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이스라엘 육군 장교이자 개혁파 목사인 데이비드 자독은 그날 받은 아내의 전화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0월 7일 이른 아침에 그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이스라엘에 있는 집을 떠나 밤새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에 도착한 지 불과 한두 시간 뒤였다. 그의 여행은 스칸디나비아 교회들과 맺은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었다.
“여보, 들었어요? 전쟁이 일어났어요.”
머리가 멍해지며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그리고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를 떠올렸다.
“여기 핀란드에서?”
“아니요, 이스라엘이에요. 가자에서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자독은 귀국 편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길은 대부분이 폐쇄되었다. 보통 400달러 정도 드는 베를린에서 텔아비브까지의 비행이 1,200달러로 올랐지만, 그것도 바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는 꼬박 하루를 기다려야 했고, 그동안 핀란드에서 두 번 설교했다.
“호세아 1장을 설교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 짧은 장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발견되는 것처럼 성경의 전체 이야기는 다른 게 아니라 심판과 구원에 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은 죽음과 삶에 관한 것입니다. 역사를 통틀어 많은 국가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랐습니다. 그건 사실상 영적인 싸움입니다.”
하마스와의 전투도 영적인 싸움이라고 그는 말했다. 더 많은 땅과 더 많은 돈에 하마스가 만족할 리 없었다. 하마스는 여호와를 미워하고 아브라함 시대부터 그의 이름과 연관된 사람들을 멸망시키고 싶어 했다.
자독은 십 대 때 이란을 떠나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예수를 믿었고,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방위군(IDF)에서 복무했다. 그런 그에게 육적인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영적 전쟁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복음연합은 그에게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처음 들었는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마지막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포함해서) 그의 사역을 위한 문을 어떻게 여시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하마스와의 전쟁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았는지 물었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서 이란에서 자랐는데, 어떻게 그렇게 된 거지요?
우리 가족은 아마도 바빌로니아 유대인의 후손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여러 세대에 걸쳐서 이라크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바그다드의 유대인이 살해당했고, 특히 파르후드의 밤(Farhud Night)에 집과 회당이 불탔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란 국경을 넘어 탈출했습니다. 전쟁 내내 아버지는 유대인들이 이라크나 시리아 같은 아랍 국가에서 이스라엘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는 사실상 나중에 IDF로 알려진 조직의 일원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부모님은 이스라엘에 정착했고 나는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세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나와 남동생, 여동생을 데리고 이란에 있는 가족을 방문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도 없고 결혼 생활도 어려운 삼촌, 이모네에 나를 맡겼습니다. 아마도 아이가 있으면 결혼 생활이 괜찮아질 거라 여겼던 거 같아요. 그들의 결혼 생활이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내가 같이 있음으로 다행히 이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이모, 삼촌과 함께 이란에서 자랐습니다.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 일 년 넘게 인질이 억류되었던 거 기억합니까? 글쎄요, 우리는 이스라엘인이 미국인보다 더 나쁜 대우를 받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영사관으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삼촌 부부는 나를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있는 고등학교에 보냈습니다.
거기서 신앙을 가진 건가요?
친구 하나가 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에서 열린 성서 연구에 나를 초대했습니다. 네비게이토가 주최하는 거였어요. 내 영어 실력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날 내 평생 들었던 거보다 더 많이 예수의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몇 명이 창세기 3장을 나와 공유했고, 나는 그 이야기에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할머니가 전에 내게 들려주신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선지자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오실 메시아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약성경에 오더니, 거기서 만나는 예수님이 유대인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거기에 관해서 별로 듣고 싶지 않았어요. “아니,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벌써 열일곱 살인데,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물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요한복음을 읽으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내게는 주말에 유학생을 초대하는 가족으로부터 받은 기독교 성경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의상 받았던 겁니다. 나중에 버릴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거기에는 구약도 들어 있어서 차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이라면 거룩한 성경은 버리면 안 되니까요. 우리는 절대로 성경을 버리지 않습니다. 성경이 오래되면 묘지 입구의 특별한 장소에 놓아두거나 어딘가에 묻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요한복음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정도 읽었습니다. 매번 읽을 때마다 마치 하나님께서 새로운 퍼즐을 하나씩 맞추는 거 같았습니다. 결국 나는 회심했습니다.
