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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대구, 경북의 어머니 교회로 서다

사진 : 대구제일교회 웹페이지 캡처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대구는 영남에서 서울과 부산을 잇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창원, 울산, 부산, 울산, 경주 등지에서 서울에 가기 위해서 집결하거나 기점 역할을 했던 곳이 대구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구가 집중되고 장이 커지면서 조선의 3대 시장이 형성되었고 경제권이 큰 도시가 되었으며, 분지에 형성된 도시이기 때문에 더위가 심하지만, 영남의 중심도시로 성장했다.

이러한 도시였기에 초기 선교사들은 대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감리교회의 아펜젤러, 존스, 장로교회의 게일과 데이비스 선교사 같은 이들도 이곳을 찾아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들 가운데 대구에 찾아와서 둥지를 틀고 복음을 전한 이는 북장로교회 선교사로 내한한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였다.

베어드는 대구에 부임하기 전부터 경북지역에 관심을 품고 대구지역을 돌아보면서 전도 여행을 했다.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한 달 남짓 교통수단이라고 해야 특별한 게 없던 그 시절 그는 도보로 여행을 이어갔다. 숙박시설도 기대할 수 없었던 시대였지만 조선을 선교하기 위한 그의 각별한 의식은 이러한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도 여행을 하던 그가 처음으로 대구에 발을 디딘 것은 1893년 4월 22일, 그러니까 전도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처음으로 찾은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서경조(徐景祚) 전도사와 마부 박재룡 등이 함께 대구를 찾았다. 대구를 거점으로 하는 경북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듬해인 1894년에 다시 대구를 방문하였다. 대구가 경북지역 선교의 거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고, 반드시 거점이 필요함을 확인한 그는 1895년 12월 대구에 와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부동산을 찾아보았고, 이듬해 1896년 1월, 대지 420평에 자리하고 있는 초가와 와가를 매입했다. 이것이 대구제일교회가 시작된 곳이다.

20240611 TGC Daegu Church 1
사진: tgckorea.org

땅과 집을 마련한 베어드는 1896년 4월, 부인(Annie L. Adams)과 아들(John)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 왔다. 기존의 집을 조금 손을 보아서 그대로 사용했다. 부산에서 대구로 옮겨온 그는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해 10월에 개최된 선교사 연차총회에서 베어드가 서울지역 교육 담당 고문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대구에서 활동한 기간은 6개월 정도가 전부였다. 결국 대구에서는 많은 일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대구를 이임하면서 처남인 아담스(James E. Adams)에게 대구와 경북지역을 맡겼다. 따라서 아담스가 사실상 대구, 경북지역 복음의 선구자가 되었다.

베어드가 대구에 부임하자마자 서울로 발령을 받게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에게 숨겨진 능력이 특별했기 때문에 대구에서 활동하는 것은 대구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지만, 한국 선교 전체를 위해서는 더 많은 일을 요청받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기독교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그러한 능력과 자격을 갖추고 조선을 찾아왔다. 따라서 그는 훗날 숭실학당(1897), 숭실대학(1906)을 설립하는 등 조선의 교육을 위해서 특별한 은사를 발휘했다. 또한 그의 능력은 1911년 한글 성경 신구약 합본이 완역되어 출판되면서 바로 구성된 구약성경 개역 위원회에 참여하여 1930년 구약성경 중 17권이 그의 손에 의해서 개역되었을 만큼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중요한 일을 감당한 아주 특별한 인물이다.

