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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칼뱅: 고군분투하는 목회자의 가장 좋은 친구

▲ 존 칼빈과 종교개혁 사진 : 유튜브 채널 Discerning History 영상 캡처
우리는 칼뱅을 사역에 수반되는 다양한 시련과 현대 목회 사역에 관한 심오한 자원을 제공하는 인물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깊이 있는 성경 주석 및 확고한 개혁주의 신학과 관련해서야 많은 목회자가 장 칼뱅을 의지하겠지만, 장로들의 해임 투표 또는 주일 설교 몇 시간 후에 날아올지 모르는 무서운 내용을 담은 이메일과 관련해서도 칼뱅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학 면에서 칼뱅을 친구 또는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칼뱅은 단지 위대한 신학자일 뿐, 사역에서 만나는 영적 전쟁과 고통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목회하는 내내 반대에 직면했고, 죽기 고작 5년 전까지 제네바 시민도 되지 못했다. 칼뱅이 위대한 신학자였음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는 동포에게서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사역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 못하고 수많은 반대 속에서 고군분투한 목회자이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면, 목회 기간 내내 칼뱅이 사역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독특한 고난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뱅을 사역에 수반되는 다양한 시련과 현대 목회 사역에 관한 심오한 자원을 제공하는 인물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가장 많은 고난을 받는 사람

칼뱅에게 목회자는 핵심 훈련자(EIC. edifier-in-chief), 즉 교회를 세우는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하는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훈련자로서 이 목회자는 또한 가장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sufferer-in-chief)이기도 했다. C. S. 루이스가 쓴 마법사의 조카(The Magician’s Nephew)에서 아슬란은 좋은 왕을 “전쟁에서 돌격할 때 가장 먼저 나가고, 퇴각할 때 가장 늦게 나오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칼뱅의 눈에 그리스도인은 흑암에 거하는 영적인 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는 존재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그 전쟁에서 가장 먼저 돌격하고 가장 늦게 퇴각해야 한다. EIC로서 목회자는 당연히 가장 많은 고통을 받는다.

칼뱅이 생각하는 목회 속 영적 전쟁을 구성하는 두 가지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목회자는 직분에 필요한 다양한 은사라는, 그리스도가 입혀주신 “갑옷”으로 무장되어 있다. 둘째, 목회자는 하나님의 군대의 군기를 든 “기수”의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을 앞에서 인도하는 그들은 마귀의 가장 맹렬한 공격을 받기 마련이다.

‘무장’으로서의 목회 은사

칼뱅은 사역을 위해 목회자에게 필요한 은사를 전투를 위한 무장으로 묘사했다. 그는 목사의 은사와 건전한 교리는 안수 전에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높은 직분을 주시기로 예비하신 사람들의 경우, 주님은 먼저 그들에게 직무를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무기를 먼저 공급하신다. 결코 그들이 빈손으로, 또 준비 없이 오도록 하지 않으신다.”

목사의 영적 은사는 그의 손에 들린 무기이다. 사역 준비는 바로 전쟁 준비이다. 따라서 어떤 목회 후보자도 필수 무기를 갖추지 않는 한, 결코 사역 현장에 들어서서는 안 된다. 목회 은사를 무장으로 설명한 후, 칼뱅은 이것을 주님 자신이 행하신 하나의 패턴이라고 말했다. “사도를 파송할 때 주님은 반드시 꼭 필요한 무기와 도구를 먼저 제공하셨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칼뱅은 성령이 주신 말의 은사(gifts of speech)를 담고 있는 세 구절을 인용했다(눅 21:15; 24:49; 행 1:8). 즉 목사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은사를 행사하고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사실상 전쟁을 수행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령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은사는 목회 사역에 참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조건”이다.

‘기수’로서의 목회자

복음 전파를 거스르는 사탄과 싸우기에 목회자는 무장해야 한다. 고린도후서 10:3-4에 대한 칼뱅의 주석은 교화, 전쟁으로서의 사역, 그리고 목회적 고난이라는 주제를 모두 모아서 목회자라면 왜 필연적으로 고난을 겪는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보여준다. “전쟁의 무기”라는 구절에 대한 칼뱅의 주석은 길지만 인용할 가치가 있다.

실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원한 전쟁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자신을 바친 사람이라면 사탄과의 휴전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따라서 사탄이 가하는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앞서 그리스도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나아가는 사람은 말씀을 전하는 목사이다. 목사는 당연히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사탄의 괴롭힘을 당하고, 더 무시무시한 공격을 받는다. 하나의 고난이 끝나면 여지없이 다른 공격이 시작하곤 한다. … 복음이 사탄으로 하여금 진노케 하는 불과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적 전투가 진행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무장을 의지하지 않고는 도무지 이런 싸움을 감당할 수 없다.

칼뱅은 복음 사역을 전쟁으로 묘사했다. 전쟁은 사역에 대한 “적절한 비유”이다. 구절 말미에서 그는 복음 사역이 전쟁인 이유를 설명했다. 그건 복음은 사탄의 분노에 “불을 붙이기” 때문이다.

칼뱅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향한 사탄의 활동에 대해 자주 썼지만, 여기서 그가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신실한 사역자를 통해 이뤄지는 복음 전파를 향한 사탄의 분노이다. 목회라는 소명의 핵심인 복음을 통한 양육 사역은 복음 사업이 발전하는 것을 볼 때마다, 즉 신실한 목사가 제대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볼 때마다, 새롭게 “전쟁을 위해 무장하는” 사탄을 화나게 한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탄의 공격을 겪을지라도, 목사는 특별히 사탄의 목표물이 된다. 그건 다름 아니라 목사가 교회의 “기수”이기 때문이다.

