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이아침 칼럼]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처럼 사랑하라

사진: Joshua-Hoehne on Unsplash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까? 그런데 사실, 그것만큼 쉬운 것은 없습니다. 정말 주님을 만나고 보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헛 믿었고, 예수님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예수님같이 사랑하는 것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노력해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성도에게 사역 한 번 시키려면 온갖 비위를 다 맞추어야 하고, 목사님들이 기도도 세게 해야 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요 12:24, 13:34~35) 말씀을 듣는데 제 마음에 하늘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사랑은 없습니다. 그런 사랑이 있다면 불법입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사랑은 자기 의가 남습니다. 자식을 사랑할 때, 그동안 얼마나 애썼습니까? 뼈가 다 상했습니다. 재정도 다 털렸습니다. 알고 보니 자녀가 괴물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먼저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먼저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만큼 놀라운 은혜가 임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믿음의 관점에서 그것처럼 쉽고 명쾌하고 강력하고, 기쁘고 능력 있고 새 희망이 임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저에게는 너무나 쉽고 강력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나서 자식을 보면 달라집니다. 사랑이 됩니다. 여러분을 봐도 괜찮게 보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크기가 천차만별인데도 그렇습니다. 너무나 신비합니다. 벌레 같은,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인생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견디려고 했으니 뼈가 상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까지는 봐줍니다. 그런데 교우 중에 못된 사람이 있으면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스푼으로 떠내서 내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게 되면 떠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마음이 동동거리고 옳고 그름에 민감한 이유는 사랑을 먼저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집과 성을 세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하지 않은 것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고 자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사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공동체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사역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목사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부가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이 실제 된다는 것은 주님이 하셔야 한다는 믿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깊이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일이 있게 되면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까요?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 127:2)

잠을 주십니다. 머리를 대자마자 코 골고, 눕자마자 잠드는 것은 피곤해서도 그렇지만 건강이 안 좋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면 잠을 주신다는 말씀을 보면, 잠이 선물입니다. 허망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잠을 주신다는 말씀이 어떤 뜻일까요?

‘어른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속담과 같은 말입니다.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는 뜻입니다. 목사님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통닭 생긴다는 것을 토브원형학교 아이들은 압니다. 사역팀이 축하 노래 하나 해주면 좋은 일정이 생긴다는 것을 압니다. 남편이 아내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용돈이 올라갑니다.

하나님 말 잘 듣는다는 것은, 내가 죽었고 하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언가 역사하신다는 것은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에게 잠을 주신다는 뜻은 그런 뜻입니다. 일하시는 주님을 따라갑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영광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열정과 바람이 아니라, 주님을 바란다고 소원하는 믿음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떡이 어떤 내용인지 3절부터 5절까지 나옵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시 127:3~5)

자녀에 대해 생물학적 관점으로 축복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물학적 관계로 형성된 자녀를 뜻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습니다. 염려가 들어올 때 죽고, 희망과 포부가 죽고, 하나님만 보이는 때 하나님께서 떡을 주십니다. 나에게 떡을 주십니다. 하나님께는 우리에게 주실 만한 떡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는 중에도 떡이 생기게 하십니다.

나로부터만 생기는 대표적인 상징은 자녀입니다. 제 딸은 저희 부부로부터만 나옵니다. 사위는 나로부터는 나오지 않습니다. 피붙이는 나로부터만 나옵니다. 곧, 생물학적 관점의 자녀가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고유한 뜻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고유한 계획이 있는데 주님이 세우시면 그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 싶은 것을 받는 믿음의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차선을 받든지, 아니면 차차선을 받든지, 아니 그것도 아니고 부스러기 정도를 받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시고 싶으신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것은, 저주의 산물인 수고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실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만 이루고 싶으신 것이 많으십니다. 여러분, 무엇이 이루어졌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 싶으신 것이 있는데 과연 무엇이 이루어졌습니까?

그것이 이것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그 증인됨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먼저 수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슬픔의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생각과 에너지를 주님께 올려드리고, 우리 마음으로는 안 되니까 일천번 죽어서라도, 그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기어이 하나님의 세우심을 보고야 말겠다는 믿음을 쓰는 것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8)

신약에 나오는 이 ‘수고’라는 단어도 헬라어로 보면 ‘코포스’입니다. ‘고통과 상처를 수반한 열심’입니다. 구약과 같은 뜻입니다.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 바란다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9)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능력, 손길을 따라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8)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은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오면, 실제 그것을 알 수 있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 수고가 증거입니다. “여러분, 사역을 할 때 힘들어요. 안 힘들어요?” 보통은 힘들다고 말합니다. 어렵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저에게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심리적인 어려움, 영적인 어려움, 어려운 사람을 바라보는 어려움.

그런데 이 사역에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오니 진심이 됩니다.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압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지 압니다. 사역이 진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리창 하나를 닦아도 진심으로 합니다. 정말입니다. 교우들을 만날 때도 예전과 달라집니다. 일부 교우를 빼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임하기 원하는 진심이 힘든 일 속에서도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힘이 보충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런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예수와 함께 죽고, 번제단에서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주님의 세우심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 진심이 전심이 되기까지 부분적으로 만나는 모든 사역과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가운데 누군가 잘못을 하면 마음이 어긋나지만 결국 용납합니다. 왜 잘못했냐고 가르칠 수는 있지만 떼어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에 그 진심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 진심은 헛되지 않습니다. 함께 살고, 함께 기뻐하는 그 영광이 교회 가운데 가득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필로그

우리는 살아갈 때, 수고를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성취하려고 수고를 사용합니다. 극복하고 막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 수고에 비례해 열매를 맺으면 성공이라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수고는 수단이 아니라 타락의 결과였고 저주의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수고가 먼저가 아닙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됩니다. 주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일천번제 제사를 통하여! 주님께 돌아가 주님이 하심을 보고 기뻐하는 놀라운 은혜가 가득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제보 및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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