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름에 교회 이탈(dechurching)이라는 말이 들어있지만, 탈기독교시대 교회(The Great Dechurching)는 놀라울 정도로 낙관적인 어조로 쓰인 책이다. 저자인 짐 데이비스와 마이클 그레이엄이 갖고 있는 소망은 지난 25년 동안 교회를 떠난 4천만 명 중 대다수(51%)가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낙관론에서 비롯한다.
그 51퍼센트는 나름 참작할 만한 상황 때문에 교회를 떠난 “일상적” 이탈자로 볼 수 있다.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22퍼센트는 새로운 공동체로 이사했기 때문에 떠났고, 16퍼센트는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불편”해서, 그리고 15퍼센트는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 출석이라는 습관”을 벗어던진 경우이다. 결국 종합할 때, 한때 신앙에 헌신했던 복음주의 교인의 53퍼센트가 평범한 이유로 교회 출석을 중단했다.)
하지만 무심코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새로운 복음주의를 꿈꾸게 하는 소망인 동시에 과거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평생 자유주의 주류 교회의 교인이었던 딘 켈리는 1973년에 발간한 Why Conservative Churches Are Growing(왜 보수 교회는 성장하는가)에서 보수 교회가 사람들에게 “고차원적 (large-scale)”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교회보다 더 많이 성장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수준의 의미는 삶을 인도하고 죽음까지도 이겨내도록 한다. 보수 교회는 사람들이 자신감과 소망을 가지고 고통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하는 우주적 진리를 선포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주장하는 초자연주의를 부끄럽게 생각한 주류 교회는 진짜 위로를 제공하는 핵심 교리(부활 등)를 일반적인 도덕주의와 정의에 대한 권고로 대체했다. 켈리에 따르면 이것은 운명적인 변화였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얼마든지 “도덕적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의 메시지와 주변 문화의 목소리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하품과 함께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다.
켈리가 발견한 사실은 단순하다. 종교 공동체의 회복력은 그 공동체 외부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우주적 목적”에 따라 살도록 성도를 준비시키는 만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켈리의 통찰력과 탈기독교시대 교회를 결합할 때, 지금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과연 교인들에게 교회 밖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고차원적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별생각 없이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경우, 그건 자신들의 삶을 인도할 대안이 되는 진리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전혀 거부하지 않는다. 단지 냉담하고 무관심할 뿐이다.
우리 시대 영적 질병: 무관심
우체 아니조르(Uche Anizor)는 Overcoming Apathy(무관심 극복하기)에서 현대인들은 “우리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들에는 미지근하다”라고 주장한다. 무관심이 반드시 하루 종일 이어지는 방황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다. 아니조르는 수도승인 존 캐시안(John Cassian)의 말을 인용하여 무관심은 “가장 중요한 의무를 제외한 모든 것을 추구하도록 유혹하는 불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문화가 얼마나 무관심에 깊이 빠져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니조르는 시트콤 Seinfeld를 사례로 든다. 아니조르 역시 90년대 시트콤의 팬이었지만, 이 시트콤은 “크고 의미 있는 일(예: 결혼, 가족, 종교, 사회적 관심, 심지어 홀로코스트)에 대한 무관심과 삶의 일상적인 사소한 일(예: 좋은 주차 공간, ‘옆에서 시끄럽게 하는 사람’이 주는 성가심, 오락기에서 높은 점수 받기)에 집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우리는 오늘날 중요하지 않은 것만 중요하게 여기는 사인필드 사회의 시민이다.”
사인필드 사회에서 관심의 대상은 내용이 아니라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이다. 뻔한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대상을 더 우선시하는 능력을 점점 상실해 가는 우리는 조만간 그 차이조차 분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켈리의 언어를 빌리자면, 무관심한 문화가 양산하는 시민은 고차원적인 의미에서는 조금도 활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여행 축구, 골프, 오락기가 주된 관심사가 되고 전능하신 주님은 이제 부차적인 주제로 전락한다.
영적 무관심이 교회를 침범하는 지금, 교회 지도자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의 제자도 실천이 과연 주변에 만연한 무의미함이라는 독소로부터 성도들을 제대로 예방하고 있는가이다. 수백만 명이 교회 출석을 중단했다는 사실은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에게 지금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치료제: 예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잔소리가 아니다. 데이비스와 그레이엄의 연구에 따르면,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는 가톨릭이나 주류 교회의 교회 이탈 교인들에 비해서 정통 교리를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의 신앙은 아직도 교회에 다니는 복음주의자의 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에게 부족한 건 교리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역시나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다.
즉, 무관심은 부족한 지식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게 과연 진리인가에 대한 확신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팀 켈러는 설교에서 초기 목회 시절 버지니아 시골에서 상담했던 한 어린 소녀에 관해서 들려준다. 그녀는 영적으로 퍽 우울한 상태였는데, 켈러는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 즉 어떻게 그녀를 용서하셨고, 당신의 피로 그녀를 사셨으며, 또 그녀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확증하셨는지 일깨워 줌으로써 그녀를 격려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예, 목사님, 그거 다 알아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고 또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거, 다 압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나한테 관심 있는 남자애가 하나도 없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요?”
켈러는 그녀의 영적 곤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학교에서 잘생긴 남학생이 주는 관심 또는 무관심이 그녀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훨씬 더 큰 위로와 격려였고, 더 중요한 기쁨의 원천이자 자기 가치를 느끼게 하는 원천이었다.”
그 소녀에게 부족한 것은 복음이 그녀를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게 더 아름답게 만드는지에 대한 감각적 인식이었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알고 있는 신앙 교리를 마음의 갈망과 연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연결은 오로지 예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일 예배, 주중 소그룹, 매일의 묵상 등 다양한 예배를 통해 우리는 믿음의 진리를 깊이 생각하고 또 마음에 새긴다.
무심코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회복하려면 그들을 맞아들이기 위한 “정문”을 여는 건 당연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다시 새어나가지 않도록 “뒷문”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삶의 모든 초점을 우리 가운데 계신 거룩하신 분에게 맞춰야 한다.
기독교를 사람들의 입맛에 더 맞게 맞추려고 노력했던 20세기 주류 교회의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들처럼 기준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 교회 이탈 경향을 뒤집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날 만연한 무관심 문화로 인해 죽은 영혼을 살리는 대응적 실천을 오히려 두 배로 늘려야 한다.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복음으로 인해서 더 큰 만족을 맛볼 것이다. 복음만이 제공하는 고차원적 의미만이 이 시대를 바꿀 수 있다. 우리의 왕이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Why Discipleship Must Target Apathy
글렌 위쉬뉴 Glenn Wishnew | 글렌 위쉬뉴(M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는 North Star Classical Christian School의 교사이며, Lakelight Institute의 associate director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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