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6년 10월 6일, 브뤼셀 인근에서 한 영국인이 공개 처형되었다. 공식적인 죄목은 그가 이신칭의(以信得義)를 포함한 여러 가지 개신교 교리를 고수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쟁기를 끄는 소년”이 로마 가톨릭 성직자보다 성경을 더 잘 알도록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을 평민조차 읽을 수 있는 영어로 번역했던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에 영국에서 금지되었던 성경 번역 작업을 하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가 12년간 도피 생활을 해왔던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은 지인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화형대에서 쇠사슬에 의해 교살된 후 시신은 불에 태워졌다.
성경의 보급화를 위해 순교한 것은 틴데일만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틴데일이 번역한 성경을 지지하거나 밀반입했던 동역자들 중 그보다 먼저 붙잡혀 화형에 처했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이처럼 성경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이유는 성경이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자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경을 자기 육체적 생명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겼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500년 후, 우리는 서점에서 표지가 예쁜 성경을 저렴하게 구매하거나 스마트폰 앱으로 성경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살고 있다. 기독교가 여전히 탄압을 받고 있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성경을 정말로 읽고 싶은데 구할 수 없어서 읽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접근성이 용이해진 지금, 우리는 과연 성경의 보급화를 위해 기꺼이 순교를 각오했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성경을 가치 있게 여기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이 어떤 책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성경의 세 가지 중요한 특성을 다루려고 한다. 이 세 가지 특성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틴데일과 같은 이들처럼 성경을 우리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길 소망한다.
1. 성경의 영감
성경에는 여러 가지 특성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교리가 바로 ‘성경의 영감’이다. 이 ‘영감(inspiration)’이라는 개념이 근거하고 있는 디모데후서 3:16에서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개역개정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번역한 부분은 헬라어로 “세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라는 하나의 형용사인데, 앞의 “세오(theo)”가 “하나님”을 의미하고 뒤의 “프뉴스토스(pneustos)”가 “숨을 내쉰”을 의미하므로 “세오프뉴스토스”를 직역하면 “하나님에 의해 내쉬어진” 또는 “하나님의 숨결로 된”이라는 뜻이다. 이 교리에 대해 논할 때 일반적으로 ‘영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교리는 성경이 “신령한 느낌”이나 “기발한 착상”으로 쓰였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내쉼으로써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영어로도 KJV나 NASB처럼 “inspired by God”으로 번역하는 것보다 ESV처럼 “breathed out by God”으로 번역하거나 LSB 또는 NIV처럼 “God-breathed”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즉, 성경의 영감이란 기록된 말씀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가르치는 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의 영감’에 대해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충분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성경이 온전히 하나님의 숨결로 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많은 교인은 ‘성경의 영감’이 성경의 일부에만 해당된다고 여긴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교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복음주의권 교회에 속해 있는 교인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성경을 읽을 때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구절은 기꺼이 받아들이는 반면에 자신의 가치관에 들어맞지 않는 구절은 사실상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디모데에게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디모데후서 3:16의 “성경”이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쓸 당시에 이미 집필된 일부 신약성경 책들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디모데전서 5:18에 바울이 누가복음 10:7을 성경으로 인용한 것만 보더라도 바울이 신약성경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영감’이라는 것이 성경에 녹아 있는 ‘개념’에만 해당되는 것이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단어’에 해당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에게 영감을 주셔서 특정 개념을 깨닫게 하셨지만 그 저자가 성경을 써 내려가는 과정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 영감설(conceptual inspiration)’에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첫째는 앞서 살펴본 디모데후서 3:16에도 나왔듯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은 인간 저자가 아니라 “성경” 자체라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성경”은 헬라어로 “그라페(graphe)”인데, “기록된 글”이라는 뜻이다. 물론 베드로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21)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그 구절에서 “감동”으로 번역된 단어는 원어로 디모데후서 3:16에 나온 ‘하나님의 숨결로 되었다’라는 의미의 “세오프뉴스토스”가 아니라 ‘이끌림을 받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다른 동사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숨결로 된’ 것은 인간 저자가 아니라 그들이 기록한 성경 그 자체다. 개념 영감설의 둘째 문제는 더 간단한데, 예수님께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라고 하신 말씀과 충돌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영감에 대한 바른 관점은 성경 원본에 기록된 모든 글자 하나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숨결로 된 것으로 이해하는 ‘축자영감설(verbal inspiration)’이다.