베어드가 마련한 대구 거점에는 1897년 11월 그의 처남 아담스가 부인(Nellie Dick)과 아들(Edward), 그리고 그의 아내가 해산할 때가 되어서 보모인 체이스(Miss Marie Chase) 등과 함께 부임하면서 실제적인 대구의 선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즉 대구제일교회의 역사를 말하자면 베어드를 호출해야 하는 것은 그가 대구에 부임하면서 마련한 곳에서 대구제일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베어드가 대구에 부임하면서 마련한 부지가 대구, 경북지역 선교 거점이 되었고, 이임한 베어드의 뒤를 이어 1897년 11월에 대구에 새롭게 부임한 아담스는 도착하면서 바로 베어드가 마련해 놓은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곧 대구, 경북지역의 모교회인 대구제일교회의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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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gckorea.org

아담스가 11월, 존슨(Dr. W. O. Johnson, 長仁車) 의료선교사는 12월 25일 부인(Edith Parker)과 함께 대구에 와서 동역을 시작했고, 1899년 5월 1일에는 브루엔(Rev. Henry Munro Bruen)이 대구 주재 선교사로 임명되면서 사실상 선교지부가 될 수 있었고, 이 지역에 대한 선교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많은 경우 지역 교회사에 있어서 쟁점이 되는 것은 그 교회가 언제 출범했는가 하는 기준을 어떻게 동의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깊은 생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때 아담스와 함께 대구에 온 사람이 김재수(훗날 김기원으로 개명)였고, 그는 아담스의 어학 선생이다. 아담스 부인 넬리 딕은 매일 예배를 드렸다고 하며, 주일에는 아담스 가족과 존슨 가족, 그리고 김재수가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대구제일교회로 발전한 초기의 모습이다.

이렇게 시작된 대구제일교회는 사실상 대구와 경북지역의 모교회로 성장하면서 그 역할을 감당해 왔다. 처음 자리한 터에 1908년 예배당을 지었다. 이것이 두 번째 예배당인데, 이 건물은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수들이 단층 한옥 구조로 지으면서 지붕에는 함석을 덮었다. 전형적인 서양교회 예배당 구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함석지붕이 낯설기는 했지만, 새로운 자재와 분위기는 신문물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예배당 정면 중앙에 종탑과 함께 출입구가 있는 건물을 상상할 수 있다.

이 건물은 1931년에 철거되었고, 1933년 벽돌로 지은 예배당이 현재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기에 1937년에 종탑 부분을 5층으로 증축하였다. 이 건물의 종탑은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1937년에 33미터 높이로 따로 세운 것이다. 1969년에는 예배당 내부를 개축했고, 좌석이 부족해지면서 1981년에는 예배당 뒤쪽으로 상당한 부분을 넓히는 공사를 했다. 1989년 대구제일교회는 청라언덕(동산동 234)에 현재 사용하고 있는 새로운 예배당을 지었다. 따라서 1933년에 지은 옛 예배당은 현재 공식적으로는 ‘남성로선교관’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대구제일교회 역사 자료실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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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gckorea.org

대구제일교회는 복음전도만이 아니라 이 지역의 사회, 교육, 의료사업과 계몽을 주도하는 중심에 있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선교지부가 설립된 이래로 청라언덕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의 중심인 YMCA(1914)가 대구제일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대구 YMCA는 3.1 독립만세운동, 물산장려운동, 기독교농촌운동, 신간회 같은 기독교가 중심이 된 민족 계몽과 독립을 위한 단체나 운동의 거점으로 역할했다.

대구, 경북지역의 서양 의료기관이 시작되는 것도 이곳이다. 대구제일교회가 직접 한 일이라기보다는 선교사들이 현재 청라언덕이라고 불리는 이곳에 선교지부를 마련하고, 대구제일교회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전개한 결과물이다. 그것이 현재 동산의료원이다. 아담스 선교사와 우드브리지 존슨(Woodbridge O. Johnson) 선교사가 1899년 대구제일교회 예배당 옆에 있는 초가를 제중원으로 개조해서 진료를 시작한 것이 동산의료원의 시작이었으며 대구, 경북지역의 서양 의료 혜택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제중원을 1903년 현재 의료원 위치로 옮겨서 독립된 병원 건물을 짓고 풍토병, 천연두 같은 전염병 예방에 집중하면서 주민들의 생명을 지켜냈다. 또한 한센 환자들을 치료하는 요양소를 설립해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지켰다.

