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이아침 칼럼] 믿음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진: il vano on Unsplash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의 발걸음을 떼고 말씀이 내 삶에 피와 살이 되고, 내 길을 인도하는 역사로 말미암아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 선명하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소원하는 심령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먼저 일상에서 우리 마음이 종노릇 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일상에서 우리 마음이 묶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묶여 있고, 그것을 어떻게 풀게 할 것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묶여 있는 것에 우리는 끌려갑니다. 그것을 풀어야 주님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크레도’는 심장을 드린다, 마음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생명을 드리는 것은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측정할 수 있습니다. 묶여 있는 것에 마음을 쓰는지, 하늘을 향해 마음을 쓰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는 사람의 마음은 주변 환경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환경에 마음을 쏟지 않습니다. 내면이 주님을 바라보는 영광이 있어서,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믿음의 큰 울림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심어야 합니다. 그 삶은 스스로 살지 않는 삶입니다. 스스로 사는 삶은 건강한 것 같습니다. 자립심, 독립심! 삶의 힘인 것 같고 무언가 성숙해 보입니다. 그 ‘스스로’는 사회 통념상 자연스러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주차팀과 같이 나들이를 갔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말씀 나눔도 5시간 했습니다. 일상에 대한 생각을 나눴습니다. 왜 우리는 일상에서 내 기분, 내 속상함을 이기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일상에서 진리로 결론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주님이 주시는 뜻이 아니라 기분이 우리를 좌지우지할까요?

단순하게 결론 냈습니다. 우리의 기분이 믿음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속이 상하는 그 내용이 진리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보다 커진 우리의 생각, 마음, 속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스스로’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연’하면 좋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40대 후반부터 60대 중반 남자 11명이 같이 가서 사진을 400여 장 찍었습니다. ‘자연’하면 자연스럽다는 좋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것을 부인하면 안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보면 아닙니다. 자연은 스스로 생겨난 것입니다. 즉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스스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도 스스로 살려다가 쫓겨났습니다.

사회적으로, 언어적으로 자연이라는 말이 좋은 이미지로 깊이 뿌리 내렸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진 찍을 때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보라고 하면 잘 안 됐는데 나중에 알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우면 안 되는 것이구나!’ 방치해 두는 것이 자연이 아닙니다. 그냥 놔두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손길 아래, 하나님의 분위기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는 원어로 보면 ‘플라나오’입니다. 원형 동사는 신앙과 전통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헤매다, 속는다, 벌거벗었다는 뜻도 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주님의 마음이 깃들어서 주님을 따라가는 삶에는 하늘의 기쁨, 영원한 삶, 더 풍성하게 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구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살 궁리가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되고, 그것이 더 알맞고, 이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출 33:3~4)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가르쳐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십니다. 그 시간, 산 밑에서는 다음 걸음에 대해 고민하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자기들을 험한 광야로 인도해서 죽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산에 간 모세는 오지도 않으니, 아론을 잡아다가 다음 걸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 광경을 보고 모세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출애굽 시킨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은혜였고,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킬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동행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거기까지는 가도록 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함께 가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실제 우리 삶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한 일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다 동행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목회를 허락하셨다고 목회 과정에 하나님께서 모두 동행하시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떨림과 두려움으로 저를 겸비하고 돌이킵니다. 살려 달라고, 은혜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같이 따라와서 같이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출 32:23)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백성들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백성들의 불쾌한 감정이 드러납니다. ‘이 모세’라는 말에서 백성들의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이 복음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우리의 그 다음 발걸음도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린 그 길에서 다시 또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다른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힘들었습니다. 고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애굽에 있을 때가 편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믿음의 걸음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와보니 싹수가 노랗습니다. 가나안 땅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도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난다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다음 걸음이 걱정이 됐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러분의 삶이 꽉 막혔습니다. 다음 발걸음을 옮길 길이 안 보인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폭풍 가운데 가 있게 되면, 예수님을 불렀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한 신을 만들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길을 모르겠다는 것이고 이 땅에서 무언가 되어야겠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출 32:25)

방자하면 큰일납니다. 여러분을 위한다며 여러분이 방자하게 행하게 할까 두렵습니다. 믿음의 발걸음을 못 걷게 하는 것이 방자함입니다. 믿음을 이야기하며 방자하게 행하게 하고, 그렇게 권면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실, 여러분들은 자녀들이 방자하게 행하도록 권면합니다. 믿음을 비켜가면서도 믿음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교회에 분열을 만들어내는 것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방자하게 행하는 것이 보여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출 32:29)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진멸하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죽입니다. 29절 말씀을 보면, 진멸한 그 모든 내용이 헌신이라고 말씀합니다.

봉사 자체가 헌신이 아닙니다. 헌신한 사람의 그 열매로 봉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헌신은 채우는 것입니다. 헌신은 아말렉을 진멸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어두움을 진멸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헌신이 아닙니다. 마음에 채워져 있는 그것이 진멸되는 헌신 없이, 그냥 봉사하면 문제가 커집니다.

왜 마음에 염려가 임하고 근심이 임합니까? 헌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있는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헌신하게 되면 사랑은 됩니다. 봉사가 그냥 됩니다. 함께 합력해 선을 이룹니다. 봉사의 양과 질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말렉과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지 않았기에 헌신이 안 된 것입니다. 헌신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진리로 결론 맺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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