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송준기 칼럼] 객체가 아니라 공동체다

사진: Unsplash의 Clark Gu

송준기 목사는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의 순종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동안 그같은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담아냈다. 이 칼럼은 그의 저서 발췌와 집필을 통해 선교적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한다. <편집자>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4)

모임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가며, 제자들의 모임을 교회로 규정하자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자뭘텐 모임이 밑끝도로, 밑끝도가 다시 이태원교회로 성장했듯이 다른 모임들도 계속 자랐다. 여기저기에서 모임들이 생겼다.

WWL 독서 모임, 주일예배 모임, 개나 소나 전도 모임, 더 나인 북한 선교 모임, 쉐마나라 월요기도 모임, 검암동 어린이 모임, 검암동 엄마들 모임, 성경통독 토요 모임, 직장인 모임, CPC교회 개척 모임, 문학소녀클럽 모임, 연남동 다리 아래 모임, 수요 기도 모임, 합정역 6번 출구 모임, 아웃도어 처치 등.

다들 제자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탄생되었고, 저마다의 소명과 타깃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전체 모임은 주일에만 하고 그 이외에는 각자의 모임에서 제자화를 진행했다.

웨이처치는 중앙 집권적인 연중행사나 프로그램,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이 없었다. 다만 방향이 있었다. “예수님을 따라가며 합당한 자를 만나거든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기”가 그것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검암동 어린이 모임이 제자화가 가장 활발히 이뤄졌다.

검암동 어린이 모임

모임은 늘 삶의 현장에서 한두 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검암동에서도 그랬다. 처가에서 홍대까지는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매일 다니기에는 너무 멀었다. 아내와 나는 새로운 거처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던 중 인천 검암동을 발견했다. 그곳은 홍대까지 지하철로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집값도 서울에 비해 훨씬 저렴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우리 가정은 대기오염 때문에 심한 기침과 늘 싸웠는데 그곳은 공기도 깨끗했다. 우리는 웨이처치 개척 반년 만에 검암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딸 예진이가 여섯 살이었다. 매일 아침 9시 15분에 유치원 버스가 집 앞에 왔다.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버스를 타는 아이가 두 명 더 있었다. 아내는 그 두 엄마들과 곧 친구가 되었다. 티타임도 갖고 함께 밥도 먹으면서 금세 친해졌다.

자녀라는 공통 관심사로 금방 서로에게 사랑에 빠졌다. 자연스레 아내는 그들과 신앙을 나누며 복음을 전했고, 성경공부 모임이 시작되었다. 아내는 그 모임에 옆집 엄마와 아이들도 초대했다.

네 명의 엄마와 여섯 명의 자녀가 모였다. 엄마들과 아이들은 기독교 신앙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들 자신의 자녀들이 성경을 배우는 데에는 열린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엄마가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예수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되었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찬양을 가르치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엄마들은 자진해서 보조교사가 되어 간식을 준비하며 아이들을 돌봤다. 그렇게 엄마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관계 안에서 점점 배워나갔다.

아내는 세 가정을 위해 매일 간절히 기도했다. 검암동 모임을 위한 기도는 웨이처치에도 전달되었고, 교회 전체가 함께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검암동 모임에 은혜를 많이 주셨다.

어린이들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배워나갔다. 이웃집 이모가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을 알아갔다.

모임은 5년째 지속되어 매주 목요일 저녁이 되면 예진이 집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배우며 함께 예배한다.

때론 너무 덥고, 때론 너무 추웠다. 바람도 불고 폭우도 여러 번 쏟아졌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며 모임을 지속했다. 네 살, 여섯 살, 일곱 살이던 아이들이 모두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러자 더 많은 어린이들이 모였다. 아이들의 신앙은 무럭무럭 자랐고, 엄마들도 하나둘 예수님을 영접했다.

4년째 되던 해에는 유치원 차를 함께 태워 보내던 두 명의 엄마가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또 다른 이들을 전도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모임의 주축이 되어 이끌고 있다. 지금은 열세 명의 엄마들과 스물세 명의 아이들이 목요일 저녁만 되면 예진이 집의 벨을 누른다. 그리고 예배가 시작된다.

모여야 떠난다

예수님은 제자화 모임을 3년간 진행하시고, 부활 후에도 40일 동안 더 이끄셨다.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마지막 모임을 인도하시며 계속해서 모일 것을 명령하셨다(행 1:4).

이 명령에 순종하여 제자들은 모여서 기도했다(행 1:13,14). 그러자 약속대로 성령님이 임하셨고, 그 이후로 교회 모임이 시작되었다(행 2:44).

