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만 따라가는 윤민선 전도사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순종의 걸음으로만 달려온 윤민선 전도사(동광교회). 파워 크리스천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던 윤 전도사 가정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교통사고. 어마어마한 교통사고 합의금. 그때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 13:8)” 사랑의 빚 외엔 다른 빚은 질 수 없어 집을 정리해 치료비로 지불하고 만삭의 몸으로 가방 하나 들고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윤 전도사의 광야 길을 들어봤다.
– 그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어느 날 자고 있는데 새벽에 전화가 걸려왔어요. 느낌이 이상했어요. ‘사고가 났습니다.’란 말을 듣고 너무 놀라 병원에 달려갔는데 남편 옷이 벗겨져 있고 피가 뒤범벅이 된 거예요. 의식도 없고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오열했어요. 남편이 우유배달 하다가 고등학생 남자아이가 술 먹고 운전한 오토바이와 부딪치면서 난 사고였어요.
그런데 사고 당시 음주측정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남편 과실이 더 크다고 나왔어요. 그땐 학생 부부여서 전세금이 저희가 가지고 있던 전부였어요. 어쩔 수 없이 전세금 일부를 빼서 합의금으로 지불했어요. 그렇게 하고 나서도 남편 병원비는 아직 남아있었죠. 그동안 공부하면서 파워 크리스천이 되어 세상을 섬기자고 했던 모든 꿈이 산산조각 난 것 같았어요. 모든 꿈이 사라지자 남편이 그동안 여러 차례 추천받아온 한 선교단체에서 주관하는 신앙훈련을 받으러 갔어요.”
남편의 교통사고로 산산조각 난 꿈
– 훈련은 도움이 되었나요?
“가난한 마음으로 훈련에 참석한 남편은 십자가 복음이 실제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됐어요. 이후 저도 그 훈련에 참가하면서 복음 앞에 서게 됐어요. 전도사였지만 전 그때까지 십자가에서 예수님만 못 박힌 줄 알았었죠. 비로소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살았다는 것이 실제가 됐어요. 그러면서 삶이 쉬워졌어요. 주님이 이제 제 안에 사시니까요. 그렇게 걱정거린 많아도 별 근심 없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예상치 못한 고지서가 또 날아온 거에요.”
– 어떤 고지서였죠?
“상대방 치료비를 24개월로 분할한 고지서였어요. 우리는 합의한 금액에 상대방 치료비까지 포함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그걸 보자마자 말 그대로 곡을 했어요. 치료비가 남아있는 남은 전세금에 좀 모자란 금액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날 아침 묵상한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정탐소식을 듣고 밤새 통곡했던 민수기 14장이었어요. 아침부터 곡했던 내게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시는데 더 이상 울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 제가 이리저리 궁리하며 남은 빚을 어떻게 갚아나갈까 고민했는데 고지서를 탁 접으면서 깨끗하게 정리하겠다고 결단했어요. 이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어딘가를 다녀온 남편도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더군요.”
– 어떤 말씀이었어요?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로마서 말씀이었어요.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저에게 어떻게 이야기할까 고민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이런저런 이유로 빚을 정리하는데 반대할까봐요. 그때 병원비와 학자금 대출금의 빚이 있었죠. 만약 이 빚을 정리하면 지금 있는 곳에서 이사도 가야 하는 데다 아이도 낳아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주님이 제게도 주신 말씀이 있잖아요. 돌아온 남편에게 주님이 하라는 대로 할거라고 고백했죠. 결국 남아있는 전세금으로 그 빚을 한번에 다 갚기로 하고 집을 정리했어요. 그때부터 믿음의 걸음이 시작된 것 같아요.”
– 쉽지 않은 걸음이었겠네요.
