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우리 가정사에 대해 썼던 칼럼을 읽고 많은 분들이 격려와 칭찬을 보내왔다. 그때 말한 대로 나는 농촌의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였다. 1960년대는 모두가 힘들고 못사는 시절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정말 가난했다. 신학교를 막 졸업하고 모두가 큰 꿈을 가지고 목회 일선에 나갔지만, 나는 자원해서 복음의 불모지인 시골로 가서 일하겠다고 결심했다. 막상 가보니 그곳은 외국의 선교지와 다름이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블록으로 20평 정도 쌓아 올려져 있는 교회였는데, 천장은 대충 햇빛만 가려놓을 정도였다. 나는 그렇게 바닥을 가마니만 몇 장 깔아 놓고 개척을 시작했다. 겨울이 되니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오는데 11월인데도 엄청 추웠다.
당시 나는 총각 전도사였기에, 몇 안되는 교인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던 것 같다. 그때 도원동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분이 내게 중매를 서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해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지금의 아내와 맞선을 보았다. 속으로 ‘어떤 처자가 이렇게 찌들게 가난한 농촌 개척교회 목사에게 시집을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도봉산 어느 제과점으로 갔다. 나는 그녀에게 솔직하게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빈털터리 농촌 개척교회 목회자이다. 하지만 나는 참으로 큰 꿈이 있는데 앞으로 개혁신학의 아이콘인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웠던 뿌라야 대학으로 유학한 후에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이끌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황당한 꿈 같은 소리였다. 농촌 개척교회 목회자인 주제에 뜬금없고 헛된 망상 같은 말을 처음 본 그녀에게 내뱉은 것이다. 실제로 나는 네덜란드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것도 아닌데도 꿈이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나는 그 처녀에게 “내가 얼마나 비참하고 열악하게 사역을 하는지 직접 와 보라!”고 했다.
며칠 후 그 처녀(지금의 아내)는 그 열악한 농촌 개척교회의 상황을 보러왔다. 그러고는 “한번 해 보겠다!”고 했다. 그녀는 나의 왜소한 몸매와 가난을 본 것이 아니고, 나의 꿈과 열정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만난 지 1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도 일방적이요, 무모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결혼식을 주말이 아닌 월요일로 결정했다. 이유는 가난한 농촌 개척교회 목사가 결혼한다는데 누가 올지도 모르고, 친구들이 모두가 교역자들이므로 월요일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한국 결혼사에 월요일에 결혼식을 한 것은 내가 처음이지 않나 싶다. 나는 주말에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동산교회에서 식을 올렸고 분위기는 조금 썰렁했다. 그러나 우리의 결혼식을 위해 한국교회 신학계의 거성이신 <박형룡> 박사께서 친필로 축서를 보내주었고, 대 칼빈주의 주석가이신 <박윤선> 박사께서 사주신 금강 구두를 신고 결혼주례까지 받았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결혼비용도, 준비도 없이 그날 나는 어찌어찌하여 신부에게 금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러나 당시는 쌀 한 말에 5천 원의 사례금으로 신혼생활을 버텨야 했다. 그래서 한 달 만에 우리는 결혼 금반지를 팔 수밖에 없었고 그 비용으로 쌀을 사서 목회와 신혼생활을 버텨나갔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지금까지 원망 없이 살아왔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더 큰 미래를 꿈꾸면서 살아왔기에 일평생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부터 가난한 바닥에서 가정을 일구었으나, 우리는 날마다 좋은 일이었고, 날마다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꿈을 위해서 처자식을 남의 집 문간방에 남겨두고, 유럽으로 비행기를 탔다. 물론 돈이 없어서 홀트 양자회에서 아이들을 벨기에로 데려가는 에스코트로 임시 취직해서 단돈 9만 5000원짜리 티켓을 사서 돌아올 수 없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뿌라야 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말도, 글도 잘 모르는 멍청이었지만, 복음주의 학생운동, 칼빈주의 학생 모임 등에 참여하면서 조금씩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대한 카이퍼의 후계자들을 만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6개월이 지나자 학교 당국에서 “언제 귀국하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박사 과정을 계속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장학금이 없는 이상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러면 내가 장학금을 만들면 박사 과정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들은 내가 불가능한 줄 알고 “물론이다!”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께 ‘처자식을 남의 집 문간방에 두고 만리타향에 공부하러 왔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매달려 기도했을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네덜란드 31조 파 교회의 어른이신 메이스터(Meester) 목사님을 면담하게 된 것이다. 그 어른에게 나 자신을 소개하기를 “나는 나의 은사이자 나의 담임 목사인 <박윤선> 박사님의 제자이고, 박윤선 박사의 스승은 바로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변증학 교수인 <코넬리우스 봔틸> 박사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메이스터 목사님은 껄껄 웃으면서 “봔틸의 제자의 제자이면 틀림이 없습니다. 되었습니다. 나는 봔틸 박사와 죽마고우입니다. 목사님이 박사 과정을 끝마칠 때까지 우리가 후원하겠습니다!”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이 일어난 것이다. 그 후 나는 가족들을 네덜란드로 데려올 수 있었고,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1976년에 모교인 총신에 돌아와서 그때부터 과거 전임대우 교수 한 것이 인정되어 바로 교목 겸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에 복을 주시고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서 힘 있고 뜨겁게 주의 사역을 감당케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며칠 전 나는 아내의 산수 곧 팔순 잔치에, 56년 전에 팔아먹었던 금반지를 다시 사서 아내의 손에 꼭 끼워 주었다. [복음기도신문]
정성구 박사 |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40여년간 목회자, 설교자로 활동해왔으며, 최근 다양한 국내외 시사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조명한 칼럼으로 시대를 깨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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