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우울한 인생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됐다. 그리고 아들 예수를 주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마땅히 드려야 한다며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러나 그 삶은 평탄치 않았다. 육체의 고통을 가져오는 환경,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의 고통, 생명같이 섬겼던 제자들의 배신과 추방이 그녀에게 허락된 현실이었다. 또 남편은 양쪽 어깨골절과 목 디스크로 모든 사역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때 믿음의 편에 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김요단 선교사를 만났다.
– 어떻게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셨나요?
“저는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기독교 문화 안에서 자랐어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선 몰랐던 것 같아요. 대학 졸업 후, 인생의 방황기를 지나고 있을 무렵 주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나의 생명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막연하게 선교사가 되기로 결정하고 선교훈련을 받기 시작했죠. 그러나 곧바로 선교지에 나가진 못했죠. 그때 결혼을 하게 됐거든요.”
– 남편도 선교헌신자였나요?
“아니요. 남편은 헌신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요. 유교적 가풍(家風)에서 자란데다 종갓집 종손이었어요. 남편이 가정에서 가장 먼저 예수를 믿어 가족에게 전도를 하는 상황이라서 헌신은 상상할 수도 없는 ‘꿈’일뿐이었죠.
그런데 오래지 않아 남편의 마음이 가난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함께 사업을 하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부도라는 큰 아픔을 겪게 됐어요. 눈앞의 현실은 어려움 자체였는데, 이상하게도 제 마음속에 기쁨도 싹트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주님이 부르시는 때가 왔구나 싶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삶을 드리기로 결단한 것이죠.”
나의 무능은 주님께 삶을 드리는 결단의 시작
– 드디어 선교에 대한 길이 보이는 것 같네요.
“먼저 부도로 인한 빚을 갚기 위해 저는 어린이집을 운영하며 빚을 갚아나갔고 남편은 그 사이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았어요. 그때가 93년이었어요. 저도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중 미전도종족에 대한 마음을 받고 남편과 U국을 알게됐어요.
그리고 남편이 U국으로 아웃리치를 떠나게 됐죠. 그리고 여행상품으로 묶여진 T국도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은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이었어요. 상황상 들어갈 수 잇는 곳은 아니었어요. 그러다 선교단체에서 마침 T국으로 나가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했어요. 그것을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받았어요.
사실 그 나라는 선교사를 대상으로 한 테러가 계속 나타나고 있고 내전이 막 종료된 상황이라 가족과 함께 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의지했어요. 때마침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을 주셨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우리와 아이까지 모두 밀알의 삶을 마음에 새기며 T국으로 떠났어요.”
– T국에서의 시간은 어떠셨어요?
“인사말 정도만 겨우 배우고 출발한 발걸음이었어요. 그래서 도착 이후 그 나라 언어를 배우면서 가정교회 사역부터 시작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에서 운영하는 한국문화센터를 섬기게 됐어요.
그곳에서 한국어 교실과 컴퓨터 교실을 운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한국어 사전에 대한 필요를 느끼게 됐어요. 남편은 T국어를 공부하다 결국 사전을 집필하는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쉽진 않은 일이었어요. 두 번이나 쓰러졌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의 열정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 같아요. 결국 사전이 완성되었고 지금 그 사전이 유용하게 쓰이는 걸 보면서 하나님의 복음이 흘러가는 통로로 사용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 T국 상황이 많이 열악하다고 들었는데 그곳 생활은 어떠셨어요?
“한국과는 많이 달랐어요. 전기도, 물도, 가스도 잘 나오지 않았어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벼룩이었어요. 너무 괴로웠어요. 그곳에서 둘째 아이를 출산했는데 아이를 집중적으로 물더군요.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한 알의 밀이 떨어져서 생명을 살리게 된다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는 시간이었어요. 또 진짜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저의 육체가 벼룩에 반응하는 것처럼 저의 옛 자아도 생생하게 살아서 반응하고 있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어요.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복음의 감격은 없었죠. 나조차도 감격스럽지 않은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의무적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큰 고통이었어요. 공동체의 믿음이 저의 믿음인 줄 알고 살았던 제 모습이 선교지에서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면서 극한 목마름이 찾아왔어요.
그러다 한 선교사님이 지나가는 말로 저에게 던진 한마디가 제 존재를 회복하게 하는 열쇠가 되었어요.”
감격이 없는 복음을 전하는 삶의 한계
– 어떤 말이었나요?
“대단한 말이 아니에요. 한국의 한 선교단체가 주관하는 훈련을 ‘가보라’고 권유하셨어요. 어느 날 갑자기 그 선교사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게 됐어요.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갑자기 변할 수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가 복음이란 것을 알게 됐죠.
그를 변화시킨 복음이라면 저도 가서 훈련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허락된 시간에 참여할 수 있었어요. 복음 앞에 서면서 내 존재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그동안 내가 왜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는지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교도 감수하겠다고 선교지로 갔지만 사람들의 인정에 목매어 살던 모습이 바로 저의 실상이었죠.
그런데 복음의 진리 앞에서 이미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이제는 부활의 새 생명이 됐다는 사실이 믿어졌어요. 너무 행복했어요. 이제 이 복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선교지로 돌아왔어요.
