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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식에서 우리를 지켜주소서” 낯선 음식 앞에서 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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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파른 산을 넘어 남짜미 마을에 식료품을 배달하는 사람들의 모습(위, 출처: namtramy.gov.vn 캡처)과 남짜미 마을 사람들의 모습(아래, 출처: Nhom cu chien hoa huong duong 캡처). 베트남 전통모자인 ‘논라’

베트남 선교 열전(2) – 베트남전쟁 전후시기 선교 이야기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베트남에 입국한 찰리, 에그롱 선교사 부부가 전쟁을 거치며 어떻게 이 땅에 정착하며 복음을 전했는지, 또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베트남의 현대사가 대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이들의 회고록 ‘베트남에 사랑을 담아’(To vietnam with Love)의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번역은 익명을 희망한 L선교사의 도움을 받았다. <편집자>

1950년대, 베트남 북쪽이 접근 금지 지역이 되고 남쪽은 전쟁의 위험이 있었지만 선교사들은 하나님이 열어주신 기회로 여기고 입국하기 시작했다. 당시 베트남에는 많은 인구가 사이공(현 호찌민) 아래 비옥한 메콩강 평야 지대에 거주했다. 내륙 쪽으로는 복음을 들어야 할 다양한 소수부족들이 120만 명 정도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선교사들은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소수 종족들을 찾아갔지만 언어장벽으로 소통은 어려웠다. 소수종족들은 대부분 부족언어나 방언을 사용하고, 극히 소수만이 베트남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베트남 선교가 시작된 이후, 초기 선교사들이 종족언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언어 장벽을 돌파한 CMA 선교사들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곳에 몰려들었다.

베트남, 그리고 정글의 소수부족

1960년. 나는 베트남인 록 목사와 브루(Bru)족 안내인 몇몇과 함께 베트남 북쪽으로 올라가 다시 서쪽으로 라오스 국경 쪽에 있는 브루족(인구 6만여 명의 소수종족) 마을을 찾아 들어갔다. 묵직한 가방을 짊어지고 3m를 훌쩍 넘는 풀숲 길을 걸어야 하는 여정은 정말 힘이 들었다. 또 어떤 지역은 호랑이가 출몰한다고 알려져, 우리 일행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길을 걸어갈 때는 안내인 아쮸가 인도하고 록 목사와 건장한 조지 선교사가 뒤따랐다. 그들은 베트남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큰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해 의기소침한 기분으로 제일 뒤에 따라가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에서 부족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9월 초부터 시작된 태풍으로 인해 더 이상의 여행은 어려웠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은 산 속의 사람들의 삶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첫 아들 나단이 1958년 11월 14일 다낭에서 100km 떨어진 ‘후에’의 작은 병원에서 태어났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큰 쥐와 바퀴벌레가 득시글거리는 병원을 빠져나와 숙소 침대의 모기장으로 옮겨야 했다. 외국 세력의 베트남 진입에 반발하여 월맹이 움직인다는 소식이 들렸다. 불안한 마음은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베트남 교회 식구들과 운동을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월맹이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 군을 무리친 후, 외곽에서 게릴라가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1959년 1월 15일 북월남에서 월맹이 개혁안을 발표하고 정치적 투쟁에서 무력투쟁으로 돌입한다고 선언했다. 그것이 두 번째 베트남 전쟁의 서곡이었다. 1959년 말, 우리가 운영하던 베트남어 교습 과정이 문을 닫고 선교사들끼리 긴밀한 비상 연락 체계가 구축되었다. 우리가 서로 흩어지고 연락이 안 되는 것은 바로 불행을 의미하였다.

전쟁의 기운과 함께 부족마을로 이주

우리 가족은 선교부의 결정으로 다낭에서 남서쪽으로 100km에 위치한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인 짜미 마을로 배치됐다. 짜미 마을로 가는 길은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였는데, 한쪽에는 오두막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삼각 밀짚 모자 ‘논라’를 쓰고 어깨에 대나무 막대를 지고, 막대 양쪽 끝에는 무거운 짐을 매달고 있었다. 짜미 마을에 도착하기 전, 도중에 있는 꿰선에는 많은 교회가 있었다. 짜미에서 6km 떨어진 곳의 사역자 부부는 우리가 그 지역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듣고 반가워했다.

우리 보금자리는 산꼭대기에 있었다. 큰 방 하나만 달랑 있었는데, 천장이 없어서 서까래와 지붕을 얹은 볏단이 밖에서도 그대로 보였다. 그러나 짜미에서 처음 맞는 석양은 너무 아름다웠다. 마치 짜미에 들어선 우리 가족을 환영해주시는 하나님의 환영식 같았다. 수년간 선교부의 재산인 집을 관리하는 숭과 그의 부인도 우리를 보자마자 너무 기뻐 춤을 추었다. 숭은 우리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디저트로 나온 것은 오리피로 덮인 쌀 과자였다. 나는 얼굴과 입이 이 음식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그것을 먹으면서 기도했다.

“주님! 이 음식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이 음식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아멘.” 정말 그 순간 간절하게 기도했다. <계속>

[GN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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