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인공지능(A.I)이 설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우려를 표하시지만, 저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성도들도 A.I로 앉혀둔다면 말이지요.
A.I 목사가 설교하면, A.I 성도들이 아멘도 하고, 찬송도 하는 겁니다. 적어도 음란물과 폭력물이 판치고 도박 사이트가 넘쳐나는 기존의 웹 세상보다는 보기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A.I의 예배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평등하지 않으니까요.(A.I를 삭제했다고 살인죄가 되지는 않지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A.I에는 영혼이 없지만,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살인범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구원의 대상입니다. 아주 낮은 확률로, 그는 회개 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그에게도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살인자의 진실한 한마디의 고백은, A.I 유진피터슨의 천 편의 설교보다 아름답습니다.
영혼끼리는 상처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용서도, 사랑도 영혼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지도하심으로 설교를 작성하는 설교자와 A.I의 지도로 설교를 작성하는 설교자.
진짜 상처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공간에서 사랑을 이루어가는 성도와 상처받을 일 전혀 없는 유튜브나 가상공간에서 예배드리는 성도.
우리는 어느 쪽에 서야 할까요?
점점 후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마귀에게 기권패를 허락하는 것이요, 자기 연민과 이기심이 가득한 이 시대를 정확히 반영하는 현상들입니다.
이런 혼란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욱 옛적 선한 길을 기억하고, 오래된 하나님의 책장을 펼쳐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 속에서, 이 시대의 현상과 가장 비슷했던 어느 날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굳이 예루살렘까지 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에나 맞춤형 영성 공급처, ‘산당’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당 중에는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이 있는 곳들이 많았지만, 의외로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산당들도 있었습니다. 아무나 예배를 집전하는 산당(왕상 13:33)도 있었지만, 레위지파 정통 제사장들에 의해서 지켜지는 산당(왕하 23:8~9)들도 있었습니다(도리어 솔로몬 때 이후로, 예루살렘 성전에는 거의 항상 우상이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산당은 예루살렘에서 독립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요가 있어서, 공급도 많았습니다. 표면적으로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데 왜 개인적으로, 혹은 내 방식대로 예배드리면 안 되냐고 했겠지요.
아마도 산당의 예배 형식이 더 편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옛날 다윗 스타일 예배 음악보다, 더 최신의 이집트 풍, 시리아 풍의 감성을 원하는 세련된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제사장들만, 레위 지파만 예배를 인도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민주적인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먼 곳에 살아서 어쩔 수 없이 산당을 찾는다는 ‘교통 약자’들도 있었을 법합니다.
굳이 소나 양, 하다못해 떡이라도 가져가야 하는 부담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 대신 부담 없는 산당으로 발을 옮기는 ‘경제 약자’들도 있었을 법합니다.
바알이나 아세라를 믿는 이웃 종교와 함께 예배할 수 있어서 산당을 찾는 진보적인 분들도 계셨을 것이고, 반대로 우상 하나 100% 없애지 못한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상에 실망해서 산당을 찾는 보수적인 분들도 계셨을 것입니다. 산당은 동네마다, 스타일이 각각 달랐으니까요.
여러 산당을 다녀보는 영적 유목민들도 있었겠고, 혹은 현 대제사장이 마음에 안 들거나, 종신제에 세습까지 되는 제도가 싫어서, 혹은 ‘요즈음 레위인’들의 수준이 한심해서 산당을 찾은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성전 개혁 세력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종교화 시키기 전’에는, 산당 예배가 아브라함과 이삭이 드리던 더 오래된 예배 스타일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식 높은 분들도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본질은 하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취향대로 하고 싶은 마음, 헌신 대비 은혜의 가성비를 따지고, 최대한 리스크(관계 상처, 권위 순복 등)를 줄여가며 구원을 받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산당’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을 통해 철저한 종교개혁을 실행하십니다.
그 종교개혁은 단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우상을 제한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수많은 산당들을 허물어 공예배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앗수르 군대는 조롱하며 국론 분열을 꾀하기도 하지만(왕하 18:22),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히스기야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만일 제사장이 연기자를 고용해 제사를 집례하고 자기는 여행을 갔다면, 이 역시 벌 받을 일이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오는 게 싫어서 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 역시 벌 받을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목회자들의 A.I & 챗봇 설교와 성도들의 유튜브 예배에 대해서 심각하게 기도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인 히스기야, 요시야, 루터, 칼빈, 웨슬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 시대의 주류 신앙에서 우상을 제했을 뿐 아니라, 시대마다 어김없이 존재하던 온갖 제멋대로 분파들에 대항하여 공예배의 통일성을 확립하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들도 선조들처럼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구름같이 허다한 예수님의 증인들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 차례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편안하고 넓은 길입니다. 꽃과 나무들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습니다. 나는 편안히 누워서 ‘조회수 1’의 성도가 되고, 설교는 A.I가 해 주는 시대가 코앞입니다. 곧 챗봇에게 어느 주제에 대해, 어느 강도의 격려를, 어느 본문으로 해 달라는 주문도 가능해 질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속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이렇게 불려집니다.
눈물의 자리가 없다면, 고생이 없다면, 아픔이 없다면 우리의 길은 결코 성전을 향한 길이 되지 못합니다. 그저 산당에서의 영적 유희에 불과해질 뿐이죠. 처음에는 집에서도 정장 입고 참여하다가, 점점 질리고 나태해질 것입니다. 처음에는 챗봇을 참고만 해서 내 설교를 만들다가, 점점 그대로 배끼게 될 것입니다.
울며 설교를 준비하고, 울며 예배에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그래서 각자 심은 눈물의 열매들을 안고,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모두 만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복음기도신문]
원정하 | 기독교 대한감리회 소속 목사. 인도 선교사. 블로그 [원정하 목사 이야기]를 통해 복음의 진리를 전하며 열방을 섬기는 다양한 현장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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