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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부정선거, 민주주의 대화.타협 통한 민주주의 운용 역량 부재의 결과

▲ 이승만 대통령의 투표모습. 사진: 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이승만을 둘러싼 논란의 진실(12)- 3.15 부정선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3·15 선거에서 대통령 선거의 경쟁자인 조병옥 후보는 선거 전에 신병 치료 차 미국에 갔다가 사망했고, 선거법상 새로운 후보를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대통령이 확정됐다. 결국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야당의 장면 후보에 비해 인기가 없었고, 장면이 부통령이 될 경우 85세 고령의 이승만 대통령이 죽으면 대통령을 승계할 것이므로 이를 막고자 부정선거를 한 것이기에 영화 <건국 전쟁>에서 3·15 부정선거의 책임은 이승만이 질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이에 비판론자들은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부정 선거를 이미 조병옥 후보 사망 전에 기획했던 것을 지적하면서 부정선거에 이승만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에 어떤 책임이 있을까?

이 당시 상황의 이해를 위해 195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겪은 이후 한국의 정치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지러운 정쟁으로 전개됐다. 그것은 조선 시대의 당쟁이 부활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여야 간의 정쟁은 정치제도의 모순으로 더욱 격화됐다. 그 단적인 예를 부통령제에서 찾을 수 있다. 헌법상 아무런 실질적인 권한이 부여되지 않은 부통령이 1952년 헌법개정에 의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국민 직선에 의해 선출해야 됐다. 미국처럼 한 정당이 대통령과 부통령후보를 짝으로 선출하는 제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려되지 않고, 더구나 1954년 헌법개정에서 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어 대통령이 궐위시 부통령이 잔여 임기를 승계한다는 규정이 신설됐다.

이후 1956년 선거에서 대통령은 자유당의 이승만이,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는 이변이 벌어졌다. 이후 자유당과 민주당과의 정쟁은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 수준으로 전개됐다. 그 양상은 1925년 임시정부의 서북파와 공산주의자들이 이승만을 탄핵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적대적인 갈등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독립운동과 건국활동의 원훈으로서, 여전히 국민적 통합의 구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민족통일을 그가평생 추구한 자유혁명의 마지막 과제로 추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충분히 노쇠한 85세의 이승만은 정치와 행정의 일선에서 물러나 점점 상징적인 역할을 담당할 뿐이었다. 여당과 야당의 지도자들은 이대로 가다간 파국이 초래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공유하였지만 타협점을 찾기 힘들었다.

야당 민주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내각책임제 정부 형태를 불변의 소신으로 추구했다. 1958년의 민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유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이미 현저하게 약화한 것으로 판명됐다. 다가오는 1960년의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특히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이 이길 전망은 거의 없었다. 자유당의 강경파는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행정력과 치안력을 동원하여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그들에게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정권교체라는 개념은 아직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일이었다.

결국 1960년의 3·15 부정선거와 뒤이은 4·19 정변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운용할 정치적 능력이 당시까지의 한국정치에 결여되었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4·19로 민주당은 그토록 희구한 내각책임제 정부 형태를 실현했지만, 그에 따른 혼란을 막을 길이 없었다. 민주당은 오래전부터 내부에 신파와 구파라는 두 정파가 대립하여 심각한 당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당 내부의 갈등이 4·19 이후 전면화 되었으며, 그로 인해 민주당의 집권은 고작 10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5·16 군사 쿠데타를 맞이했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한국정치에서 민주적인 투표를 통한 평화로운 정권교체는 실현되지 못한 역사적 과제로 남았다.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후에도 20년 이상의 긴 세월이 필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3·15 부정선거의 실태를 알지 못했다. 그것은 이기붕을 위시한 자유당의 중심세력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4·19가 일어나기까지 몇 차례의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야당과 시민이 선거의 결과에 항의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몇 차례 질문했다.

그가 부정선거의 실태를 인지하게 된 것은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떠오른 이후 전국적으로 벌어진 항의시위에 접하면서부터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때부터 사임을 고려했지만, 막상 그의 사임을 강박한 것은 대통령의 계엄령 발동을 거부한 한국의 군부와 일찍부터 이승만을 제거할 기회를 노렸던 미국정부였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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