가족이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메시아를 찾았다는 흥미로운 소식을 편지로 전했습니다. 그때까지 이란에 있던 삼촌과 숙모에게 히브리어와 페르시아어로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아무런 답이 없었습니다.
편지가 분실된 게 아닌가 싶어서 한 번 더 썼습니다. 이번에는 답장이 왔지만, 회심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이 다른 내용에만 답을 썼더군요. 내 믿음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왜 그런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몇 주 후에 삼촌이 미국에 왔습니다. 우리는 몇몇 사람들과 저녁을 먹었습니다. 디저트가 나오자 삼촌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데이비드, 아마도 너는 그리스도인이 된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구나. 우리 생각을 지금 솔직하게 전달하마. 네가 마약 중독자나 감옥에 갇힌 범죄자가 되었다면, 차라리 우리는 훨씬 덜 부끄러웠을 거다.”
그는 나를 다시 이스라엘로 데려가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수줍음이 많았고 크게 당황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냥 이렇게만 말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내가 계속 미국에 머물게 허락했고, 나는 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요?
학사 학위를 받고 군 복무를 위해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나는 IDF에서 약 구 년을 복무했고, 국방부의 일급비밀 프로젝트에서 수석 엔지니어링 및 시스템 분석가로 일했습니다.
삼촌과 이모는 이란을 탈출해서 이스라엘로 들어왔습니다. 당시 나는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자 두 분이 나를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들이 없다. 너는 이제 우리에게 죽은 사람이다.”
나는 교회 근처의 아파트에 세를 얻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가족과의 관계가 좋아졌고요. 하지만 결코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았어요. 약 십사 년 전, 형이 뇌종양으로 죽었습니다. 나는 형이 호스피스 병동에 있을 때 어머니를 모시고 병문안을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그러더군요. “데이비드, 네 형이 왜 죽어가는지 알아?”
“아니요?”
“네가 예수를 믿어서 그래.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족에게 복수를 하시고 계셔. 너 때문에 말이야.”
어머니의 말은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습니다.
신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할머니, 삼촌, 그리고 이모에게 계속 복음을 전하고 또 보살피기 위해서 나는 이스라엘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한 이후 당신은 거의 처음부터 개혁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을 통틀어서 내가 속한 건 단 두 교회가 전부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다녔던 교회는 뉴라이프 장로교회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교회는 Grace & Truth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은혜의 교리를 배운 이스라엘 그리스도인에 의해 1976년에 개척되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만난 가까운 선교사님의 추천으로 가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니까요.
아내와 두 번째 데이트할 때 나는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TULIP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두 번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처음으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히브리어로 번역했습니다. Robert Godfrey가 서문을 썼습니다.
당신이 번역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HaGefen 출판사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로버트 맥체인(Robert M’Cheyne)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그가 이스라엘에 온 건 1839년입니다.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보고하기를 유대인을 위한 기독교 선교 단체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결국 CWI(Christian Witness to Israel)가 되었고, 그 단체는 1974년에 HaGefen Publishing을 시작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책을 내는 기독교 출판사는 전 세계에 두세 군데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나마 규모가 가장 크지만 한 해 동안 인쇄하는 책은 고작해야 8-9종이고 350부씩 정도만 인쇄합니다. 그렇지만 그 필요성은 엄청납니다. 성경 66권 중 14-15권만 히브리어 주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어 주석을 다 출판했습니다. 우리는 매튜 헨리 주석, 스펄전의 Checkbook of Faith, R. C. 스프로울, 그리고 존 맥아더와 폴 워셔의 책 몇 권을 출판했습니다.
우리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책 제작에는 보조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또 책을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재고의 약 25퍼센트를 나누어 줍니다. 그래서 모든 프로젝트 전에는 모금이 필요합니다.
막 완료한 대규모 프로젝트 중 하나는 (무려 이십 년이 걸렸습니다) 청소년과 어린이를 위해서 단어별로 또 구절별로 모든 구약을 현대 히브리어로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잠깐만요. 구약이 원래 히브리어인데, 구약을 히브리어로 번역하고 있다고요?
