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조선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쉴 수 없었던 사람

존 헤론(John W. Heron, 1856-1890)

미국 테네시 의과대학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 뉴욕 종합대학 의과대학 과정 수료. 의사면허 취득. 20대의 젊은 나이에대학 교수로 초빙 받을 정도의 실력….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자신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배롭게 여긴 사람이 있다. 존 헤론(John W. Heron). 그는 조선 땅에 복음의 빛을 밝게 비추는 예수님의 오른손에 붙들린 별이었다.

병세가 깊어진 존 헤론은 의식이 희미해지고 정신착란 증상도 나타났다. 그러나 정신이 돌아오면 이 말을 했다.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더 뜨겁게 더욱 더 사랑하고 싶소.”

한 여름의 ‘찜통더위’를 피해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휴가를 보내는 기간에도 헤론은 마냥 쉴 수 없었다. 가족들을 휴가지에 남겨둔 채 병원과 휴가지를 오가며 쉬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가 세균성전염병인 이질에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몸으로 계속해서 조선 사람들을 치료하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헤론은 병상에서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 얼마나 더 많이 일하고 싶었는지 그러나 어떻게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한것이었는지 말하곤 했다.

“조선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의 생명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사랑하는 가족들과 동료 선교사들 그리고 조선의 모든 친구들이 헤론의 임종을 보기 위해 그의 침상 주위에 둘러섰다. 주위의 조선 사람들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며 존헤론은 입을 열었다. “나를 사랑해주고 도와준 친구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든 호흡을 모아서 조선의 친구들에게 유언 같은 한 마디를 남겼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1890년 7월 26일,34세의 젊은 ‘예수 생명’이 5년간의 생애를 조선을 위해 남김없이 불태우고 주님의 품에 고요히 안겼다.

존 헤론. 세상의 부귀를 누릴 기회가 그에게 충분히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가장 가난하고 나약한 ‘은둔의 나라’였던 조선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땅끝으로 가라!”는 주님의 음성에 대한 믿음의 순종일 뿐이었다.

“의료품과 의료기를 준비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겠습니다. 조선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고백한 그의 순종은 지체되지않았다. 그는 1894년 미국 북장로교의 첫번째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파송되었다. 당시 조선의 정치 상황은 갑신정변으로 매우 불안했다.

그래서 헤론은 선교본부의 지시를 따라 일본에서 1894년 4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머물렀다. 이때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복음을 받아들인 이수정을 만나 조선말과 조선의 풍물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85년 6월 21일 인천 제물포 항으로 입국했다.

의료사역과 기독교문서 사역

조선에 도착한 헤론은 선교사 알렌과 언더우드와 함께 광혜원에서 의료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알렌이 외교공사로 임명되면서 그는 광혜원 2대 원장과 고종황제의 시의(侍醫)가 된다. 또한 왕족과 양반계급을 위한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바꾸어 모든 백성들이 의료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또한 그는 언더우드와 올링거 선교사와 함께 1890년 조선성교서회(The KoreanReligious Tract Society)를 창설해 의료선교뿐 아니라 기독교문서 사역에도 힘을 쏟았다. 이를 통해 수많은 초기 한국교회 전도문서들이 출판되었다. 뿐만 아니라 1887년에는 성서번역 상임위원회의 번역위원을 역임하며 낮에는 병원에서 의사로, 밤에는 성서번역자로 쉼 없이 이 땅을 섬겼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사역 환경은 매우 거칠고 힘겨웠다. 당시 조선의 생활 환경은 너무나 불결했고, 백성들은 각종 전염병의 창궐로 수없이 죽어나갔다. 이런 여건에서 매일 끊임없이 몰려드는 환자들을 돌보기에는 의료진의 일손이 너무 부족했다.

무수한 시련 앞에서 소망이 그를 붙들다 특히 유난히 무더웠던 1888년, 헤론의 아버지와 장인이 소천했다. 그해 6월에는 외국인들이 아이들을 유괴해서 잡아먹고, 심장과 눈으로는 약을 만든다는 괴소문이 퍼져 폭동이 일어나 병원이 습격을 받았고, 사역이 몇 달 동안 중지됐다.

7월에는 둘째딸 제시의 출산으로 헤론 부인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헤론 자신 또한 과도한 업무와 재정적인 압박으로 심신이 쇠약해졌다. 더군다나 주변 선교사들의 상황도 어려웠다. 몇몇 선교사들이 질병과 전염병으로 귀국하였고, 호주 출신의 한 선교사는 전도여행 중 천연두와 급성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마음을 견고하게 붙들었던 것은 조선에 임할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이었다.

“그리스도를 위해 조선을 얻는다는 소망이 없다면 나는 이곳에 하루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본국에 돌아가는 일은 있을수 없습니다.” 무수한 시련과 도전 앞에서도 결코 뒤돌아서지 않았던 헤론은 결국 조선 땅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이수정

존 헤론이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일본에 머무를 때에 그의 한국어 선생 역할을 했던 이수정은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 때에 공을 세워 신사유람단의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된다.

요코하마(橫濱)에 도착한 이수정은 일본의 유명한 평신도 지도자이며 농학자인 쓰다센(律田仙)과의 만남을 통해 성경말씀을 배우기 시작해 마침내 1883년 4월 29일 도쿄 로게쓰초(露月町)교회에서 일본의 야쓰카와 도오루(安川亭) 목사와 미국장로교 녹스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인 최초의 세례자가 된다.

그는 쓰다센을 비롯하여 동지사대학 설립자 니지마조(新島襄) 목사, 성서학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등 40여명이 모이는 성서 세미나를 통해 신앙이 성숙해갔다.그는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미국교회에 두 차례 보냈다.

이 편지는 선교잡지 ‘미셔너리 리뷰’에 실리게 되었고, 이 일은 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이 사건으로 이수정은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또한 성경번역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1885년 미국성서공회 루미스(Loomis,H.) 선교사와 함께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한 최초한글성경 ‘신약전 마가복음서 언해’를 출판하였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에 첫 발을 들여놓을 때 가지고 왔던 한글성경이 바로 이것이었다.

본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미국인 선교사를 유치하는 운동을 벌였던 이수정은 이후 문물개방을 반대하던 보수파 세력에 의해서 조선으로 소환되었다. 귀국 직후 울산에서 이들 보수세력으로 추정되는 괴한의 칼에 향년 44세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양화진외국선교사묘원의 첫 번째 무덤, 존 헤론 묘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하 양화진묘원)에는 현재 145명의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안치되어 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양화진묘원에 안치된 외국인 선교사가 바로 존 헤론이다.

1890년 7월 26일 존 헤론의 죽음을 맞은 가족들은 시신을 매장할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당시 외국인들을 위한 묘지는 유일하게 제물포에 있었는데 삼복더위 중에 시신을 백여 리가 떨어진 그곳까지 옮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족들의 마음은 다급했다.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헤론을 집 뒤뜰에 우선적으로 가매장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선 서생들이 반대의견을 표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 울타리 안에 묘를 쓰는 것은 조선의 관습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매장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 헤론의 시신이 부패해갈 때, 선교사들이 미국공사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허드 공사는 수호통상조약을 근거로 조선정부에 요청해 매장지를 양화진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양화진묘원은 이처럼 존 헤론의 매장지를 구하는 과정에서 그의 시신을 양화진에 처음으로 묻으면서 시작됐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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