“빚을 다 갚고 남은 것으로 경기도 부천에 월세로 집을 얻어 들어가게 됐어요. 그때 저는 휴학하고 아이를 낳았고 남편은 직장 없이 학교만 다니고 있었어요. 어느 날 아침, 저녁으로 나팔을 불라고 하는 말씀을 보게 됐어요. 그래서 남편과 함께 첫째 아이 주하를 가운데 두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배만 드렸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참 은혜에요. 당시 저는 파트타임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었어요. 그 사례비로 월세 내고 아주 적은 재정으로 생활했죠. 사실 생활하기 불가능한 금액이었는데 매 순간 하나님이 기가 막힌 은혜를 주셨어요. 그러다 남편이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가게 된 아웃리치를 통해 이란에 루리 족에 대한 마음을 받게 됐어요. 500만 명이나 되는데 선교사가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종족이었죠. 저는 당연히 순종해야지 마음먹었죠. 그리고 신기하게도 몇몇 사건들을 통해 이란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어요.”
십자가 복음 앞에 서며 시작된 믿음의 걸음
– 어떤 일이었나요?
“하루는 아이를 안고 지하철에서 성경을 보고 있었는데 옆에 앉은 분이 말을 걸어왔어요. 대화가 시작되는 것 같아서 제가 만난 복음을 나누고 나서 지금은 이란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이란에 계신 선교사님을 소개해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마침 한국에 나와 있다면서요. 그렇게 이란 선교사님을 소개받게 됐죠. 비슷한 시기에 다시 복학한 학교에서 이란 한인교회 사역자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어요.
그러나 우리 가정이 갈 수 있는 조건이 안됐죠. 찬양 인도와 운전 가능한 싱글 사역자를 뽑았거든요. 저흰 아무것도 해당이 안됐어요. 그래도 지원해보고 싶어 저와 남편이 복음을 만나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적어서 이력서와 함께 보냈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이란으로 와달라고 연락이 온 거예요. 확실한 주님의 사인으로 받고 한국에 있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출국 일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때가 2010년 중동에 민주 항쟁이 났을 때였어요. 이란행 비자발급이 계속 연기가 됐어요. 그 사이 집 계약 기간이 끝나게 돼서 일단 집을 나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그러나 끝내 비자가 나오지 않았어요.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대기하고 있는데 주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 생각했죠. 우선은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받으셨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 마음이 하나가 안됐다는 것을 비춰주셨어요. 남편은 너무 가고 싶어 지원했지만 저는 남편이 간다니까 순종한 거였거든요.
사실 사역도 잘 모르는데다 아이와 함께 간다는 것이 두려웠던 거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오갈 데가 없다는 거였어요. 일단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다니기로 했죠. 당시 아이가 한창 쉬를 가릴 때여서 오줌통 하나, 트렁크 하나 들고 두 달 동안 돌아다녔어요. 처음 한 주는 전라도에 있는 순교자 기념관과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을 갔어요. 그다음엔 선교사 안식관이나 교회 등 여기저기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돌아다녔어요.”
– 두 달 동안의 시간은 어땠나요?
“전 조금 서글펐는데 남편은 기뻐했어요. 처음엔 돌아다니면서도 오직 이란에 갈 준비만 했어요. 그런데 아이도 기뻐하는 거예요. 엄마, 아빠와 함께 다닌다는 게 딸 주하에게는 신나는 일이었겠죠. 아이를 보면서 저의 모습을 깨닫기도 했어요.
저는 어디를 가는지가 중요한데 아이는 어디를 가는지보다 엄마만 있으면 됐어요. 난 그동안 하나님과 함께하는지 보다 어디에 가는지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해왔다는 것을 보게 됐어요.
또 어느 날은 일주일간 머물 곳이 서울 충정로역 근처여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어떤 할머니가 말을 걸어오셨어요. “어디 여행 가나 봐요?” 우리 여행 가방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었어요. “아니요, 국내에요.”라고 대답했더니 잘못 들으시고 다시 물으시길래 ‘충정로요.’ 그랬더니 ‘충청도도 좋지.’ 그러시는거예요.
그때는 그냥 웃고 넘겼는데 ‘그렇지, 우리 여행 다니는 거지.’라고 생각되면서 천상병의 시 ‘귀천’이 떠올랐어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이 땅에서 이렇게 여행 다니다 천국에 돌아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그 순간이 더욱 사모되는 시간들이었어요.”
– 힘은 드셨지만, 은혜 넘치는 시간이었네요.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셨어요?