2. 성경의 무오성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경이 온전히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그분의 말씀이라면, 이 사실은 필연적으로 성경에 오류가 전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진리이시며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일관되게 증언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민 23:1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삼상 15:29)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시 31:5)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
…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딛 1:2)
성경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는 진리의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므로 성경에는 거짓이나 오류가 결코 있을 수 없다.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하는 진영에서는 성경을 쓴 저자들이 실수할 수 있는 유한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지만, 인간 저자가 유한하다고 해서 반드시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정통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그 기록 과정을 주권적으로 감독(superintend)하셨다고 가르친다. 1978년에 300여 명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시카고에 모여서 저술한 ‘성경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문(The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은 “성경은 성령께서 준비하시고 주권적으로 감독하신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그 안에 언급된 모든 사안에 대해 무류한(infallible) 신적 권위를 지닌다”라고 진술한다. 마치 예수님께서 죄인인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의 초자연적인 보호 하심을 통해 마리아의 죄성을 물려받지 않으신 것처럼, 성경을 기록한 인간 저자가 비록 죄인일지라도 성령의 주권적인 감독하심을 통해 성경은 오류가 없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성경의 ‘영감’과 마찬가지로 ‘무오성’ 역시 엄밀히 말하면 성경 저자나 대필하는 비서가 직접 기록한 원본에만 해당된다. 원본을 제외한 사본이나 번역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감독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들이 있다. 사본의 필사 과정이나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들은 원본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지 않기 때문에 무오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사본들을 확보하고 있고, 그 덕분에 이 사본들을 비교하고 분석하는 작업인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을 통해 높은 정확도로 원본의 내용을 보존하고 있다. 또한 원어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진 성경학자들의 수고 덕분에 다양한 양질의 번역 성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사본이든 번역본이든 원본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는 만큼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반영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오늘날 원본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한국어나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펼 때 기본적으로 의심의 눈보다는 신뢰의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성경에 거짓이나 오류가 없다는 사실은 독자인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달려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하고 변치 않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3. 성경의 충분성
감사하게도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정통적인 성경관을 표방하는 복음주의 교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무오한 말씀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현대 복음주의 안에서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과되는 교리가 있는데, 바로 성경의 ‘충분성’이다. 여러 기독교 리더들이 이러한 현실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는 “오늘날 교회가 당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는 무오성 교리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의 충분성에 관한 것이다.”(Whatever Happened to the Gospel of Grace?, 72쪽)라고 지적했고, 폴 워셔(Paul Washer)도 <현대 교회를 향한 10가지 기소장>이라는 책에서 첫째로 언급한 것이 바로 “성경의 충분성에 대한 실질적인 부정”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충분성’이라는 교리가 가르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일까? 신학적으로 “성경으로 충분하다”라는 말은 성경에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에 다른 책은 전혀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이 ‘구원’과 ‘영적 삶’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계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불신자가 영생을 얻고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길을 성경이 충분히 제시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다른 계시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14-17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4-17)
바울이 이러한 성경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에게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상기시키며 주의를 줬던 것이다(고전 4:6).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가 성경의 충분성 교리에 표면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부정한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은사주의와 인본주의의 형태로 드러난다. 먼저 ‘은사주의’란 정경(canon) 66권의 완성 이후에도 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치는 사상이다. 이 글에서 초자연적 은사의 지속 여부에 대해 깊이 다룰 수는 없지만,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이나 방언은 계시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시(revelation)란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계시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다. 예언과 방언은 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에 ‘계시적 은사(revelatory gifts)’라고도 불린다. 사도 요한의 요한계시록을 끝으로 신약성경이 완성되었는데, 만약 그 이후에도 계시적 은사가 지속되고 있다면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인 성경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즉, 은사주의(또는 은사지속론)과 성경의 충분성 교리는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은사지속론자들은 피부에 와닿는 개인적인 체험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냐고 묻겠지만, 초자연적 은사가 실제로 존재했던 1세기 사도 시대 때에도 성경이 더 확실한 계시였다.