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2)
저녁노을이 짙어갈 무렵, 이미 국군은 인제 시내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길 옆 방공호에 숨어 동태를 살펴보니 미군 선발대 4~5명이 철모에 수류탄을 넣고 의심스러운 곳에 수류탄의 ‘핀’을 뽑아 무조건 집어던지는 것이다.
그들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다급하게 뛰쳐나와 양손을 높이 들고 투항하는 자세를 취했다. 미군은 양손을 뒤통수에 대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나를 며느리고개 방향으로 걸어가게 했다.
순간 M1총으로 내 등을 향해 사살하려는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돌아섰다. ‘목숨만 살려 달라’는 신호를 했더니 그대로 내 발밑에다 총질을 해댔다. 총알이 비포장 도로라서 자갈이 튀어 발목을 때렸다. 여기까지 와서 죽으면 개죽음이다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목숨만 지켜주옵소서’ 믿을 분은 오로지 주님밖에 없었다. 앞이 캄캄하여 사물이 뿌옇게 보였다. 내게 총을 겨누고 따라오는 미군은 2명이었다. 며느리고개를 향하여 얼마나 걸었을까. 전방에서 먼지를 풍기며 지프 1대가 달려오더니 내 앞에 섰다.
앞에는 미군 소령이 앉았다. 나를 호송하던 미군병사가 소령에게 경례를 붙이면서 뭐라고 보고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포로 한 명 생포했다는 보고였던 것 같다. 소령이 뒤를 가리키면서 차에 타라고 했다. 뒷자리에는 연락병 같은 미군 병사가 타고 있었다. 즉시 차를 남쪽 방향으로 돌리더니 나를 호송했던 미군병사가 내게서 빼앗은 권총을 소령에게 주며 뭐라고 보고했다.
지프는 폭음을 내며 얼마나 달렸는지 강원도 홍천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 도착했다. 미군 병사를 따라 운동장 옆 미류나무 그늘에 도착하니 사오십여 명의 인민군들이 생포되어 있었다. 나도 즉시 포로들에게 합류했다. 미군 두 명이 와서 체격이 건장해 보이는 포로 2명을 데리고 가더니 드럼통을 굴리며 왔다. 미군 야전삽 2개를 주면서 땅을 파라고 소리친다.
생포된 포로들이 교대하면서 구덩이를 약 1m 가량 파고 있는데 지키고 있던 미군이 그만 파라는 신호를 보내면서 드럼통의 휘발유를 구덩이에 붓고 멀리 떨어지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포로들을 불구덩이에 매장하려는가 생각하면서 몇 발자국씩 물러섰다. 잠시 뒤 구덩이에 채운 휘발유에 불을 놓는 것이다.
‘펑’ 소리를 내며 순간 불기둥이 하늘높이 솟아오르는데 미군 서너명이 오더니 포로들에게 입고 있는 옷을 팬티까지 벗어 불에 던지라고 말했다. 몸에 실오라기 하나 없이 모두 홀랑 벗었다. 이윽고 군용차에 푸른 작업복을 싣고 와서는 팬티와 런닝셔츠를 하나씩 주고 옷을 입으라고 했다.
내가 체포된 부대는 미 제24 보병사단이며 철모에 낙하산이 그려있어 낙하산 부대라 불렀다. 주변에는 2, 30명의 포로 경비병이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어 탈출할 방법은 희박했다. 이제는 탈출할 이유도 없었다. 포로들의 상의 뒷면에는 PW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포로들의 제복인 것이다. 그날 밤 우리들은 미군 야전 천막에 수용돼 레이션 1개씩을 받아 저녁식사를 했다.
이튿날 미군 위생병 두 명이 와서 전원 운동장으로 끌고 나와 각자 머리에 DDT라는 살충제를 뿌리는데 인정사정없이 코, 입까지 하얗게 뒤집어 쓰도록 살포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입술과 눈의 DDT를 털어 눈앞의 물체들을 식별 할 수 있었다. 그때 군용차 1대가 달려와 우리 앞에 멈춰 섰는데 4명의 인민군이 생포되어 온 것이다. 그 중 한 사람이 아는 체를 했다.
“조 동무 여기 계셨군요.”
내 손을 잡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인제 외딴 집에서 가마솥에 콩을 볶아준 인민군 분대장이었다. 그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 애절한 목소리로 울면서 말했다. “조 동무 나를 좀 도와 주시오.”