다윗 왕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지금 약 3000년 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언어는 발전하고 변형되었습니다. 게다가 지난 2000년 동안 히브리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어요. 히브리어는 사실상 19세기 후반에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Eliezer Ben Yehuda)에 의해서 “부활”했을 뿐입니다.
거기서 출판한 책을 누가 읽나요? 이스라엘에도 개혁파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인구가 9백만이 조금 넘는 나라입니다. 신자 수는 최대한 잡을 때, 삼만 명 정도에요.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어 더 폭넓은 그리스도인 독자를 대상으로 출판합니다. 수년 동안 Grace & Truth는 유일한 개혁 교회였습니다. 지난 5-6년 동안 개혁교회연합 (Fellowship of Reformed Churches)이라는 네트워크에 속한 교회는 아홉 개로 늘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 교회는 러시아어를 사용합니다. 소련 붕괴 이후 대규모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했거든요.
교회 중 한 곳은 북부에 있었는데 하마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대피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다른 부분에서는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그리고 당신에게는요?
전쟁이 시작되고 첫 삼 주 동안 내 안에는 엄청난 투쟁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마스가 행한 일, 여성을 살해하고 강간하고, 아기를 오븐에 넣고, 임신한 산모의 자궁을 여는 만행을 보았습니다. 나는 우리 공군이 가자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모두를 죽여 버리길 바랐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고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 때문에 나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을 이해하는 데에까지 몇 주가 걸렸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었고, 그 과정을 겪어서 기쁩니다. 왜냐하면 그 덕분에 나는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깊은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원수와 대적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있는 그리스도인 아랍인과 팔레스타인인을 도왔습니다. 우리는 스무 가족에게 수백 달러 상당의 상품권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군인들을 위한 구명 장비를 구입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포함하여 다양한 사람들에게 삼천 개 이상의 식료품 팩을 제공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는 백칠십 명쯤 되는데, 우리 딸을 포함해 서른다섯 명이 예비군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내 아들은 예비군 과정을 밟고 있으며 전쟁으로 인해 예상보다 훨씬 일찍 지난주에 입대했습니다. 아내와 나는 지난주에 병원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 군인을 심방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구하셨지만, 그는 부상을 입었고, 몇 주 동안 입원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치료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그의 부모에게 거의 만 달러를 보냈습니다.
북부 지역에 있는 교회를 다니는 어느 에티오피아 가정의 큰아들이 전쟁에서 사망했습니다. 몇 달 전에 어머니는 신장과 간 이식을 받아야 했고, 남편은 아내를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다섯 있는데, 우리 부부는 차를 타고 가서 자금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10월 7일 우리 교회의 다섯 가족이 집에서 대피했습니다. 한 가족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예비군이고, 아내는 어린 자녀를 돌보고 있는데 임신 중이어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가족도 돕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모든 사역을 이어가고 있나요?
내게 정말 도움이 되고, 지금도 나를 이끄는 것은 심판과 구원의 큰 그림을 보는 눈입니다. 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창 50:20).
나는 어떤 면에서 그 사실을 이미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지금 도움이 너무나 절실하기에 작은 도움이라도 큰 힘이 되는 시기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육군 고위 간부들 그리고 병원장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왜 기부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전쟁 전에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화입니다.
내 삶을 돌아보면 이라크에서 유대인들이 흩어지는 일, 1973년 전쟁, 이슬람 혁명, 코로나19, 심지어 이번 하마스와의 전쟁까지 세계적인 수많은 사건이 스쳐 지나갑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이 모두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봅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이 다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항상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 즉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세계적인 사건을 하나님께서 전 세계 사람들의 삶에서 그분의 개인적인 뜻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랍기만 합니다.
성경은 심판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지만, 찬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류에게 가장 끔찍한 재앙이 닥친 바로 그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승리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슬픔, 죽음, 심판에서 구원, 갱신, 찬양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동일한 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삶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심판과 죽음, 그리고 부활, 무엇보다 지금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복음기도신문]
원문: 6 Months Later, Israeli Pastor Says, ‘I’m Commanded to Love My Enemies’
데이비드 자독 Sarah Eekhoff Zylstra·David Zadok | 데이비드 자독은 Grace & Truth Church의 목사이자 이스라엘에 있는 HaGefen Publishing의 디렉터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