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사도들이 변화산에서 직접 목격한 예수님의 영광과 직접 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에 대해 언급한 후(벧후 1:16-18), 그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증언보다 더 확실한 계시가 바로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이라고 못 박는다(벧후 1:19-21). 따라서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사도들의 가르침이 진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주어졌던 계시적 은사들(히 2:4 참조)은 “더 확실한” 성경이 완성된 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예언이나 방언이 없더라도 성경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인본주의는 은사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은근히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를 인식하기가 더 어렵다. ‘인본주의’란 사람 중심적인 사상으로서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과 대조되는 개념인데, 여기서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세상적인 학문과 유행을 도입하려는 실용주의적 경향성이다. 제임스 보이스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 책[성경]을 통해 주셨다고 믿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성경을 사람의 것들로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회학적인 기술이,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위해 대중적인 심리학과 대중적인 정신과학이, 인도하심을 위해 성경 외적인 표적이나 기적이, 또는 사회적 진보와 개혁을 위해 정치적인 도구들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Whatever Happened to the Gospel of Grace?, 72쪽)
마찬가지로 폴 워셔도 인본주의적 실용주의에 사로잡힌 수많은 현대 교회에게 일침을 가한다.
내 생각에 사회 과학은 대부분의 사람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시되고 있다. 사회 과학은 교회, 전도, 선교학에 너무나도 깊이 침투해 들어와서 더 이상 우리가 하는 일을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이 교회 안에서 주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Ten Indictments against the Modern Church, 10쪽)
이것은 비단 미국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교회들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예를 들어, 복음 집회를 열 때 유명한 가수나 연예인을 초대하고 그들의 이름을 내세워 홍보함으로써 불신자들의 관심을 끌거나, 비슷한 원리로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다음 주에 친구 초청 잔치를 할 예정이니 학교 친구들에게 그날 교회 오면 맛있는 간식과 선물이 준비되어 있다고 전하라고 장려하는 일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라. 성경에 담긴 복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좋아할 만한 다른 것들을 동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한 적이 없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라고 선포하셨고,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행 2:38)라고 촉구했으며,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라고 고백했다.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성경적인 전도 방법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직접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만, ‘복음 집회’나 ‘친구 초청 잔치’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누군가를 그런 곳으로 유도하는 인본주의적인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말대로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 “썩지 아니할 씨”, 곧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이라면(벧전 1:23), “썩어질 씨”에 불과한 인본주의적인 요소들에 의존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불신자의 구원과 신자의 영적 삶에 있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많은 교회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말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의와 자유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말씀이자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주님께서 … 마태복음 4장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며, 이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다른 어떤 것도 영혼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고 결론이 난 것으로 여기도록 하자. 그러나 만일 영혼이 말씀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 영혼은 부요하고 부족함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생명, 진리, 빛, 화평, 의로움, 구원, 기쁨, 자유, 지혜, 능력, 은혜, 영광, 그리고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축복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Works of Martin Luther, 2권 314쪽)
맺음말
2016년 3월, 필자가 아직 마스터스 신학교(The Master’s Seminary)에 입학하기 몇 년 전에 존 맥아더(John MacArthur)가 목회하고 있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해마다 열리는 목회자 콘퍼런스(Shepherds Conference)에 처음으로 참석하기 위해 LA를 방문했을 때였다. 신학교가 교회 캠퍼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콘퍼런스 기간에 신학교 도서관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실내를 둘러보다가 벽에 “We train men because lives depend on it.”이라고 적힌 문구를 본 기억이 난다. 우리말로 “우리가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이유는 다른 이들의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인데, 바로 마스터스 신학교의 교훈(school motto)이었다. 그리고 같은 건물 2층으로 올라가면 벽에 큰 금빛 글씨로 “Preach the Word! Be ready in season and out of season.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라고 적혀 있다. 이 디모데후서 4장 2절 말씀처럼 마스터스 신학교가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목적은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숨결로 된 무오하고 충분한 성경이 곧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신자와 불신자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살 수 없기에 설교 강단에서는 이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야 한다. [복음기도신문]
박준성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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