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기도신문과 함께
나에게 신문이란 그저 집에 쌓아두거나 채소를 다듬을 때 돗자리처럼 깔아 쓰기 유용한 종이 정도였다.
그런 내가 복음 앞에 선 이후, 믿음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며 자연스럽게 복음기도신문을 접하게 되었다. 신문을 읽으며 열방의 모든 소식과 문화에 대해서 점차 복음적 세계관으로 볼 수 있게 됐다.
이는 복음이 나에게 가져다준 수많은 유익 중에 하나이다. 열방의 소식은 더 이상 내게 먼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기도의 다양한 식양들이 모두 연결되어 하모니를 이루듯 열방의 모든 기쁜 소식과 안타까운 소식은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로 인해 나는 중보적·선교적 존재임을 더욱 확증케 되었다.
2013년 8월, 우연히 집에서 뉴스를 보던 중 내 마음을 사로잡는 한 사건이 있었다. 끊이지 않는 내전으로 인해 이라크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언젠가 복음기도신문에서 본 이라크 관련 기사가 기억났다. 곧장 복음기도신문과 집에서 정기적으로 구독하던 일간신문 맨 첫 장을 펼쳐 본문을 보고 묵상하며 기도했다.
일간신문 1면 이라크 기사 바로 옆에는 맹장 수술 후 링거를 꽂고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러 야구장에 온 사람의 사진과 짧은 기사가 있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이 열심을 주께 돌이켜 행하도록 주님은 기도하게 하셨다.
이처럼 나만을 위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던 나를 오직 주님의 은혜로 중보적·선교적 존재로 회복하심에 감격하며 기도했던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복음기도신문 뿐 아니라 다른 일간신문을 보면서도 중보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복음기도신문을 통해 열방을 바라보던 나의 세계관이 복음에 기초하여 견고하게 세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날 이후부터 복음기도신문을 읽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모든 기사를 꼼꼼하게 살피고, 좋은 기사는 형광펜으로 줄도 그어보고 스크랩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수생명의 삶은 복음과 기도로 살아가야함을 더욱 알게 되었다.
복음기도신문을 계속 읽으면서 이 신문은 ‘마땅히’ 모든 교회가 함께 봐야 할 신문인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복음기도신문을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주는 것이 너무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절대 복음을 들고 있는 자, 전부를 가진 자, 모두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줄 수 있는 자가 바로 내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 당당함으로 지인들에게,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신문을 전하는 은혜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알곡만 가득 모아진 요셉의 창고처럼, 신문을 통해 메마른 열방을 부요하게 할 것을 기대하며 더 많은 교회와 열방에 복음기도신문이 읽혀지길 소망한다. 이제 영어로, 일본어로 신문이 번역되어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진다. 모든 나라가 주님의 신부된 교회로 일어나 선교완성의 날을 앞당기게 될 것을 꿈꿔본다. 그런 시간을 통해 주님은 어느덧 나를 선교사의 자리로 삶의 터전을 옮겨 주셨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GNPNEWS]
한정민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