낮잠을 자다가 미군들의 무차별 발사에 놀라 바지에 변을 봤다는 것이다. 그들이 적군이기 전에 한 피를 받은 인간이라 생각하니 그의 간절한 청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미군으로부터 보급받은 포로복을 갈아 입히는데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났다. 인민군복으로 배설물을 깨끗하게 닦아주고 갈아 입혔다. 그는 내게 “동무, 고맙소.”를 연발했다.
그런데 도대체 나의 신분이 국군이란 것을 언제 누가 보장해 줄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인민군 포로의 신분으로 취급 받고 있다. 그야말로 도매금으로 팔려가는 소나 돼지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있는 포로들은 모두 동양인이라 그날 밤부터 쌀밥이 배식됐다.
그런데 개인별 배식 그릇이 없어 포로복 상의 앞자락에 주걱 같은 걸로 떠서 받아오면 소금과 함께 손으로 집어 먹어야 하기 때문에 아주 간단했다. 그런데 인민군 분대장 때문에 고민이다. 그는 식사문제까지도 나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미군 감시병에게 사실을 말하고 그의 배식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했다. 식사 때마다 2인분을 상의 앞자락에 담아 인민군 분대장과 나눠먹어야 했다.
생포된 우리들은 일주일 후에 원주에 있는 임시 포로수용소에 이감되었는데 원주에서 비로소 나의 신분을 밝히게 됐다. 중공군, 인민군, 국군 등으로 자기 진술에 의하여 분류되어 지정된 천막에 수용되는데 나는 물론 국군으로 진술해 국군 천막에 수용되는 대열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인민군 분대장 친구도 내 뒤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동무는 인민군이잖아요.”
그는 원래 국방 경비대에 입대했는데 제주도 반란사건 때 본의 아니게 월북하여 인민군에 들어간 거라며 국군대열에 서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인 진술에 따라 국군막사에 수용되었을 뿐 확인하기까지는 여전히 포로 취급을 받아야 했다. 국군 막사에 수용된 인원은 나를 포함해 10여 명이고, 중공군이 약 30명, 인민군 출신이 가장 많은 50여 명에 달했다.
어느 날 취사장에서 식사 당번 간에 사소한 감정 싸움이 벌어져 헌병들이 공포를 쏘며 진정을 시켰다. 국군측과 인민군과의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천막을 사이에 두고 있던 양측은 그날 밤 서로 천막 받침대를 뽑아들고 다시 싸움을 벌였다. 싸움이 격해 부상자가 발생했다. 부상자는 숫자가 적은 국군측이 많았다. 이 같은 충돌 이후 미군 헌병이 증원돼 삼엄한 경계로 일단 진정은 됐다. 그 다음날부터 식사를 배식 받을 때 국군이 먼저 받고 다음 중공군이, 마지막으로 인민군 순서로 배식이 진행됐다. 충돌을 예방하려는 미군의 아이디어였다.
1951년 6월 3일 모든 포로들은 대구로 이송됐다. 원주역으로 가서 기차를 태우기 위해 포로들을 3열로 세워 행진시켰다. 제일 오른쪽에는 국군, 중간에는 중공군, 왼쪽에는 인민군을 세우고 모두 손목을 결박하여 한미 헌병들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걸어갔다. 좌우도로에 구경나온 주민들 중에 어느 아낙네들은 흥분하여 외쳤다.
“저 놈들을 죽여 버리자.”
도로에 있는 돌멩이를 우리를 향해 던졌다. 한 사람이 “죽여라” 외치면서 돌을 던지자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가장 오른쪽에서 걸어가던 나는 그들이 던진 돌멩이가 이마에 맞아 한줄기 피가 눈을 가릴 정도로 흘렀다. 헌병들의 제재로 사태는 진정되고 원주역에 도착하여 치료를 받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때 생긴 상처는 아직도 내 이마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드디어 우리 일행은 원주역에 도착했다.
우리들이 타고 갈 기차는 일반 여행칸이 아니고 화물칸이었다. 100여 명의 포로들을 콩나물 시루 같은 화물칸에 짐승 다루듯 발길질을 하며 승차시켰다. 마침내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출발했다. 기차가 종착역인 대구까지 가면 앞으로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포로들을 호송하기 위해 앞뒤에 한국군 헌병이 2명씩 거총 자세로 서있다. 더 이상의 탈출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앉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리저리 공상에 잠겼다.
이대로 대구까지 가면 물론 나의 신분은 확실하게 국군 중사로 밝혀지겠지만 최전선에는 아직도 불을 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데 내가 꼭 동부전선 제 1연대에 복귀한다는 보장도 없고 사랑하는 이 양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해왔다. 눈을 감고 피곤을 잊은 채 깊은 고민을 거듭하며 몸은 대구로 가고 있었다.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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