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천국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세계관이란 말은 도덕적, 철학적 그리고 영적 기반을 통해서 세상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해석하는 것을 일컫는다. 인지하고 있든지 아니든지 간에 우리는 모두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은 독특하게도 천국에 초점 맞추어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현실 도피라 말하며 비웃을 수도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결국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로새서 3:2)이다. 킹제임스역은 이 명령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을 두고.” 그러나 정작 이 절을 썼던 사도바울은 결코 현실 도피주의적으로 자신의 삶에 접근하지 않았다.
실제로 바울은 천국과 세상에 대한 바른 성경적 관점의 아주 좋은 예다. 그는 이 땅에서 엄청난 박해를 당했으나 천국을 향한 마음을 결코 잃지 않았다. 고린도후서 4:8-10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고나서 4:16-18절에 덧붙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그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이르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8:18)
바울은 베드로가 언급한 것 – 흩어져 핍박당하고 있던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 – 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천국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의 고난을 견딘다(베드로전서 1:3-7). 우리가 지금의 삶에서 어떤 고난을 겪을지라도 다가올 영광의 삶과는 비교될 수 없다.
즉, 우리는 천국을 꿈꾸며 이 삶으로부터 도피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땅에서의 삶을 천국에 대한 확신으로 견디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 세상은 일시적일 뿐이지만, 천국은 영원하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허망한 것들의 그림자 속에 자신들을 숨김으로써 영원의 것을 피하려고 일시적인 세상의 것에 자신들의 온갖 애착을 둔 그들이 진정 현실 도피주의자다.
역설적인 것은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천국의 영원한 것들에 비해 덜 실질적이며 덜 영구적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실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린도후서 4:18-5:1)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원한 것처럼 사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인생의 일시적인 속성보다 분명한 것은 없다. 우리는 땅에 있는 장막(육체)이 점점 무너져간다는 것을 어린 나이때부터 잘 알고 있다. 이 장막은 허물어지고 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장막) 있어 탄식하며.”(고린도후서 5:2) 또,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로마서 8:22)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장 얕은 수준에서 볼지라도 사물의 본질을 고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 사실은 명백하다.
다수의 사람은 무절제한 방종을 인생이 짧다는 것으로 정당화시키며 그릇된 결론을 내린다. 결국 삶에 의미가 없다면 지금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경험할 수 있으며, 최대한의 개인적 쾌락을 즐기는 게 낫지 않겠는가? 한 유명한 맥주 회사는 인생의 짧음을 강조하며 자기 회사의 맥주를 선전하곤 했다. “단 한 번 사는 인생이니 잡아챌 수 있는 모든 열정을 움켜잡아라.” 비슷한 맥락으로 유명한 신발 회사가 광고하기를 “인생은 짧다. 열심히 즐겨라.” 이 땅에서의 삶을 천국에 보물을 쌓는 기회로 삼으라는 예수님의 충고와 얼마나 다른가!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인간 실존의 전부라면 우리의 존재는 실로 비극일 것이다. 그리고 분명 허무주의만이 최상의 가치를 지닌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중요치 않기 때문에 죽은 뒤에 무의 상태로 돌아가야 할 바엔 차라리 그 전에 이 삶에서 온갖 쾌락과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당연히 이러한 쾌락주의가 양산해내는 절망을 한탄하고 애통해한다. 그러나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기독교 외에 취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하고 논리적인 선택임을 인정하자. 우리의 존재가 무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무로 이어져 나아갈 것이고, 그렇다면 삶 자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무(無)다. 혹은 한 회의론자가 말했듯이, 우리는 그저 거름이 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원형질(原形質)에 불과하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은 어리석은 자의 세계관이라 말한다(누가복음 12:19-20). 영생의 관점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더 좋은 일인가! [복음기도신문]
존 맥아더(John MacArthur)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원문: https://www.gty.org/library/blog/B160922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