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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중공군 포로가 되다

▲ 6.25전쟁 때 중공군 포로가 된 국군들. 사진 : 유튜브 채널 KOREAN DIASPORA KBS 영상 캡처

[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7)

1951년 4월 19일. 아침 해가 눈부시게 떴다. 나는 HID요원이라는 사람의 약속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내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이 양이 있기에 힘을 얻어 용기를 냅니다. 부디 나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이 양은 오색리에서 헤어진 사촌 처남의 말을 듣고 내가 잘못됐으리라 생각하며 가슴 졸이며 나의 행운을 빌고 있겠지….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북소리와 요란한 꽹과리 소리가 나더니 불과 50m 아래 우마차 길을 꽉 메우면서 중공군의 후퇴 행렬이 자나가고 있었다. 이미 1개 중대병력이 통과한 것 같았다. 계속 새납(나팔)을 불며 지나가는 중공군 대열은 끝이 없었다.

나는 성난 독사처럼 바짝 긴장하여 권총에 실탄을 장진하고 지나가는 행렬만 직시하고 있는데 모두 가는 길을 멈춰서더니 군장을 길 가운데 내려놓는다. 5분간 휴식시간을 갖는 것으로 보였다. 중공군들이 도로 가운데 삼각목을 세우고 거기에 드럼통을 메달아 불을 피웠다. 그리고 물을 길어 드럼통에 붓고 밥을 짓기 시작했다.

아군이나 적군이나 행군 중에 휴식을 취하거나 밥을 먹을 때면 반드시 고지에 경계초병을 세우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다급한 나머지 내가 그 사실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잠복하고 있는 내 등 뒤 능선에 올라갔던 중공군 초병이 자기 아래에 잠복해 있는 나를 발견하고 뭐라고 떠들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권총으로 대항할 용기조차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병사보다 위에서 나를 발견한 놈이 먼저 나타났다. 따발총을 내게 겨누며 소리를 지르는데 ‘손들엇’ 소리로 들렸다.

앞에 서있던 중공군의 가슴을 걷어차며 도망치려 했지만 밑에서 올라오는 병사들에 의해 생포가 되고 말았다. 도로까지 끌려왔는데 중공군 장교처럼 보이는 자가 권총을 내 가슴에 겨누며 꿇어앉은 나에게 일어서라고 손짓을 하는데 끌려가면 총살을 당할 것 같아 손바닥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며 ‘목숨만 살려 달라’고 손바닥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중공군은 내 말을 묵살하며 자꾸만 일어서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오금이 저려 일어설 수가 없었다. 총살시키러 가자는데 성큼 일어서서 따라갈 포로가 어디 있겠는가. 계속 손바닥을 비비며 목숨만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화가 난 그는 따발총 개머리판으로 내 어깨를 후려치면서 꿇어않은 내 무릎을 발로 걷어차며 소리를 질러댄다. 마음속으로 소도 도축장에 이르면 눈물을 흘린다는 얘기가 문득 생각이 났다. 그때 마침 인민군장교가 내 앞에 나타나 중공군 장교와 대화를 하더니 가방에서 삐라 1장을 꺼내 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한쪽 면에는 붉은 색 한문(중국어)으로 인쇄돼 알아볼 수 없었고, 뒷면은 흰색에 한글로 적혀 있어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인민군 전사 여러분, 적군을 생포하거든 가까운 상급부대로 이첩할 것이며 절대 구타하지 말라….(이하 생략)” 나는 순간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인민군 장교는 내게 국방군은 생포한 인민군을 무조건 총살하지만 우리 인민군은 생포한 포로들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인도적으로 대우하고 총살은 하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인민군 장교는 지금 동무를 일어서라는 뜻은 동무가 있던 곳에 함께 숨어 있던 동무들의 위치를 고백하라는 뜻이고 총살시키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니 중공군 병사와 같이 가서 알려주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결코 내가 잠복하고 있던 주위에는 국군은 없었다고 말했다.

중공군 병사에 의해 양손을 칡넝굴로 포박당하고 앉아 있는데 중공군들이 드럼통 같은 솥에서 죽을 떠서 먹기 시작했다. 내용을 보니 쌀, 팥, 보리쌀, 강냉이 등을 혼합한 죽인 듯 했다. 옛말에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고 했다. 배가 몹시 고팠던 나는 뭐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목숨을 보장받았으니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을 지나가는 중공군 전사 동무에게 포박된 손을 들고 자기들이 퍼먹고 있는 죽통을 향해 좀먹게 해달라고 손짓을 했다.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자기가 쓰던 컵으로 죽을 퍼서 내게 건네줬다. 정말 맛있게 들이마셨다. 식사가 끝나고 다시 군장을 꾸리는데 죽을 끓이던 드럼솥을 옛날 두부장수 모양으로 대나무에 꿰어 둘이서 어깨에 메었다.

다시 요란한 꽹과리를 두드리면서 후퇴가 시작됐다. 나는 터벅터벅 반겨줄 사람 없는 북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디쯤 왔을까. 약 1시간이 지났을 무렵, 5분간 휴식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들 큰 길 옆에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면서 휴식을 취한다.

그때 내 옆에 쉬고 있던 중공군 병사 둘이 서로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절 중공군에게는 손목시계가 대단히 인기 있는 물건이었다. 어떤 놈이 승자가 되었는지는 알 바 없는 일이다. 그러던 중 내게 매질을 하던 중공군 장교가 성난 얼굴로 인상을 쓰면서 생포한 국군 옷차림의 포로 하나를 데리고 와서 발길로 나를 걷어차며 무엇이라 떠드는 것이다. 포로가 내게 뭐라고 얘기를 건넸다.

“아이구 조 중사님 살아계셨군요.”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쳐다보니 우리 3중대 통신병인 오 일등병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에 오 일병의 손을 잡으려는데 재차 나를 걷어찼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걷어차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아침에 보았던 인민군 통역관이 와서 나를 책망했다. 잠복하고 있는 국군의 위치를 찾아내라고 했는데 함께한 동료가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며 날더러 중한 자아비판을 받아야 한다면서 오 일등병을 끌고 사라졌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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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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