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가’족이 다수인 ‘세나파티’ 지역에서 ‘쿠키’족이 우세한 ‘헹붕’을 거쳐, 내전의 최전선 ‘캉폭피’를 지나 ‘메이떼이’족의 땅 ‘임팔’로 이동하는 역사적인 일정으로 진행됐습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대로, 처음 몇 달간은 목숨이 몇 개라도 지나갈 엄두를 못 내던 길, 그리고 지난 몇 주간은 엄청난 ‘통행세’를 내고 마침내 빈털터리로 지나갈 수 있을까 말까 하던 길이었는데, 이 길이 하루 만에 모세 앞의 홍해처럼 확 열렸습니다.
총기로 완전히 무장한 쿠키족들이 외길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메이떼이족은 죽이고, 중립 부족(나가족, 네팔인들 등)에게서는 산적처럼 통행료를 걷어가던 지난 시절이, 바로 어제의 ‘쿠키’족 부족장 회의를 통해 중단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차오&김유나 선교사님 가정 다섯 명과 저, 그리고 운전해 주는 형제 둘은 임팔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차오 선교사님은 ‘나가’족의 ‘빠오메이’ 지파의 전통 복장을 입으시고, 김유나 선교사와 데이브, 주호, 아셀 그리고 저는 태극기와 인도 깃발이 크로스 된 패치가 달린 조끼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거기에 추가로, 저는 ‘복음기도신문’의 정식 기자증도 목에 걸었습니다. 많고 많은 검문 검색 중에도, 이 국제 기자증을 가진 이들은 보통 안전하다고 현지인들이 말해 주더군요.
가는 길은 정말 살벌했습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차창 밖으로 신속하게 사진을 많이 찍지는 못했지만, 곳곳에 내전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총알 자국이 난 벽이나 실전의 흔적이 역력한 임시 진지들, 거의 100미터에 한 무리씩 모여있는 인도 정부군들, 그냥 소 치러 나왔는데 AK-47을 차고 있는 쿠키족 목동, 쿠키족에 의해 불에 타버린 (쿠키족 영역 안에 있던) 힌두교 신전, 그리고 쿠키족에 의해 불에 탄 제 단골 생선 커리집(주인이 메이떼이족), 임팔 시의 유명한 외국 식품점으로, 저도 임팔에 오면 종종 라면 등을 사러 들렀던 ‘비샬 마트’(주인이 쿠키족)가 메이떼이 족에 의해 박살이 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그 모든 광경을 뒤로하고, 도매시장에서 차오 선교사님의 친형이신 전직 국회의원 ‘타오’선생님과 그 일행을 만났을 때는 얼마나 반갑던지요.
이제 난민촌에도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도 북동부의 겨울은 눈까지는 안 내려도 살얼음이 낄 정도까지는 기온이 내려갑니다. 거의 야외에서 숙식을 해 오던 난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물자가 ‘담요’라는 것을 들었기에, 저희는 담요를 구하려 했습니다.
김유나 선교사의 시언니인 국회의원 부인은 임팔의 도매시장을 꽉 잡고 있어서, 외지인인 저희는 거의 현지인 가격에 400장의 담요를 살 수 있었습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임팔’시와 ‘세나파티’읍 사이를 지나가는 것은 너무나 위험했던지라, 물자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얇고 작은 담요 한 장에 650루피(약 1만 1000원)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훨씬 크고 두꺼운 담요가 장당 350루피였습니다. 트럭을 렌트하고, 운전기사까지 고용해도 이렇게 하는 데 투입된 경비가 훨씬 저렴했습니다.
거기에 세나파티 읍에서 가져온 ‘킨더조이’ 초콜릿 여러 상자와, ‘땅에 쓰신 글씨’에서 이 날을 위해 만든, ‘메이떼이’어 만화 전도책자를 ‘절제회 전도팩’에 넣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저희는 ‘메이떼이’족의 난민 캠프 두 곳을 들렀습니다.
첫 번째 간 곳은 ‘논가다’ 난민 캠프라는 곳이었습니다. 약 100여 명의 난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짓다 만 건물의 찬 돌바닥에, 창문도 없는 건물이 난민 숙소였습니다. 거기에 비닐 천을 깔아둔 게 침실이었고, 식재료와 솥단지가 놓인 방이 공동 주방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데 그저 눈물이 나더군요.