한편, 예수님은 마지막 모임에서 떠남에 대해서도 약속하셨다.

성령의 임재 후에는 제자들이 땅끝까지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 1:8). 언뜻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모임과 떠남은 서로 반대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둘 다 말씀하셨다.

모임과 떠남은 한 과정이다. 허공에 발돋움을 할 수는 없다. 뛰어오르려면 디딜 땅이 필요하듯 떠나려면 모임이 있어야 한다. 모임은 떠남을 위한 디딜 땅과 같다. 떠나려면 모여야 한다.

모임과 기도로 시작한 교회는 날마다 인원이 늘었다(행 2:41, 4:4). 그들은 먼저 예루살렘에서 모임을 가졌고, 이후 전 세계로 흩어졌다(행 8:1). 예수님의 약속대로였다(행 1:8).

교회도 성경대로 한다. 우리도 모이고 또 떠난다. 교회는 모임을 강조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이다. 하지만 그 모임의 목적이 ‘떠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끝까지 성경적이다.

교회는 떠난다는 방향성을 가지고 모인다. 자뭘텐 모임이 캠퍼스를 떠나자 밑끝도 모임이 되었고, 밑끝도 모임이 홍대를 떠나자 이태원에서 웨이처치가 되었다. 아내가 미국을 떠나자 처가에서 교회 개척자가 되었고, 처가를 떠나자 검암동에서 어린이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모여야 하는 여섯 가지 이유

성경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 모임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다. 주께서 모임을 명령하셨고, 떠남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분의 말씀 때문에 모인다.

두 번째는 교회를 하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항상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제자화가 시작된다. 제자화를 진행하다 보면 모임이 생긴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은 특정한 날이나 장소에서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수행해야 한다. 만약 주일 하루, 교회 건물 안에서만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이다.

세 번째는 개인적 소명이 공동체의 소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교회 모임 안에 다양한 은사와 여러 소명을 부어주셨다(엡 4:11). 각각의 소명은 독특하며 귀하다. 하지만 개인 소명의 목적은 공동체 모임에서 빛을 발한다(엡 4:12).

네 번째는 성장이다. 성경은 동반성장을 말한다(엡 2:20~22).

함께 모여서 영육간에 먹고 마시며 서로 섬기는 행위가 있을 때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성장을 경험한다(엡 4:13).

다섯 번째는 예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말한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히 2:11,12)

내가 사랑하는 주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 당신이 사랑하는 주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 같은 근원을 가진 사랑이기에 한데 모여서 그 사랑을 선포하며 찬양한다.

여섯 번째는 모임이 서로를 거룩하게 하기 때문이다. 혼자 있을 때는 죄의 유혹에 더 쉽게 굴복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있을 때는 죄와 싸워 이기는 일을 함께 수행하게 된다.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인들은 죄 지을 여건만 조성되면 언제든 더럽혀질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모여야 한다. 모임은 서로의 회개를 보존한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전 1:2)

모이지 않으려는 이유

모이지 않는 이유도 있다. 성경에 나온다. 그것은 습관이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5)

“모임을 폐하는 습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죄인은 기본적으로 모임을 싫어한다. 모임의 코드는 겸손과 사랑이다. 하지만 죄인의 코드는 그와 정반대이다.

최초의 모임 거부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고(창 3:8), 단짝 하와를 참소했다(창 3:12). 두 명 이상이면 모임이 성립된다(마 18:20). 아담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모임을 둘 다 깨뜨렸다.

에덴 모임이 파괴된 이후로도 인류는 계속 선한 모임들을 파괴했다. 그 대신 악한 모임을 도모했다(창 11:1-4). 이처럼 모임을 폐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습관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모임 습관이 바뀌었다. 혼술(혼자 술 마시기)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의 술에 함께 취하는 교회 모임을 즐기게 된다. 혼밥(혼자 밥 먹기)하던 사람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면 말씀을 함께 먹는 제자들의 모임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모임을 통해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말씀으로 동반성장하는 거룩한 공동체, 교회이다.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 반드시 낯선 길을 만나게 된다. 그 길을 다 통과해야 믿음이 굳어진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도 그렇다. 익숙하다며 해오던 것만 반복하면 변화는 없다. 발전이나 성장에는 방법을 바꿀 용기가 필요하다_송준기, 《무서워마라》, 규장, 2016, 114쪽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끝까지 가라(도서출판 규장)>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송준기 | 총신신대원 졸. 웨이처치 담임 목사.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을 통해 순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그동안의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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