“저희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을 사역했던 교회 사모님이 알게 되시면서 교회에 있는 작은 방에 들어와 살겠냐고 연락이 왔어요. 들어가면 좋잖아요? 근데 기도해보겠다고 말하고 당시 인천의 섬에 있는 선교단체의 열방기도센터에 들어가서 기도를 했어요. 그렇게 응답을 받고 교회에 들어가서 살게 됐어요. 처음엔 너무 은혜였죠.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게 너무 좋았는데 지내다보니 불편한 거예요. 성도님들과 마주치면서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땐 남편도 일을 하지 않았어요. 둘이 맨날 빈둥빈둥 노는 것처럼 보이는 게 너무 의식돼서 남편에게 ‘나가서 청소라도 해. 새벽기도 빨리 나가야지.’라며 다그쳤어요.
밖에 누가 없나 문틈으로 보기도 하고, 스스로 사찰 전도사라고 자청하면서 여기 저기 분주하게 6개월을 지냈어요. 그러다 친정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병간호를 위해 친정으로 들어오게 됐어요. 감사하게도 많이 호전되셨죠. 그러나 그것도 6개월이 지나자 또 얹혀있는 모양새가 됐어요. 결국 기도하고 다시 방을 얻어 나왔죠. 저는 다시 사역을 시작했고 남편도 주님이 언제라도 부르시면 열방으로 나가기 위해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지금까지 매일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고 있어요.”
나그네의 삶으로 열방을 꿈꾸며
– 계획대로 살아왔다기보다 오직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만 따라온 걸음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네. 사실 남편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에요. 남편은 말씀이 임하면 생명과 같이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거든요. 둘째 예하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갈라디아서 말씀으로 믿는 자들을 돌아보라는 마음을 받은 거예요.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남편이 일용직을 하면서 받아온 돈 얼마를 떼서 어느 한 가정을 돌보자고 했죠.
기도하면서 순종하기로 했는데 돈을 보내려고 할 때쯤에 항상 월세가 약간 모자란 거예요. ‘월세를 먼저 내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드니까 마음에 어려움이 심해졌어요. 7개월째는 너무 어려워서 남편에게 그만하자고 했어요. 근데 남편이 말씀 받았냐고 묻는 거예요. ‘아니, 못 받았어. 근데 내 마음이 힘들어.’ 그랬더니 ‘네 마음이 먼저냐? 말씀이 먼저냐?’
“기도로 제 영혼이 살아났어요”
“이 말 때문에 11개월까지 겨우 순종하게 됐죠. 근데 더는 못하겠어서 남편에게 ‘여기까진 것 같아.’ 단호하게 말했는데 한 달 후 그 가정에서 연락이 왔어요. 남편이 직장을 구했다고요. 그분에게 미안하다고 했어요. 끝까지 해야 되는데 여기까지 밖에 못했다고요. 그렇게 서로가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됐죠.”- 그래도 주님이 그 순종을 너무 기뻐하셨을 것 같네요.
“지금까지의 일을 생각해 보면 전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남편을 통해서나 목마름을 통해서 순종하게 하셨어요. 최근에도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어서 너무 고통스러웠을 때 그동안 모교에서 진행했던 기도모임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어요. 사실 둘째 아이 출산하고 기도모임을 쉬려고 했었는데 마음이 너무 힘드니까 쉬기는커녕 갓난아이 수유를 해가며 기도를 하게 하셨어요.”
– 모교에서 하는 기도모임은 어떤 모임인가요?
“같은 학교 출신 자매와 함께 열방을 위한 기도모임을 시작했어요. 지금은 이슬람열방기도모임과 연합하게 됐는데요. 많은 사람이 오진 않았지만 네댓 명이 모여 기도한 게 벌써 6년이 지났네요. 실같이 가느다란 우리의 기도지만 기도한 건 다 이루어주셨어요. 재작년부터 말씀이 학교에서 선포되도록 기도했는데 올해 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이 자발적으로 한 시간씩 말씀을 읽는 모임이 생긴 거예요. 너무 감사했어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영광을 보게 되니 더욱 기도를 쉴 수 없게 되는 것 같아요.”
– 앞으로의 계획이나 기도제목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다 보니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다 보니 자꾸 육아에 집중하게 되는데요, 남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며 첫사랑을 잃지 않도록 기도해주세요.” [GNPNEWS]
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