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시킨 결과”
“증오 멈추자” 촉구에도 일각선 “정치전쟁 시작하겠다”며 대립 예고
15일(현지시간) 발생한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에 대한 암살 시도는 슬로바키아 정치권이 화해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분열돼 사실상 ‘내전’ 상태에 들어섰음을 방증하는 사건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슬로바키아 정치권에서는 사건 직후부터 “정치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등 정국 혼란이 쉽사리 안정되지 않을 조짐이 보이고 있다.
지난해 10월 4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한 피초 총리는 이날 작가로 알려진 남성이 쏜 총을 여러 발 맞고 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용의자는 ‘정치적 동기’로 암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슬로바키아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총격에 쓰러지자 정치권에서는 곧바로 이 사건을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와 연결 지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와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등에 따르면, 주자나 카푸토바 슬로바키아 대통령은 “우리가 목격하는 증오적 수사는 증오적 행위로 이어진다”면서 상대 정치인을 적대시하는 독설을 중단하자고 촉구했다.
마투스 수타이 에스토크 슬로바키아 내무장관도 “대중, 언론인, 그리고 모든 정치인에게 증오 퍼트리기를 중단할 것을 호소하고 싶다”며 “우리는 내전 직전이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피초 총리와 연정을 구성한 국민당의 안드레이 단코 대표는 야당을 향해 “만족하느냐”며 “정치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피초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스메르)의 루보스 블라하 의원은 “총리가 오늘 당신들의 증오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며 야권을 비난했다.
슬로바키아 전 외무부 고문 니치는 슬로바키아에서는 정치인에 대한 살해 위협이 빈번하다면서 “총리 총격은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슬로바키아는 유럽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국가 중 하나로, 정치인들의 생명이 자주 위협받는다”고 전했다.
슬로바키아는 1989년 동유럽에 확산한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공산정권이 붕괴한 후 내내 정치 분열을 겪어왔다.
다만, 정치적 내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갈등이 격화한 것은 6년 전인 2018년 피초 총리가 속한 사회민주당과 범죄조직과의 유착 의혹을 취재하던 잔 쿠치악 기자가 약혼녀와 함께 피살되면서부터라고 폴리티코는 지적했다.
정치권의 부패 의혹과 관련한 보도를 막으려 청부살인을 저지른 이 사건은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그 여파로 피초 총리는 사임했다.
이후 피초 총리와 내각 장관들, 하원의원, 판사, 고위경찰 등 정치적 동지들은 뇌물, 권력남용 등 다양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피초 총리는 작년 9월 강력한 반이민 정책 등을 내세워 총선에서 승리했고 자신을 기소한 경찰 지도부를 제거하는 등 ‘보복’에 나섰다.
피초 정권은 정부를 비난하는 언론을 비난하며 공영 TV와 라디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또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안을 폐기하고 대러시아 제재를 종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주의 및 친EU 단체들과 갈등을 빚었다.
이밖에 외국에서 지원받는 비정부기구(NGO)를 외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관으로 간주해 ‘외국 대리인’으로 분류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부패 처벌을 완화하는 형법 개정안을 내기도 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피초 총리는 이웃한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처럼 성소수자( LGBTQ+) 권리, 성 문제, 이민자에 대한 분열을 (정치에) 이용했다”며 “이런 전략은 유럽연합(EU)에 가입한 지 20년이 지난 현재 슬로바키아가 그 어느 때보다 양극화되게 했다”고 분석했다.
중요 이슈를 놓고 정치권이 크게 맞붙으면서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는 최근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매주 열리는 등 정치적 갈등이 강하게 표출돼 왔고, 결국 이날 피초 총리 암살 시도까지 발생했다.
AFP 통신에 따르면, 71세의 용의자는 ‘폭력 반대 운동’이라는 정치단체를 설립한 이력이 있고, 8년 전에 남긴 동영상에서는 이민과 증오, 극단주의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면서 “유럽 정부는 이 혼란에 대한 대안이 없다”고 발언했다.
피터 지가 슬로바키아 의회 부의장은 이번 사건은 “사회를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시킨 결과”라고 말했다.
피초 총리의 최측근인 로버트 칼리낙 국방장관은 “오늘 일어난 일은 극복할 수 없는 상처로, 수년 동안 우리를 괴롭힐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합뉴스]
위 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 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