차오 선교사님이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고, 우리 일행은 빨리 준비한 선물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이런 곳에서 ‘세러모니’를 하고 싶지도 않고, 민망함과 안타까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지요. 담요 100개를 드리고, 절제회 전도팩(그리고 메이떼이어 만화 전도책자), 그리고 어린이들에게는 ‘킨더조이’ 초콜렛을, 우리는 속히 이동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인도 문화에서는 ‘세러모니’와 ‘단체사진’, ‘구호품 전달 인증샷’이 어디서나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저희를 쉽게 놓아주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워낙 외롭고 슬프고 무료했던데다가, 한국에서 기자까지 왔다니 본인들의 대언자를 빨리 뽑아서 저에게 보내더군요. 바깥 세상을 향해 당신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샤르마’라는 분이 그 난민촌에서 몇 안 되는 영어 소통이 가능해, 마을을 대표해서 우리 일행에게 여러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시더군요. 이름(‘샤르마’라는 성)만 들어도 힌두교의 브라만이니, 내전 이전에도 마을의 원로 역할을 하셨던 분 같았습니다.
다음은 샤르마 씨가 전한 이야기의 요약입니다.
“우리는 원래 여섯 개의 쿠키 마을에 둘러 쌓인 곳에 있었습니다. 갑자기 내전이 터진 후 저희는 쿠키족의 공격을 받았고, 집은 대부분 불에 타버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5월 20일부터 우리는 이 난민 캠프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려 해도 위험지역이라며 군인들이 들여보내 주지를 않습니다. 우리 옛 마을에서 불에 타지 않은 소수의 집은 인도 정부군의 숙소가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지난 1993년, 쿠키족과 나가족이 전쟁을 벌였을 때, 당시 소수 종족이었던 쿠키족을 많이 도왔습니다. 그랬는데 쿠키족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다니 기가 막힙니다. 저희는 단지 평화를 원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다 죽으면 신 앞에 설 것이고, 지옥에 갈 텐데(정말 Hell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 전에 평화를 얻고 싶습니다.”
사실 1993년 ‘쿠키 – 나가’ 부족 전쟁 때에는, 많은 나가족들이 폭행과 방화, 강간,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 상처로 밤마다 울부짖던 나가족 기독 청년들을 저는 꽤 많이 만났었습니다. 당시 메이떼이족은 쿠키족의 전쟁 범죄의 공범이었지요. 당장 차오 선교사님의 고향 마을 ‘오이남’에서도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메이떼이 역시 ‘피해자가 된 가해자’인 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왔던 쿠키족에게 공격을 당했지만, 그들이 공격했던 ‘나가’족 출신의 차오 선교사님을 통해 그들은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저희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미 저희가 준 만화 전도 책자에 다 적혀 있기에, 저희는 말을 많이 아끼고, 들어 드리고, 공감해 드리고, 축복과 위로만 나누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다음 난민 캠프는 ‘칸톤 쿨랜’이라는 지역에 있었습니다. 이곳 역시 ‘쿠키’족에게 공격당한 ‘메이떼이’족들의 난민 캠프였는데, 이곳은 아까의 ‘논가다’보다 더 참혹하여, 말로 표현 못 할 정도였습니다. 처음 든 생각은. “난민 캠프 간판은 있는데, 건물은 어디있지?”였습니다.
150여 명은 마을광장(지붕과 기둥은 있고 벽이 없는)에서 먹고 자고 있었습니다. 한쪽 구석에는 공동 조리구역이 있어서 가마솥에 장작불이 끓고 있었고, 90년대식 TV 한 대가 ‘마을광장’ 한 가운데에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광장 한쪽에는 빨랫줄이 처져있고, 빨랫줄에 달린 얇은 커튼이 남자 구역과 여자 구역을 나누고 있었지요. 지난 3개월간의 우기에는 비가 얼마나 들이쳤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 수도 없이 날아오고 기어 오는 벌레들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몸이 건강해서 야외생활이 가능한 150여 명 외에, 30여 가정의 노약자는 바로 옆의 학교 건물에서 난민 캠프를 꾸리고 있었습니다. 학교가 난민촌이 되고 나니, 정부에서는 이 학교의 학생들과 난민 학생들을 모두 다른 지역의 학교로 등하교하게 했다고 하더군요. 이래저래 고생이 많아 보였습니다.
