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 안에 이뤄주시기 위해 인생의 전 역사를 사용하신다. 김형종 목사·강정순 사모 부부의 인생 여정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이들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람으로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손길을 전한다. <편집자>
– 어떻게 주님을 만나게 되셨나요?
김형종(이하 김): “저는 철저한 유교집안에서 자랐어요. 항렬을 중시하는 집안에서 문중회의를 하면 갓 쓴 어른들이 저에게 절을 했어요. 오로지 바르게 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이라고 여겼어요. 그러나 결코 전 바르게 살 수 없었어요. 청소년 시절에 저지른 성추행의 기억이 저를 괴롭혔어요. 제 선한 양심에 비춰만 보아도 저의 모습이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죠.
그럴수록 어른들 앞에서는 순종 잘 하는 아이로, 착한 아이로 보이기 위해 더욱 노력했어요. 그러다 고 1때 처음으로 친구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됐죠. 인간적으로 저에게 잘해주는 교회가 좋았어요. 고 2때 수련회에서 사영리를 통해 죄인인 내가 십자가의 예수님으로 인해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 믿어지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 선교사로 서원을 하게 됐어요. 점점 주님을 알아가며 신앙이 깊어질 무렵 제가 있는 곳이 이단단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 이단이요? 충격이 크셨겠네요?
김: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내가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는 것을 제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떠날 수가 없었어요. 내 선택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곳에서 중요한 직임을 맡아 한창 활동하던 중 아버지가 말기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다행히도 아버지는 친구 분에게 복음을 듣고 돌아가시기 열흘 전에 예수님을 영접하셨어요.
그때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실감하기 시작했어요. 예수님을 만나신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저에게 목회자가 되라고 유언하셨어요. 결국 그곳을 나와 나이 스물여덟에 신학교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러다 아내를 만나 6개월의 짧은 교제 끝에 결혼을 하게 됐어요.”
– 매우 단시간에 결혼하셨네요?
강정순(이하 강): “제가 납치를 당해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빠져나오게 된 경험이 있어요. 그때 저의 남은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정했죠. 그러나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저를 아무리 주님께 드렸다 해도 자유롭지 않았어요. 그 당시 생각한 가장 좋은 방법은 빨리 결혼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던 중 남편을 만나게 됐죠. 너무 착한 사람이었어요. 약속을 하고 제가 3번이나 나가지 않았는데도 화를 내지 않았어요. 어떻게 저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결혼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러나 앞으로 어떤 일들이 제 앞에 펼쳐질지 그땐 미처 몰랐어요.”
–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죠?
강: “어느 날 시댁에서 제사를 지내는 거예요. 모태신앙으로 자란 저로서는 문화충격이었어요. 그러나 더 당황스러운 것은 남편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태도였어요. 남편은 전도사였는데…. ‘아니, 이런 사람과 어떻게 살지?’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됐어요. 남편과 저 사이에서도 전쟁이었지만 제 내면 안에서도 전쟁은 참 치열했어요.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죠. 참 갈급했죠.”
김: “저도 그 당시에 매우 어려운 시간을 통과하고 있었어요. 아무리 신학을 하고 금욕, 금식을 하며 율법적으로 살아도 저의 죄 된 모습은 변하지 않았죠. 전도사가 되고 사역을 해도 너무 목말랐어요. 과연 구원은 무엇인가? 복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어요.
갈급한 상태로 해갈해 줄 무언가를 찾아다니고 있던 중에 한 선교단체를 알게 됐어요. 오직 복음 하나에만 자신들의 전부를 걸고 공동체로 살아가는 선교사님들을 보게 됐어요. 그분들을 보면서 ‘바로 저거야.’ 동경은 됐지만 그렇게 살기는 싫었어요. 사실 두려웠죠. 그래도 그곳을 찾아가 선교훈련을 받게 됐어요. 그러나 제가 과거 이단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드러날까봐 두려웠어요.”
