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소책자에서 읽었던 존 퀸시 애덤스의 생애에 관한 일화다. 그가 80세가 되던 어느 날, 지인이 그에게 다가와 “존 퀸시 애덤스씨는 안녕하신지요?”라고 물었다.
전 미합중국 대통령은 정중히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친구여. 존 퀸시 애덤스는 잘 그것도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현재 사는 집은 헐어져 황폐해가고 있으며 그 토대 위에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세월이 거의 붕괴시킨 것이죠. 지붕은 다 닳아버렸고 벽들은 산산이 부서졌으며 바람이 불 때마다 떨린답니다. 이 오래된 초라한 주택은 거의 살 수 없게 돼 버렸기에 제 생각엔 존 퀸시 애덤스는 곧 그곳에서 나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친구여, 퀸시 그 자신은 너무나도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리고 이 노 정치가는 그의 지팡이에 묵직이 기대어 천천히 길을 걸어 내려갔다.[1]
우리가 사는 이 타락한 외형은 나약하며 쇠퇴해간다. 그런데도 우리의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는 우리의 몸을 보호하고 지키는데 투자된다.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몸의 충실한 청지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우리가 거주하는 이 “건물”이 영원히 지속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천국에 대한 관점을 향상시키는 좋은 방법은 천국의 육체적·물리적 실제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몸인 땅에 있는 장막이 없어질 때,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집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2) 로마서 8:23에서는 천국에서는 쇠약해져 가는 우리의 육체조차 구속되어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우리들의 신음은 결국 천국의 몸, 즉 그리스도의 몸과 동일한 놀라운 속성을 지닌 옷을 입게 될 때 끝이 날 것이다.
영광스러운 몸이 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모든 소망과 애착을 천국에 두기에 좋은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의 소중한 친구 죠니 에릭슨 타다는 이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몸은 십대 때 얕은 물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양쪽 어깨에서부터 발끝까지 마비되어 버렸다. 그리고 최근엔 암과 싸웠다. 내가 알고 있는 죠니는 그녀의 마음을 오래 전부터 천국에 고정했다. 이는 그녀의 대화, 노래, 라디오 메시지 그리고 예술 작품 속에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녀와의 대화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마치 인지할 수 있는 천국의 맨 가장자리로 이끌어 가는 듯 했다. 이에 대해 그녀의 책에서 설명하기를:
아직도 나는 거의 믿을 수가 없다. 오그라져 굽은 손가락들, 위축된 근육들, 비틀린 두 무릎 그리고 양쪽 어깨로부터 발끝까지의 무감각을 지닌 나. 하지만 나는 언젠가 가볍고 밝고 힘차며 눈부시게 빛나는 의의 옷을 입은 새로운 몸을 가질 것이다.
로마서 12:12에서 말하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는 나에게 쉬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바로 지난 20여년 동안 해 온 일이다. 내가 가진 천국의 확신은 너무나도 생생해서 새로운 몸을 부여 받으면 갖가지의 즐거운 일을 하기로 친구들과 약속들을 했다. 나는 이러한 약속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정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확신한다.[2]
사도 바울이 천국을 바라보며 그가 사람들과 약속을 했는지 여부에 대해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천국을 기다리며 천국에 대한 확실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고린도후서5:1-4을 보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이 몸 안에서 죄, 병, 슬픔 그리고 죽음의 무거운 짐에 의해 신음한다. 그러나 옷 벗고자 함을 원치 않는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육신을 떠난 영혼들이 되길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우리가 갈망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영혼과 몸 둘 다 하나님의 면전(面前) 앞으로 나가기를 소망한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시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천국은 순전히 무형적이고 영적이며 그리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치 천국을 꿈 같은 영적 차원 안에 있는 희미하고 감지 불가능한 실체 없는 존재로 상상한다. 이것은 성경적 개념의 천국이 아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노화, 부상, 병, 또는 죽음의 영향에 지배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 상태보다 더 강건한 몸, 그리스도의 부활된 몸과 같은 실재의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빌 3:21)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고전 15:53-54)
그리고 나는 영광스럽게 된 무릎을 부여 받은 죠니 타다와 장거리 달리기를 하기로 이미 약속했다.
바울은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라고 말한다. “보증”이라고 번역 된 그리스어 아라본(arrabon)은 바울이 에베소서 1:14에서 사용한 단어와 동일한 단어로 또한 성령을 지칭한다. 이 고대 단어의 양식은 현대 그리스어로 약혼반지를 의미하는 데 사용됐다. 신약 시대에는 대개 채무 금액의 첫 회 납부금 다시 말해 보증금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천국의 영광 안에서 우리의 몸까지도 새롭고 영원불멸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께서 하신 서약의 증표이신 것이다.
바울은 이어 이 진리를 매우 실질적으로 적용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6-8)
이 세상은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고 그는 되려 다가올 세상을 동경했다.
당신의 마음 속 가장 깊은 소망을 표현하는 이러한 성경 구절들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어려운가? 안타깝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이 세상 뿐이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 이 세상을 단단히 붙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모든 관계가 세상 안에 연결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이곳을 진정한 집이라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린다. 그래서 이 삶에 갇혀 버린다. 그러나 바울 그 자신이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to be at home영어-endemeo그리스어)를 원한다 말하는 것에 주목해보라. 엔데메오(endemeo)는 “고향에 거하다” 라는 동사형이다. 우리가 마침내 오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때 진정으로 고향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천국에 속해 있다는 믿음 그것이 바로 이 삶의 고투를 견뎌 내도록 그를 도와주었다.
우리는 또한 천국의 형상으로 옷 입혀지기를 간절히 원해야 할 것이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라며 기다려야 한다. 오늘의 즐거움 혹은 괴로움에 집착해 있기보다는 우리는 더욱 영원한 영광에 대한 바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1] Herbert H. Wernecke, When Loved Ones Are Called Home (Grand Rapids, MI: Baker, 1972), 17.
[2] Joni Eareckson Tada, Heaven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5), 533-55.
존 맥아더(John MacArthur)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원문: https://gty.org/library/blog/B160926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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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천국(3): 천국적 세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