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언론회, 공산화 위기에서 나라 구한 민족 지도자 역할 인정돼야
올해로 광복 78주년, 대한민국의 건국 75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언론회가 7일 논평을 통해 새로운 가치로 건국된 대한민국 역사를 돌아보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정확히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수천 년 동안 왕이 다스리는 전제주의(專制主義) 국가였다가 1910년부터 36년간 일제 식민지 시절을 보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열강들에 의한 해방을 1945년 맞이, 3년 후 대한민국의 헌법을 만들고 새로운 나라, 국민이 주인 되고 모든 주권이 국민에게서 나오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워졌다.
언론회는 “우리나라가 오랫동안의 전제주의 국가 체제를 지양(止揚)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워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은 당연히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라며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신(神)의 섭리가 있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승만은 1875년에 태어나 21세 때 사회활동을 시작하면서 독립협회와 연루되어 7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1895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향(志向)하는 미국으로 건너가,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교 정치학 학사, 1908년 하버드대학교 석사, 그리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 국제정치학박사를 받는다. 이때가 35살 때였다.
언론회는 “그는 망한 조선의 몰락한 왕손의 가문에서 태어나, 개혁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민주주의 본산인 미국에 가서 공부하므로, 새로운 국가 질서와 토대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과정과 그에 따른 준비를 마쳤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교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해방된 나라에 돌아와서는 1948년 제헌의회 의장으로 대한민국의 새로운 질서를 상징하는 헌법을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 같은 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반제국주의를 내세운 저항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된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정부를 원하던 때, 이승만 대통령은 그렇게 되면 공산화가 된다는 것을 알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주장하여 공산화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추구한 가치는 민주 모범국가 건설, 모범적 기독교 국가 건설, 반소.반공의 보루, 평등사회 구현, 문명한 부강국가 건설이었다.
언론회는 “1948년 당시 우리나라는 인구 2002만 명, 예산 54억 3230만 원, 1인당 국민소득 50달러에 불과했다. 이는 세계에서도 최빈국이었다.”며 “이를 북한과 비교해도 상당한 차이가 난다.”고 했다.
1950년 6.25때 만해도 남한은 인구가 2019만 명인데, 북한은 975만이었으나, 무역총액은 남한이 1억 4000만 달러, 북한은 우리보다 4배 가까이 많은 5억 1000만 달러였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2023년 현재, 총인구 5155만 명, 국가 1년 예산 639조원, 국민 1인당 소득 32,661달러이며, 경제적인 면에서 세계 13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언론회는 “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의 비교에서도 국가의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강조했다.
언론회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혹독하고 부정적으로 매기고 있지만, 외국인들이 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다르다고 했다.
1953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을 두고, 당시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였던 월터 로버트슨은 ‘이승만은 빈틈이 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이라’고 했다. 또 미국의 37대 대통령을 지낸 리처드 닉슨은 당시 부통령으로 한국을 방문한 후에 ‘나는 이승만의 용기와 뛰어난 지성에 감명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미국의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사학과 석좌교수는 ‘그는 포커꾼으로서의 타고난 기술로 최대의 자릿세를 뽑아냈다’고 역설적 언어로 칭찬했다. 또한 마크 클라크 전 유엔군 사령관은 ‘한국의 애국자 이승만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 지도자로 존경한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이승만 대통령이 서거한 후, ‘조국 독립운동의 원훈(元勳)이요, 초대 건국 대통령이라’고 인정했다.
언론회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하여 깊이 연구한 전문가들은 ‘이승만은 외교의 달인이다. 그렇기에 세계를 알고, 여러 민족을 알고, 다양한 문화를 알았다. 나라를 지키는 능력이 비범했다. 세계 정세에 해박했던 것은 미국 동부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고 했다.
또한 언론회는 “한국의 역대 대통령을 평가한 것에서도 국민들의 지지는 다른 대통령들에 비해 높았다.”며 “2002년 한국대통령평가위원회가 역대 대통령들의 자질을 5개 분야(비전 제시, 인사 관리, 위기 관리, 민주적 정책 결정 및 실행, 도덕성)로 나누어 평가했는데 1위는 박정희 대통령으로 62.70, 두 번째는 김대중 대통령으로 58.45, 다음이 이승만 대통령으로 56.95점을 받았다. 당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이었다는 점,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프레임이 씌워진 상태에서의 조사였음에도 그 정도 평가를 받은 것은 대단한 일”일라고 했다.
언론회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공과 과로 나뉜다.”며 “이는 3선을 한 것과 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정선거가 이뤄진 것 때문으로 본다. 즉 이승만 대통령은 1956년 3선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이로 인하여 탁월한 지성과 고결한 도덕성이 감퇴했다고 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또 다른 전문가들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1950년 북한의 남침에 의하여 3년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지만, 정치는 안정되지 못했고, 당시 야당은 이승만 대통령을 위기에 몰려고 끈질기게 내각책임제를 주장했고, 1956년 치뤄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후보를 중심으로 진보.좌파가 무섭게 결집하고, 건국.호국 세력의 통일 방안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고 본다고 했다.
언론회는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출마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공산화되었을 것이라는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한 예측이 있다.”고 했다.
이어 “6.25전쟁 이후에도 한미동맹, 교육 혁명 등 대다수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카리스마에 의존했다는 평가이다. 그러므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공과 과가 7:3이라는 것도 마땅하지 않다고 본다.”고 했다.
언론회는 끝으로 올해로 해방 78주년과 정부설립 75주년을 맞아 우리가 그사이 잃어버리고 바르게 정립하지 못한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면서, 해방과 함께 이뤄낸 건국에 준하는 업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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