변화되지 않는 나에 대한 깊은 갈등과 목마름
– 어떤 시간들이 이어졌죠?
강: “저는 관심을 첫째 아들인 근원이에게 모두 쏟았어요. 아이를 낳을 때 생명의 고비가 있었지만 건강하게 자랐어요. 그리고 아이를 말씀으로 양육하겠다고 노력했는데, 아이도 잘 따라줬어요. 그러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어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동하는데 상황이 좋지 않았죠.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어요. ‘근원아! 주님이 지금 근원이를 데려가실 수도 있어. 너 주님 만나면 좋겠지?’ 그런데 아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 나왔어요. ‘엄마, 나 죽으면 지옥 갈 것 같아요.’ 아니, 말씀암송도, 기도도 잘하는 근원이가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다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뭘 잘못했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어요. 주님의 크신 은혜로 근원이의 건강이 회복되었지만, 아들이 이렇게 된 책임을 모두 남편에게 돌렸어요.”
– 상황이 쉽지 않았군요. 어떻게 극복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 “주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다른 설명할 길이 없네요. 목마름의 끝에서 생수의 근원을 만났죠.
2006년에 정읍에 교회를 개척했어요. 그때도 여전히 말로는 복음을 말하지만 제 삶에서는 실제가 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2011년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외침이 제 심장을 파고들었어요. 복음기도동맹이 주관하는 다시복음앞에 집회의 주제말씀이었어요. 교회 지체와 아들과 함께 참석했어요.
그 시간동안 복음이 내게 가져다 준 축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면서 집회 이후 복음 앞에 서고 싶은 열망으로 복음학교라는 훈련과정에 참여하게 됐어요. 복음의 진리 앞에서 내가 왜 그토록 변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발견하게 됐어요. 바로 내 존재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죠. 그리고 저의 죄 된 존재를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장사지내게 되었지요.”
강: “하나님의 은혜는 저에게도 임하기 시작했어요. 남편이 어느 날 매일 정한 시간에 열방을 위한 기도를 하겠다고 선포했는데, 남편이 일주일간 복음학교에 가 있는 동안, 대신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속으로 탐탁지 않았지만 정한 시간이 되면 기도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열방을 위해 기도하는데 주님이 은혜를 주셨어요. 그동안 자식 잘되게 해주세요. 교회 부흥하게 해주세요. 이런 것이 전부였는데 열방을 위해 기도하니 제 영혼에 기쁨이 샘솟았어요. 그러다 24·365기도에 동참하고 중보기도학교 훈련을 같이 받으면서 제 안의 복음에 대한 갈망은 더 깊어져갔어요.
강사로 오신 선교사님들의 고백은 저의 삶과는 너무 달랐어요. 그분들의 고백은 하나같이 행복하다는 거였어요. 무엇이 문제지? 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내가 문제라는 결론 앞에서 결국 주님은 저를 복음학교로 불러주시고는 복음의 진리로 저를 회복시켜주셨어요.”
– 주님이 두 분을 복음의 진리 앞으로 이끌어주셨군요.
김: “네, 아내와 함께 이제는 복음으로 회복된 생명답게 거침없이 믿음의 질주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여전히 아내와 온전한 연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헤브론원형학교라는 기독교 대안학교를 다니면서 달라지고 그 변화가 저희 부부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어요.”
강: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오는 근원이와의 대화 속에서 어느 날부터 괴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근원아, 학교에 가면 매일 칭찬만 듣는 것은 아닌데 왜 그곳이 좋아?’, ‘엄마, 진리 안에 있어서 좋아요.’ 저도 복음의 진리를 듣고 살아본다고 했는데, 아들과 동일하지 않은 그 무엇이 있었죠. 과연 내게 없는 것은 무엇인가? 적어도 ‘내가 문제’라는 사실 하나만은 명확했어요. 고민 끝에 남편이 가려고 했던 6개월간의 공동체훈련인 복음사관학교에 제가 먼저 지원하게 됐어요.”