이곳에서도 100장의 담요와 함께 절제회 전도팩(그리고 메이떼이어 만화 전도책자), 킨더조이 초콜릿을 나눈 후, ‘나가’족의 전통 복장을 입은 차오 선교사님이 짧은 소개와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저희가 짧게 소개하고, 격려하고, 기도하는 동안에도, 아주머니 예닐곱 분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우시더군요. 너무나 필요했던 담요가 산처럼 쌓인 장면에, 그리고 나가족과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도우러 왔다는 사실에 감격한듯 했습니다.
바로 넉 달 전까지 자기 집과 땅이 있던 사람들이라 예의도 있고, 뭄바이 슬럼의 빈민들 같은 체념과 어두움은 없었지만, 그 대신 행복했던 과거와의 비교가 더욱 극명해서 더욱 슬픔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도 영어 잘하는 한 분이 계셨는데,‘카루나’라는 아주머니였습니다. 이분과 이 난민 캠프의 사람들은 ‘쿠키족 마을에 사는 메이떼이족’들이었다고 합니다. 여러 해 친구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공격받아 집이 다 불에 타고, 이 난민 캠프로 옮기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나마 소지하고 있던 돈이 있는 이들은 담요를 샀는데, 많은 이들이 돈이 없어 담요를 못 사는 상황이었다며 눈물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힌두교지만, 자기 여동생의 남편은 크리스천이라면서 연신 고맙다는 말을 쏟아냈습니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강조한 것은, 자신들이 기독교인(우리)들에게 적대감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저희의 사랑과 봉사로 인해, ‘기독교’ = ‘쿠키족’ 이라는 생각에서만 벗어날 수 있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마을 여인들은 워낙 많이 울어서, 저희도 눈물을 참기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지난번에 방문한 쿠키족 난민 캠프들에서도 자신들의 피해만 강조했듯, 메이떼이 난민 캠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당연합니다. 실제로 양쪽 부족에서 난민 캠프에 들어온 이들은 거의 공격을 받기만 하고, 반격이나 복수는 해 보지도 못한 이들일 테니까요.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경험이 절대적 진실일 것입니다. 양쪽 부족에 다 가해자도 있고, 피해자도 있으니까요. 다만 이 메이떼이 사람들은 ‘기독교인의 폭력’으로 이곳에 와 있으니 예수님께 마음을 열기가 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언어로 된, 예수님의 이야기를 만화에 담아 한분 한분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성도님들의 사랑의 헌금으로 준비된 담요와 초콜릿 등을 나누어 드렸지요. 그것이 우리의 최선이었습니다. 다만, 올 겨울 이분들에게 조금이나나 덜 춥게 지낼 수 있기를, 그리고 마음에도 온기가 남기를 기도합니다. 진정한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저희는 다음 일정으로 메이떼이족 난민 캠프를 한 곳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올라오는 길에 이번에는 ‘헹붕’ 지역의 쿠키족 난민 캠프를 방문할 것입니다. 그곳에서도 담요를 나누어야지요. 그리고 내일 모래에는 전투가 가장 빈번히 벌어지는 ‘캉폭피’ 지역의 고아원에 다시 방문합니다. 그 고아원은 이번 내전 이후로, 난민촌까지 겸하게 된 가장 슬픈 지역이기도 합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절제회 전도팩을 만들고, 담요를 공수하고, 반나절씩 하루씩 이동하며 트럭으로 담요를 나르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기회라고 생각하며 한 걸음이라도 더, 이 포화 속으로, 이 비극 속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모든 것을 잃은 이들에게 담요 한 장, 식사 한 끼가 얼마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러나 저희의 걸음이 이들의 아픔 속에 희미한 빛이라도 느껴졌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다면, 이로써 기뻐하고 후일의 소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가 끝나자마자 내전입니다. 참 바람 잘 날 없는 현장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님의 손을 붙잡고 심지어 주님의 등에 업혀서 땅끝에서도 또 땅끝까지 달려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처럼 새벽 두 시까지라도 글을 쓰며 성실하게 기록을 남겨 가겠습니다.
기억해 주세요! 기도해 주세요!
[복음기도신문]
원정하 | 기독교 대한감리회 소속 목사. 인도 선교사. 블로그 [원정하 목사 이야기]를 통해 복음의 진리를 전하며 열방을 섬기는 다양한 현장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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