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뭐야?”라고 물어보는 나에게 아이들이 ‘그게 뭐냐?’라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dream? what’s that?”
‘꿈? 그게 뭐냐니?’ 아이들은 정말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먹는 거? 장난감? 당신의 나라에만 있는 거?’
나는 아이들에게 손짓·발짓으로 꿈에 관해 설명하려고 하다가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처음으로 들어보는 질문인가?
혹시, 너의 꿈이 뭐냐? 라고 물어봐 주는 어른들이 아무도 없었던 거야?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모든 이들의 꿈을 송두리째 빼앗은 10년이 넘은 내전과 수많은 사상자를 낸 에볼라의 상처는 이들 인생에 단단한 벽이 되어 어떠한 꿈과 소망의 씨앗을 틔우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오늘 하루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이 무슨 꿈을 꾸어야 했을까?
20여 년 전, 내전을 겪은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꾸었던 꿈은 하루의 생계가 전부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꿈’이라는 단어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단어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겠지.
꿈이 뭐냐는 나의 질문이 어쩌면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었겠다.
“꿈이 뭐예요?” 아이들이 되묻는다.
‘그러게, 꿈이 무엇일까? 이 아이들에게 꿈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도대체 이 아이들은 무슨 꿈을 품어야 할까?’ 나는 겨우 대답했다.
“어른이 되어서 되고 싶은 거.”
최악이었다. 얼른, 대답을 바꾸고 싶었지만, 서툰 영어 실력으로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엄마! 아빠!”
개떡 같은 나의 말을 찰떡처럼 알아듣고 아이들은 대답했다.
그런데 표정이 영 개운치가 않다. ‘질문이 왜 이따위냐?’라는 표정이다. ‘어른이 되면, 당연히 엄마. 아빠가 되는 거 아냐? 또 뭐가 되어야 하지?’
나는 어쩌자고 꿈이 뭐냐는 질문을 했을까?
아이들 대부분이 일하지 않으면 밥도 먹지 못하고, 학교에도 다닐 수 없고, 기저귀도 떼지 않은 아이들조차도 뭔가를 해야만 겨우 밥 한 숟가락 얻어먹을 수 있는 마을의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본 저의가 무엇이었을까?
알아서 뭐 하려고? 나는 알고 싶었다. 응원해 주고 격려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빵 하나를 먹이는 게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힘내!’라는 말보다 빵 한 조각 사주는 게 진정한 응원이 아니었을까?
이튿날 아침, 동네 산책을 하는 나에게 아이들이 다가온다. 제일 큰 형인 멜빈이 다짜고짜 “My dream is soldier”라고 한다.
멜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폴이 자신을 가리키면서 ‘미투, 미투.’ 하더니, 모세스도 ‘미투, 미투’ 한다. 이번에는 에스다가 서툰 발음으로 ‘너스. 너스(nurse)’ 하니, 사촌 동생 에피도 기다렸다는 듯이 ‘미투’라고 한다.
내가 ‘빵이나 하나 사줄걸’ 자책하면서 잠들었을 시간, 아이들은 꿈을 생각하면서 잠들었다. 비록, 미투. 미투. 로만 끝난 꿈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멜빈이 “땡큐”라고 하면서 겸연쩍게 미소 짓는다. 멜빈의 마음을 다 알 것 같아서 ‘뭐가 고마워?’라고 묻지 못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봐서 다행이다.
나의 미안한 마음을 아이들은 ‘Thank you’로, ‘My dream’으로, ‘Me too’로 위로해 주었다.
자, 우리 꿈이 생겼으니, 빵을 먹으러 갈까?
오늘, 아이들은 꿈이 생겼고, 빵도 생겼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작지만 피어있는 꽃들>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김봄 | 기록하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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