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김봄 칼럼]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사진: Tyler Nix on Unsplash

이곳 사람들은 아이들을 많이 낳는다.

이슬람 문화의 영향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자녀들은 부의 상징이자 노동력이기 때문이다.

이곳 아이들은 걸음마를 시작하자마자 비질을 하고, 기저귀를 떼면 설거지를 하고, 좀 더 크면 농사를 짓거나 행상이라도 해서 제 밥벌이를 해야 한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그다음 순위다.

‘부모’ 하면 헌신과 사랑이 먼저 떠오르는 나는 자신의 아이들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면서 친척의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는 이곳 사람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의 모습이지만, 자신의 아이들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부모 잃은 친척 아이들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

숙소로 향하는 길목, 첫 번째 집에는 독실한 무슬림에서 신실한 기독교인이 된 알리가 14명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알리의 부부와 3명의 아이들. 알리의 여동생과 4명의 아이들. 알리의 제수씨와 3명의 아이들. 여동생의 남편과 제수씨의 남편(알리의 남동생)은 다른 지역에 일하러 갔다가 한 달에 한 번씩 다녀간다고 한다.

남편이 부재중인 여동생과 제수씨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까? 하지만 알리에게는 그게 왜 불편한 일인가? 이다.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아들과 딸 사돈의 팔촌까지 모여 사는 마을 유지인 아브람의 가족은 세다가 포기했다. 아브람의 이혼한 딸과 손주부터 고등학교에 다니는 먼 친척의 딸에 여러 명의 부인에게서 얻은 자녀들까지 모두 한 집에서 복작거리며 살고 있었다.

이렇듯 이곳에서는 엄마, 아빠, 자녀들 이렇게 일반 가족의 형태는 거의 볼 수 없다. 대부분 한 지붕에서 네 가족이 살고 있다. 시에라리온에는 보육원이 거의 없다고 한다. 하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복지시설이 변변히 있을 리가 없겠지만, 내전과 에볼라로 부모를 잃은 수많은 아이를 친척들이 데려다 키우기 때문에 정작 고아들은 드물다고 한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대부분 친척과 함께 산다. 그래서 이곳에는 엄마보다 고모(Aunt)들이 더 많다.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자신의 자녀들과 똑같이 키운다. 자신의 아이는 학교에 보내고 친척 아이는 학교 보내지 않는 예도 없고, 자신의 아이는 놀게 하고 친척의 아이는 일하러 보내는 예도 없다. 똑같이 먹고 굶고, 바닥에서 잔다.

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중학교 수학 교사로 일하고 있는 방구라는 5명의 자녀와 함께 5명의 친척 아이를 거두고 있다. 친척의 아이뿐 아니라 친척의 이웃 아이들도 형편이 어렵다고 하면 데려와 학교에 보내든지 재봉틀 같은 직업을 배우게 하다 보니 객식구들이 10명이 넘을 때도 있다.

교사의 월급이라 해 봤자 고작 60만 레온. 한국 돈으로 6만 원. (시에라리온 교사들은 박봉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가장 인기 없는 직업이다)

2칸짜리 방에서 노모를 포함해 평균 15명이 넘는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토마스와 토마스의 아내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또 한 명의 아이를 데려다가 키우겠다고 한다.

얼마 전, 선교사님의 가방에 손을 댄 고아소년 S였다. 나는 토마스 부부의 노고가 걱정되었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몸이 약해 나만 보면 고통을 호소하곤 했었다. 그런데 토마스는 문제없다고만 한다. 겨우 하루에 한 끼 먹는 가난한 식구에 입 하나가 더 늘었는데 왜 그게 문제가 안 될까?

토마스의 어깨에 짐이 하나 더 놓이는 것을 맥 놓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그 소년은 내가 책임질게, 그 아이의 무게는 내가 감당해 볼게’라고 말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의 지붕 밑으로 누군가를 들인다는 것이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먹이고, 입히는 것은 물론이고, 공부시키고, 훈육도 해야 하는 책임과 아낌없이 쏟아부어야 할 사랑을 생각하자니 나는 자신이 없었다. 그들보다 가진 게 더 많았는데 말이다.

어떻게 토마스와 알리와 아브람은, 자신의 지붕 아래 또 다른 가족들을 들일 수 있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해서일까? 그랬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보다 거리에서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인 아이들이 먼저 보였을 것이다. 예수의 사랑을 경험한 그들은 그 아이들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사랑 앞에서 생각이 너무 많다. 그들이 마욜로의 예수님이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작지만 피어있는 꽃들>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김봄 | 기록하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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