중세와 전근대 전쟁에서 기수는 군부대마다 가진 독특한 깃발을 들고 전투를 지휘하는 군인이었다. 분명히 칼뱅은 기수를 부대의 지도자이자 적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표적으로 이해했다. 부대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있기에 기수는 특히 더 적에게 쉽게 노출됐다. 더불어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불명예를 안겨준다는 데에는 적의 깃발을 뺏는 것보다 좋은 길이 없었기에, 기수는 자연스럽게 가장 중요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

바로 이런 이미지를 활용해서 칼뱅은 목회자를 교회의 깃발로 복음을 높이 들고 복음 전파를 위해 신실한 마음으로 전진하는, 사탄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지도자로 지정했다. 바로 이런 막중한 특권 때문에 목회자는 사탄의 공격을 가장 자주 받는 표적이 된다. 왜냐하면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그리스도에게 불명예를 안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지도자를 파괴하는 것임을 사탄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칼뱅이 단지 고통에 관한 경고만 주고 그친 건 아니었다. 그는 고통을 대비하고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흥미롭게도 이 권고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만나는 시련과 관련해 그가 신자에게 준 권고와 확실하게 구분된다.

용기와 준비

고난 받는 성도에게 칼뱅은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라고 권고한 것에 반해서, 목회자를 향한 그의 권고는 고난에 능동적으로 대비하고 자신의 직분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과감성을 갖추고 있는지 깊이 생각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칼뱅은 지도자(elders)의 전제 조건으로 죽기까지 교리를 고수하겠다는 “변하지 않는 담대함”을 꼽았다. 앞서 인용한 고린도후서 10:3-4에 대한 칼뱅의 주석에서, 그는 또한 주장하기를 목사라면 “전쟁에서 용기와 담대함을 갖고 나아가야 하는데, 그 길 외에는 전쟁에서 싸우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끊임없는 영적 싸움이 사역의 현실이기에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감당할 수 있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사역은 항상 어려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기 마련이고, 그러한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정직한 평가는 사역자로서의 소명의 진위를 검토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마음을 그리스도께 맞추기

목회자라면 신실한 사역에 따르는 고난을 생각하는 동시에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지금 주시는 사랑에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둘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전서 5:4에 대한 주석에서 칼뱅은 사역에 따라오는 다양한 낙담과 어려움을 열거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그를 위한 유일한 치료법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눈을 오로지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목회자에게 큰 보상을 가져다줄 것이며,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충성하는 그의 수고에 큰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칼뱅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이라고 말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랑에도 눈을 맞추라고 권고했다.

요한복음 20장에 대한 주석에서 칼뱅은 목회자가 사람의 인정만 바란다면 결코 신실하게 섬길 수 없음을 증명한 후에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지 않는 한, 그게 어느 정도를 말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자기를 잊어버리고 온전히 그리스도께만 헌신함으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므로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한, 그 누구도 이 직분을 끝까지 인내하며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는 목회자는 사람이 주는 위안과 명성까지도 잊을 수 있다. 대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구하는 위안과 명성을 앗아가는 목회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한다.

칼뱅의 도움을 받자

고군분투하는 목회자에게 칼뱅은 소중한 자원이다. 그가 보여주는 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문화가 제공하는 리더십은 인기가 없다. 인기가 없거나 반대자가 많은 지도자는 뭔가 잘못하고 있거나, 또는 자리를 잘못 잡아서라고 가정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칼뱅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옳은 일을 하는 목회자는 같은 장소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힘들고 인기가 없어도 신실하게 목회 현장에서 인내를 가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목회자에게 칼뱅의 목소리는 실로 듣기 힘든 칭찬의 목소리이다.

추가로, 칼뱅은 개인적인 부드러움과 확신에 찬 용기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지키는 것은 목회자가 신실함을 유지하는 데에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제대로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용기를 발휘하되 또한 동시에 교인을 향한 친절함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겪으라는 칼뱅의 훈계는 오늘날 수많은 목회 리더십의 병을 고치는 치료제가 될 것이다. 현재의 도전은 말할 것도 없고 다가오는 미래의 복음주의 지도자가 직면할 상황까지 고려할 때, 고난의 길을 용감하게 또 동시에 부드럽게 견디라는 칼뱅의 균형 잡힌 권고가 지금보다 더 적절하게 다가올 수는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극적인 아이러니가 없다. 냉혹하고 상아탑 속 이론가로 가장 자주 희화화되는 신학자가 정작 곤경에 처하고 낙담한 목사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상담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당신에게 칼뱅이 단지 훌륭한 신학적 자료로만 남지 않도록 하라. 사방에서 조여 오는 압박에 괴로울 때도 신실하고자 발버둥 치는 당신이라면, 지금 칼뱅이 내미는 손을 잡고 그의 도움과 인도를 받길 바란다. [복음기도신문]

Editor’s note: 이 글은 Leland Brown, “The Standard-Bearer: Pastoral Suffering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Themelios 47, no. 2 (August 2022)을 간추린 글입니다.

원제 : John Calvin: The Struggling Pastor’s Best Friend

리랜드 브라운 Leland Brown | 리랜드 브라운은 East Cooper Baptist Church(Mount Pleasant, South Carolina)의 목사이며,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박사과정생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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