이 복음이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거죠.”

– 십자가복음 이후에 목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을 것 같은데요.
“쉽게 말하면 저는 교인들을 ‘앵벌이’를 시키던 목사였어요. 교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며 돈 많이 벌어오라고 축복하는 ‘앵벌이 목회’를 했던거죠. 저는 왕초 노릇을 했던거구요. 비참했어요. 더 이상 이런 목회를 할 수 없더라구요.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전에 행해오던 생명력이 없는 예배형식과 행사들을 모두 중단했어요. 그리고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는 시간이 대폭 늘어나면서 예배시간이 많이 길어졌어요.

그러자 예배시간에 부담을 느끼는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죠. 여러 가지 생각이 밀려오더군요. ‘교인들을 한 시간짜리예배에 길들여 놓았다’라는 자책도 들고, ‘지금 내가 정말 목회를 잘하고 있나?’라는 의문도 들었어요. 그러면서 교인 수가 8명까지 줄었어요. 밑바닥이었죠.”

– 목회 성공에 대한 ‘완전한 죽음’을 경험하셨겠네요.
“네. 목회 뿐만 아니라, 총체적으로 정말 ‘죽음’ 같은 시간을 보냈어요. 막막한 상황에 아내가 많이 힘들어 했고, 두 아들은 집을 뛰쳐나가기도 했어요. 그런데 주님은 창세기 22장 묵상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그 모리아 산의 사건이 저에게 실제가 되었음을 깨닫게 해 주셨어요.

사역과 가정과 모든 환경에 대해서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말이 실제가 되는 시간이었죠.”

‘앵벌이 목회’를 회개하며 십자가로

– 이후에 섬기는 교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요?
“지난 몇 년간 진정한 예배의 회복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많은 우여곡절과 진통을 겪었죠. 특히 지난 날 목회성공을 위해 1년에 수십 명 씩 준비가 안 된 영혼들도 세례를 주었던 죄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으로 세례식을 하지 않고, 주님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난 겨울 아웃리치를 갔던 라오스에서 목사가 없어 세례를 받지 못한 현지인에게 세례를 베풀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죠. 그 요청을 ‘박영주 너 이제 내이름으로 세례 줘도 된다.’라는 주님의 허락으로 받았죠.

그래서 이번 부활절에 5년만에 다시 세례식이 베풀어져요. 세례받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저희 교인 두 사람이 세례를 받게 되죠.”

– 참된 예배와 성례의 회복이 일어나는 것같아 정말 감사하군요.
“작년 11월에는 집사님 한 분이 암 선고를 받으셨어요. 그런데 주님은 이 일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려야 할 마음을 주셔서 주일날 ‘암 판정 감사예배’를 드렸어요. 황당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무서운 질병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모든 성도들이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죠. 참된 예배와 진정한 부흥이 무엇인지 경험하고 있어요.

주님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교회를 세우셨는데, 저는 교회를 뭔가 부족한 것으로 크게 오해했어요.”

– 진정한 부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교회의 부흥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무한하시기에 그 마음을 알아갈수록 더욱 큰 부흥이 일어나는 거죠. 올해에 주님이 ‘교회개척’을 말씀하셨어요. 또 다른 건물을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인 우리가 온전함에 이르도록 삶의 모든 영역을 개척하라는 뜻이죠. ‘교회개척’을 위해 달려갈 겁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합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할 때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겠죠.”

J.S

本当の教会開拓を夢見るバク・ヨンジュ牧師

神様のみ子、イェス・キリストは無視と迫害とあらゆる苦難と十字架の悲惨な死の刑罰をうけた。そして復活によって罪人たちが清い神様へ進める道を開拓してくださった。また信仰でその道に歩み出た者たちを教会として立たせて、みずからその教会のかしらになって、神様の国を開拓した。そんな意味でイェス・キリストは偉大な開拓者である。

この地でキリストに見習って教会を開拓する数多くのキリストのしもべたちがいる。いま十字架の福音として‘建物’ではなく、真の教会開拓を夢見て走り出すバク・ヨンジュ牧師に会って話を聞いてみた。