1899년 제중원으로 시작된 동산의료원은 1911년 동산기독병원으로 개명하고, 1924년 5월부터 병원 내에 간호사 양성소(이것이 후에 계명대학교 간호대학으로 발전)를 설치하여 당장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인 1948년 병원 부속 간호고등학교를 설립했고, 휴전협정 직전인 1953년 6월 6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한국인 목사들이 주선하여 4년제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54년 3월 계명기독학관 설립 인가를 받고 관장에 감부열 선교사가 취임하여 오늘의 계명대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선교사들은 대구제일교회를 중심으로 선교부의 사역을 넓혀갔다.

한편 아담스는 1906년 대구제일교회 경내에 있는 자신의 집을 임시교사로 활용하면서 중등 교육기관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학교를 1908년 대신동에 2층 건물을 지어서 이전하면서 계성중학교를 대구지역 신교육의 새로운 장으로 만들었다. 이 학교에서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박목월과 ‘고향 생각’을 작곡한 현제명, ‘오빠 생각’과 ‘동무 생각’을 작곡한 박태준 같은 이들이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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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gckorea.org

초기 대구선교부에 세 번째로 부임한 브루엔(Martha S. Bruen, 부마태) 선교사는 1902년 대구지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역시 그의 집 게스트 룸에서 가르치기 시작해서 오늘의 신명중고등학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1919년에는 이 학교 이재인 선생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먼저 깨달은 사람들로서 불법, 부당한 식민지를 거부하고, 일본의 잘못을 규탄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렇게 대구제일교회에서 시작하거나 주변에서 시작된 사회, 의료, 교육 사업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하는 근간이 되었다.

여기에 하나 더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당시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내쳐진 사람들을 지나칠 수 없었던 선교사들은 그들을 보듬어 안았다. 바로 한센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이었으며, 이 일을 위해서 애락원이라는 시설을 마련했다. 애락원은 아담스와 존슨(Woodbridge O. Johnson)이 제중원에 10명의 한센 환자를 수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시설을 발전시킨 이는 후에 부임한 플레처(Archibald G. Fletcher) 선교사였다. 그는 1913년 ‘나환자 요양소’를 공식적으로 설립하고, 1916년 현재 애락원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1923년에 새로운 병동을 지어서 한센 환자들을 보살폈다. 당시 한센병은 불치의 병,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병이었기 때문에 감염된 사람들은 일반인들과 같은 공간에 있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한센 환자들을 품어서 치료와 함께 재활할 수 있도록 돌보는 일을 애락원이 감당한 것이다.

전국에 걸친 현상이기는 했지만, 지역에 설립된 선교부와 그 중심에 있는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먼저 깬 사람들로서 식민지 국민의 신분으로 탄압을 받는 것에 대한 저항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제일교회와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들도 다르지 않았다. 대구지역의 3.1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는 이들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중에서도 한국 교회사에서 기억해야 하는 특별한 이가 있다. 이만집 목사이다. 한국 교회사 서술에 있어서 자치교(自治敎)를 주장하면서 주류 교회(교단)에서 이탈한 정도로 표현되고 마는 형편이지만, 적어도 대구지역에서 그의 역할은 분명하게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1876년에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아담스를 만나 대구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1909년에 대구 남성교회에서 장로가 되었고, 1912년에 평양신학교 입학하여 1917년에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그해 9월 남산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했다. 그 어간 대구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성학교의 한문 선생으로 활동하는 중에 소명을 확인한 그는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 목사 임직 전에는 헨리 브루엔 선교사의 조사로 사역하면서 남산교회에서 섬기기도 했다.

목사가 된 이만집은 대구제일교회에서 대구 YMCA를 결성하는 데 중심에 있었고, 1918년 자신이 시무하게 된 남산교회에 그 사무실을 두게 하면서 대구 경북지역의 청년운동과 청년 대상 전도에 힘을 썼다. 그러던 차에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갈 때 3월 8일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을 독려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대구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된 그는 3년 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고, 출옥한 이후 1923년 선교사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자치교회를 선언하여 독립된 교회를 만들었다. [복음기도신문]

글 이종전 |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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