복음을 통한 아이의 변화가 가정회복의 시작
– 공동체 훈련의 시간 동안 어떤 은혜가 있었나요?
강: “강정순에게 죄인이라는 선고가 내려지는 시간이었어요. 단순한 죄인이 아니라 제가 선하다고 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적 죄인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복음의 통로로 사용하고 싶어 하시는지 그저 그 은혜가 놀라울 따름이었어요. 이제는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곧바로 남편이 뒤를 이어 그 학교에 입소하게 됐어요.”
김: “복음사관학교에서 훈련을 잘 받은 것 같았어요. 그러나 그게 능사는 아니었어요.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뒤, 주님보다 앞서서 너무 잘하고 있었음을 곧 깨닫게 됐어요. 여전히 사역을 열심히 해서 주님 앞에 드리고 싶어 하는 나의 존재를 처절하게 직면하게 된 것이죠.
복음은 내가 잘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만 살아지는 것이었는데 말이죠. 하나님은 열심히 살았던 저를 무너뜨리시며 히브리서 말씀을 주셨어요.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그동안 주님을 믿지 못해서 열심히 살 수밖에 없던 저에게 ‘너 한번 나만 믿고 따라와 봐!’ 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영혼을 살리는 일이 내가 사는 길
– 믿음으로 내딛은 순종의 발걸음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궁금하네요.
김: “저는 2012년부터 전주지역에서 매년 열리는 청소년 복음캠프를 섬기고 있었어요. 캠프1기 때부터 섬겼는데 쉽지 않았어요. 섬김이 모두가 어려워했죠.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아이들이 캠프 도중에 몰래 도망가는 일들이 계속 발생했어요. 모두들 마음에 절망이 찾아왔어요.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인데, 포기할 수 없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나, 없나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순종, 불순종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모두 순종하기로 했죠. 어떤 때는 쉬는 시간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또 철통 경계를 서느라 밤을 새우기까지 했어요. 그만큼 한 아이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는 간절함 때문이었어요. 이렇게 캠프가 진행되는 동안 다음세대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보게 됐어요.”
강: “청소년 캠프는 다음세대를 살리는 통로가 되기도 했지만 저를 살리는 통로이기도 했어요. 지난 7월에 있었던 캠프 무렵에 주님이 제 마음을 만지시면서 저를 남편 안으로 부르셨다는 마음을 주셨어요. 질서의 하나님이 우리를 선하게, 그리고 그분으로 인해 행복하게 인도하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비로소 마음에 닻을 내리게 됐어요. 목사님을 조종하지 않기로 한 것이죠. 목사님 머리 위에서 내가 왕 되려고 했던 저의 모든 시도들이 바로 열방을 죽이는 것이구나. 남편을 섬기는 것이 바로 열방을 섬기는 것이었어요. 주님이 제 안에 이 마음을 부어주시며 비록 저는 캠프장에서 함께 하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다음세대를 살리시는 영광을 보게 하셨어요. 그리고 때가 차매 우리를 선교사의 걸음으로 인도하셨어요.”
– 선교사로 나가시게 되셨나요?
김: “당장은 아니에요. 오랫동안 기다렸던 선교사의 길을 달리기 위해 올 9월부터 열방연합기도팀으로 훈련받게 됐어요. 그 시간 동안 복음과 기도로 무장되는 시간이 될 것을 기대해요.”
– 선교사의 삶을 시작하면서 기도제목 있으시면 나눠주세요.
강: “그동안 목사님께 순종하지 못한 모습이 많이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주인 되지 않고 전심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김: “저는 한 가지에요. 말씀의 성취.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을 주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과 두 마음 품지 않고 오직 저의 삶에서 주님만이 주인 되시는 삶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말씀을 이루시는 주님을 정말 보고 싶습니다. [GNPNEWS]
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