-幼年時代をどのように過ごしましたか。
“私はガンワンドの火田民(農夫)の息子として生まれました。お父さんはガンワンドのホンチョン出身です。農夫として開拓生活をしていて、チュンチョンの山の奥の田舎に定着して、そこが私の故郷になりました。その当時、山菜をとって、山の動物たちを捕まえて食べて暮らしていました。

いま言うと、‘ウェルビン’ですが、まるで新石器時代の水準の生活でしたよ(笑)”

-信仰生活をするにはとても難しい環境だったんですね。
“村の神寺の文化中で育てられました。村の守護神がありました。そこでたまに祭祀をして、祭祀の捧げものは飢えていた私たちの分でした。お母さんが水を汲んでおいて月に願っていた姿を見ながら育ちました。”

小学校の時、放浪農夫生活

-いつまでその生活をしましたか。
“小学校3年にチュンチョンへ来ました。私がみるには、いえ、実際にある程度は豊かな学生たちが通う都市の学校へ転校しました。その学校に通いながら、冷蔵庫、電話、洗濯機、、そんな単語を始めて聞きました。文化衝撃が大きかったです。”

-エピソードが多かったでしょうね。
“子供たちが私に、‘貴方はどの幼稚園に通った?’と聞くと、私は、‘幼稚園は何?’こんな感じでした。全ての領域でこうでしたので、私が田舎者であることがすぐばれました。ある日私をからかおうと私にマナナをくれたのです。

しかし私はバナナを始めて見たので、どのようにして食べるべきか知りませんでした。それで机の棚に入れておきました。子供たちが、‘なぜ食べないの?’というと、私は、‘いまお腹がいっぱいだよ’と言った記憶があります。”

-教会はどのようにして通うようになりましたか。
“チュンチョンの市内に先に出ていたおじさんを通して通うようになりました。当時私に教会の生活は遊び場以外には何の意味もありませんでした。そしてお母さんがくれる日曜日の献金を、‘だまし取る’こともしました。。幼かったです。”

-本格的な信仰の生活はいつからですか。
“中学校の時、気にいりの女の子が一緒にいこうと誘ってくれたので中学生用集会に参加するため、お祈りの家へ行きました。そこで初めて霊的な体験をして、信仰の驚きを経験しました。その時から本格的な信仰生活が始まりましたが、家、学校、教会、このように3ヵ所だけ通いました。私なりには神様との関係を、私の人生に重要な部分として認識していました。”

お祈りの家での霊的な体験以後の人生の変化

-牧師としての呼びかけはどのように確証しましたか。
“熱心をだして信仰生活をしてみると、自然と牧師になろうと思いました。高校を卒業してすぐ神学校へと入学しました。しかし振り替えて見ると神学校時代の私の人生は、恥ずかしいばかりです。”

-どんなことが恥ずかしかったか聞いてもいいですか。
“自由主義の神学思想に染まっていました。神学生でもお酒とたばこをすると悟った意識を持つ知性人だという空しい思想に賛同していました。そして哲学と社会科学書を読んで、デモにも参加しました。いろんなデモの団体で活動をしました。

週中には政治闘争をして、週末には教会で伝道師として働く二重的な生活をしていました。”

“いま振り返ると私が本当の福音を知らなかったから、真理のみ言葉より屈折した学問を傾いて受け入れて、それがまるで真理であるかのように自己義を立てていたんですね。神様に対して言いながら、神様も、福音も、聖書に対しても本当はしらなかったんです。”

-デモをずっと行っていましたか。
“開拓教会を始めて自然とやめました。ガンワンドの生徒がない山谷にある教会を開拓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が、その時からは階級闘争ではなく、牧会成功に励む生活が始まりました。

田舎では牧会成功が不可能に思えて、牧師になってサンチョクへ再び開拓をしました。そして再びチュンチョンで、またも開拓をしました。”

-いまここチュンチョンにはいつ来ましたか。
“2003年に来ました。4番目の開拓をしたんですね。よい条件で建物がいただけました。以前教会から二人が来ましたが、建物だけ持っていれば当然席は満たされて、教会が成長するとの誤った考えを持っていました。

実際に何年ぶりに聖徒数が150人まで増えて教会がいっぱいでした。‘苦労終わり、幸せ始まる’だと思いました。開拓教会の自立成功事例として選ばれたりもしました。”