– 복음을 만난 이후 선교지의 생활은 어땠나요?
“이제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난데없이 T국 비자가 거부되면서 그 나라를 떠나야 했어요. 당시 큰 국립대 교수로, 문화센터 사역으로, 이슬람사회에서 인정받은 등록교회를 운영할 때였어요. 그러니 비자에 대해서는 별로 염려하지 않았어요.
설상가상으로 믿음으로 양육했던 제자들이 배신의 길을 선택하는 바람에 교회도 문을 닫게 되었어요. 또 대학에서 수업하던 학과 자체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우리가 나름대로 쌓아 올렸던 업적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면서 선교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저희가 자랑스러워하던 모든 것을 주님이 정리해주셨어요. 돌아보면 주님의 은혜였죠.”
– 그 이후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네요.
“다행히도 출국하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허락되었어요. 짐을 정리하는 걱정보다 오랫동안 교제했던 지체들과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어요.
한 달 동안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그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했어요. 감사하게도 4명 정도가 주께 돌아왔죠. 다른 선교사님께 지체들을 맡기고 한국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지체들이 모두 흩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어디서 유리하는 양처럼 방황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고 마음이 아프네요.”
– 돌아온 한국에서는 어떤 시간을 보내셨어요?
“다시 복음 앞에 서는 시간을 보냈어요. 6개월간의 중보기도학교 훈련을 받으면서 제가 얼마나 선교사로서 자격이 없는 존재인지 보게 됐어요.
내가 헌신하고 싶은 만큼만 헌신하고 사랑하고 싶은 만큼만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하나님은 그런 저를 통해서는 주님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이런 내가 어떻게 선교사를 할 수 있겠는가? 낙심이 되었고 마음속으로 선교사 직을 내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T국의 영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중보기도학교에서 주관하는 아웃리치가 끝날 무렵 다시 T국을 섬길 마음을 주셨어요. T국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었다는 말씀을 해 주시면서 말이에요.”
추방 이후, 새 길로 인도받으며
– 그러면 T국으로 다시 들어가셨나요?
“아니요. 하나님은 저희를 러시아 땅으로 인도해 주셨어요. 처음엔 저희도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지 못하고 순종한 걸음이었어요. T국 젊은이들은 상당수 러시아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백인 우월주의가 심해서 천대받고 무시받는 현실에 고통하면서도 생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저희를 T국 이주민이 많은 곳으로 이동시키신 것이죠. 하나님을 찬양해요! T국에 있을 때 이런 이주민을 섬겨줄 사역자를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주님이 우리의 기도에 이렇게 응답해 주신 거죠.”
– 주님이 친히 인도해주시는 과정을 생생하게 경험하셨군요.
“네. 지금 잠시 떠나 한국에 와있는데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꿈만 같았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그저 하나님 말씀만 붙들었어요. 그것이 저희가 가진 전부였거든요. 당장 머물 수 있는 집도, 할 수 있는 사역도, 아이 학교도 아무것도 허락된 것이 없었어요. 겨울이 되면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를 견디기도 쉽지 않았죠.
그러나 돌아보면 그렇게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1년이 마치 하나님과 밀월여행을 한듯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시간이었어요. 물론 하나님은 그 사이 집과 아이의 학교를 모두 허락해 주셨어요.
그리고 우연히 옆집으로 이사오게 된 현지 목사님과 교제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주민을 위한 기도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날 수 없는 나를 업고 날으시는 주님
또 20년 넘게 사역하시던 선교사님들과도 연합해서 기도하게 되었어요. 기도모임은 점점 활성화 되었고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죠.
선교사회는 더욱 복음으로 연합해갔고 이제 T국의 영혼들과도 한 두명 교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죠. 하나님이 이렇게 순풍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어요. 그런데 다시 사역의 불씨가 일어나는 듯 하다가 갑자기 남편에게 사고가 일어났어요.”
– 또 무슨 일인가 싶네요. 어떤 사고였죠?
“지난해 겨울 빙판에 넘어져서 두 어깨가 골절되었고 인대가 파열됐어요. 바로 한국에 나와 치료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치료할 시간이 지체됐는데 결국 더 악화된 상태로 올해 초 한국에 들어와 수술하게 됐어요. 남편은 현재 계속 치료를 받으며 성경언어훈련학교에서 복음을 배우고 있어요.
어느 날 남편이 이런 고백을 하더라구요. “주님이 두 날개를 꺾으셨네. 나는 독수리 날개인 줄 알고 펄럭이며 날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닭 날개였던 것 같아. 펄럭거릴수록 날지는 못하고 소란스럽기만 하지.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만 하고 말이야. 사실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 날으시는 분은 주님인데 말이야.” 우스갯소리였지만 제 마음 안에 깊이 새겨졌어요. 비록 고통 속에 있지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요.”
– 마지막으로 기도제목 나눠주세요.
“정말 주님을 알기 원하고, 사랑하기 원해요. 날이 갈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요.
계시록 7장에 나오는 민족과 백성과 방언이 하나님 앞에서 흰 옷을 입고 찬양한다는 말씀처럼 수많은 무리 중 T국의 영혼들이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 믿어요.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시는 것이 제 소망이에요.” [GNPNEWS]
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