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여 년 만에 룽기 공항으로 향하는 길.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길과 맞닿아있는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선명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밤하늘의 별을 보고 울고 말았다.
여전히 가난하고, 아프고, 고통받는, 흑암 가운데 놓인 시에라리온을 포기하지 않고 지키고 비추고 계시는 하나님의 빛나는 사랑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움과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뒤범벅된 마음을 하나님의 소망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공항의 직원들은 여전히 팁을 요구하고 불친절하지만, 이것 역시 이 땅에 복음이 심어지고 들려진다면 달라질 것 같아서 소망이 되었다. 미처 현금을 준비하지 못해 팁을 줄 수 없어서 미안했다.
‘만약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팁을 꼭 주겠노라.’라는 나의 진심을 직원은 믿지 않았다.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나의 말에는 어리둥절한 표정까지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기도해 드려도 될까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총 든 군인이 옆에 있어서 미소로 대신해야 했다.
그렇게 시에라리온을 떠난 지 30여 시간이 지나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일 년 전 2만 5천여 명이었던 코로나 확진자가 10만 명을 가뿐히 넘었다. 코로나 청정지역에서 마스크 없이 살다가 온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코로나 위험 지역인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덕에 도착 첫날은 국가에서 얻어주는 호텔에 묵었다.
호텔 방 창 너머로 보이는 네온사인 휘황찬란한 고층 건물들과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수많은 차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비현실 같았다. 도마뱀이나 날벌레가 대신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는 방. 따뜻한 물이 나오는 욕조 딸린 욕실. 끊기지 않는 인터넷. 이 모든 것이 꿈속 같았다.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나라. 본래 나의 자리에 돌아왔는데, 마치 딴 세상에 온 같아 다시 시에라리온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 아낌없는 기도와 후원과 관심으로 함께 했던 공동체 지체들과 딸에게 무사히 귀국했음을 알렸다.
감사하게도 많은 이들이 격리 중인 나에게 배달 음식을 보내오고 과일, 고기를 보내주었으며, 고생하고 돌아왔으니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헌금을 보내주기도 했다. 내가 무슨 고생을 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고생한 것이 없어 헌금과 선물을 받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존재 자체로 영광이 된다는 말씀이 기억나 감사함으로 누리기로 했다.
한국에 도착하기만 하면 금세 적응할 줄 알았는데, 오롯이 혼자 있어야 하는 보름의 격리 기간 때문인지 나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시에라리온에 있는 것 같았다. 한국에 도착한 지 열흘이 넘었는데도 일어나자마자 습관처럼 모기장을 걷어내려 하고 침대 밑의 실내화를 찾는다.
한국에 오면 먹고 싶은 게 그렇게 많았는데 막상 먹으려고 하면 사거리 시장 입구에서 사 먹었던 카사바구이가, 비 오는 날 먹었던 옥수수가, 손으로 주물러 먹었던 아이들이 따다 준 망고가, 천 원짜리 빵과 김 빠지고 미지근한 애플 시다가 생각이 났다. 보고 싶은 영화나 드라마도 많았는데 막상 보려고 하면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고, 인터넷이 빵빵 터져서 할 것도 많을 것 같은데, 모든 게 심드렁, 흥미가 없었다.
없어진 건 입맛과 흥미뿐 아니었다. 생각도 감정도 없어진 것 같았다. 한국에 도착하면 아이들이 보고 싶어 매일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막상 사진을 보고 있자니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는데 뭐’라는 근거 없는 착각에 가슴 절절한 그리움도 생기지 않았다.
한동안 생각과 감정 없이 나사 두셋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지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루, 하루를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의미하게 보내면 안 되는데 싶어 나를 다독이며 힘을 내보려고 했지만, 무엇을 해야 하지? 앞이 막막했다.
그러다가 한국에 도착 후 처음으로 온라인으로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그제야 갑자기 그리움이 쓰나미처럼 나를 덮쳤다. 다시 그곳으로 가서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춤추고 경배했던 다윗처럼 그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싶었다.
아이들과 인형극을 올리고 싶었다.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멜로디언, 아코디언, 실로폰. 트라이앵글만으로도 충분한 어린이 음악 밴드도 만들고 싶었고, 한글도 더 잘 가르쳐주고 싶었다. 교재를 만들어서 제자 훈련도 하고 싶었고, 아이들과 함께 더 먼 곳으로 마을 전도를 나가고 싶었다.
아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사역이나 일이 아닌, 어떻게 해서든 사랑이 하고 싶었다.
사랑해야지. 그런 의무감이 아닌, 정말 사랑이 간절해졌다. 사랑이 꿈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의 꿈은 작가가 되는 거였다. 그 꿈에 맞춰 나의 버킷리스트는 작성되었다. 딸아이가 서른이 되면 함께 유럽여행하기.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통해서 하신 일들을 기록한 간증집과 미혼 엄마로 살아온 육아일기 집필하기. 뮤지컬 공연하기. 방송을 타지 못하고 나의 노트북에만 저장된 나의 대본집 만들기 …. 등의 버킷리스트들이 이젠 더는 버킷리스트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사랑 외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버킷리스트를 초기화시켰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시 버킷리스트를 써 내려갔다. 첫 번째 리스트는 ‘시에라리온 다시 가기’가 되었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작지만 피어있는 꽃들>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김봄 | 기록하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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