-そして教会にどんな変化がありましたか。
“増えた聖徒たちを養育させるプログラムが要りました。それで宣教団体で行われている訓練学校に参加して養育プログラムを導入する計画でしたが、そこで予想外の事が起こりました。私が十字架の福音の前で悟って、完全に変わりました。”

成功的な開拓教会, しかし …

-牧師として十字架の福音の前に悟るとは何のことか説明してください。
“聖霊の照明で罪に気付く恵みをいただいたことです。私がどんなに存在的に、‘自己義’と‘自己愛’で固まった罪びとであるかに気付きました。私は、‘自己義’が罪だとは思ってなかったです。青年時代、正義を叫んで民衆運動をしていた姿も、他の人の説教を引用しない私の説教方式に対しての自負心も、神様の前では罪であることに気付いて、私のすべての人生と考えの土台が崩れました。そして十字架だけが唯一の希望であり、この福音だけで十分だという結論に達しました。”

-十字架の福音の以後、牧会に対しての認識の転換が起こったでしょう。
“簡単にいうと私は聖徒たちを‘物乞い’をさせていた牧師でした。聖徒たちを世に送ってお金をたくさん儲けてくるよう祝福する、‘物乞い牧師’だったですね。私はボスだったです。悲惨でした。これ以上牧師を続けられませんでした。本当に神様が望む牧会をしたかったです。それで以前にしてきた生命力のない礼拝形式と行事を全部中断しました。そして十字架の福音を宣布する時間が大幅増えて、礼拝時間が長くなりました。

しかし礼拝時間に負担を感じる聖徒たちが教会を離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いろんな事を考えました。聖徒たちを一時間の礼拝に慣れさせたのかという自責も思い、‘今私が本当に牧会をちゃんとしているのか’という疑問もしました。その後聖徒の数が8人まで減りました。”

-牧会成功に対しての‘完全な死’を経験したんですね。
“はい。牧会だけではなく、総体的に本当に’死‘のような時間を過ごしました。そんな状況で妻が大変苦しんでいて、二人の息子は家出をしました。しかし神様は創世記22章の黙想を通して、アブラハムがイサクをささげたそのモリア山の事件が私にも実在していると気付かせてくださいました。

働きと家庭とすべての環境に対して‘十字架を通過する’という言葉が現実になる時間でした”

‘物乞い牧師’を悔い改めて十字架へ

-その後仕えていた教会にどんな変化がありましたか。
“いままでの何年間、本当の礼拝の回復のために悩みながら多くの紆余曲折と苦しみを経験しました。特に過去牧会成功のために一年に数十人ずつ、まだ準備されてない魂たちにも洗礼を施した罪に対して悔い改める心で、洗礼式をしないで、神様の許しを待っていました。

しかし去年の冬アウトリーチに行ったアオスで牧師がなくて洗礼をうけてなかった現地人に洗礼をお願いされました。その要請を、‘バク・ヨンジュ、貴方はこれから私の名によって洗礼をしてもいい’という神様の許しとしていただきました。

それで今度の復活節に5年ぶりに再び洗礼式がありました。洗礼を受けたいと願っていた聖徒二人が洗礼をうけました。”

-真の礼拝と聖霊の回復が起こっているようで本当に感謝です。
“去年11月には一人の執事さんがガンの宣告をされました。しかし神様はこのことに対しても感謝をささげる心をくださって、日曜日に’ガン判定感謝礼拝‘を捧げました。おかしい話かもしれませんが、恐ろしい病気ではなく、永遠の罪と死から救ってくださったイェス様の十字架の前ですべての聖徒たちが感謝の礼拝をささげる時間でした。真の礼拝と本当の復興が何であるかを経験しています。

神様はすでにキリスト内で充満な教会を立ててくださっているのに、私は教会を何かかけていると大きく誤解していました。”

-本当の復興が何だと思いますか
“教会の復興は結局神様のみ心を分かって行くことだと思います。神様は完全であり、無限であるのでその心を分かれば分かるほど、もっと大きな復興が起こります。今年神様が教会開拓をおっしゃいました。また違う建物を立てろと言うことではなく、教会である私たちが完全に達する人生のすべての領域を開拓しなさいとの意味です。教会開拓のために走りかけます。教会が神様のみ心を知り、そのみ心にあった自分の人生を開拓する時、真の復興が起こるでしょう”

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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