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부활하신 주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는데, 변화가 없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과 혼인하고 나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서,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선포하실 날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 여기에서 거룩하고 힘 있는 삶을 삽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성령 안에서 이미 주님과 혼인하여 하나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혼인 예식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넘겨졌습니다.
얼마 전, 서부 지역 마을에 가서 로마서를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정해진 대로 로마서 7장 4절을 다루면서,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혼인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며칠 후에 한 사람이 거리에서 나를 따라와서, 함께 차를 타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믿음 생활을 했지만, 이기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내가 그리스도와 혼인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자 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나는 새 사람입니다. 이제 나는 승리를 얻었습니다.”
분명, 이것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주님과 혼인하고 옛 생활로 돌아간다면, 분명 부끄러울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아니요” 혼인은 양자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원하심을 생각하면, 주님의 원하심에 따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혼인이든지 일방적인 깜짝 쇼에 불과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한 남자를 예로 들어봅시다. 평생 혼자 오두막에서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느 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에 가서 신부를 골라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면 오두막의 생활이 이전과 동일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것은 쓰레기통으로 가고, 어떤 것은 불에 태울 것입니다. 어떤 것은 자리 배치를 달리 할 것입니다. 이전에 오두막이 더러웠다면 이제는 깨끗할 것입니다. 이전에 깨끗했다면 이제는 더 깨끗해질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신부의 원함을 제대로 살피면,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무리 자연스러운 것이라도, 이런 변화가 없으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친구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가 되었는데, 너무나 놀랍게도 이런 변화가 없다면, 아니 이런 변화가 계속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을 알기 전, 주님께 속하기 전에 우리가 혼자 살았던 삶보다, 나은 삶을 예수님께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새로운 기준이 되는 속함
‘주님께 속함’은 오직 그리스도인에게만 가능한 전혀 다른 삶, 완전히 다른 기준입니다. 이전에 주님과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만 생각했습니다. 이제 다른 한 분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전에는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할 거야.”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할까요?”라고 해야 합니다.
달리 말해서,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로서의 책무가 없는 일반 사람들의 기준입니다. 주님께 속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뜻 가운데 있는 권리를 알고, 이를 행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주님 중심으로 운행되므로 우리에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특권이 있습니다. 이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중심 내용이며, 그 일의 범위이며, 그와 연계된 상황입니다.
이 차이는 아주 극명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녁마다 시내 당구장에 가는 젊은이를 생각해봅시다. 이 습관에 대해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당구를 하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 얼마 있다가 청년은 신부를 얻고 결혼식장에서 무엇보다 신부를 사랑하겠다고 서약을 합니다.
그 후에 청년이 밤이면 밤마다 시내 당구장에 간다고 합시다. 이제 문제는 당구를 하는 것의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혼인은 청년이 보내는 저녁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세웁니다.
이제 문제는 이것입니다. 청년의 삶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있는데 저녁의 계획을 세울 때, 왜 그 사람을 고려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주님께 속한 삶입니다. 주님께 속한 삶은 한 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단순한 문제로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자기 삶의 비결이며, 삶의 목적이며, 삶의 추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영광을 사랑합니다.”(고후 5:9, 문자적으로 번역함). 사도 바울은 이렇게 뜻을 정합니다.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그리스도인이 안 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을 모든 삶의 실상으로 모시고 사는 지고한 신앙생활을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주님께 속함’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서부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이 진리에 깊은 관심을 둔 대학 졸업생 청년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이 진리가 너무 새로웠습니다. 어느 날 이 청년은 아주 열의에 가득 차서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항상 우리 삶 속에 모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인가요?” 내가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왜 그래요? 랠프,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가 아주 진지한 것 같아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실상으로 모신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햇살이 창문을 비추는 것을 보고, ‘주 예수님, 주님은 빛이십니다. 오늘 주께서 내 심령을 비추시며, 나의 빛이 되어 주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옷을 입으면서, 주님을 의의 옷으로 여기며, 오늘 주님께서 나의 옷이 되어주시기를 구할 수 있습니다. 씻으면서, ‘주 예수님, 이제는 내 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의 생수로 나를 씻으시고 나의 모든 허물을 벗겨주소서.’라고 하고, 아침 식사를 하면서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께서 친히 먹여주시고 하루를 건강하게 보내게 해주시기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가 매일의 삶에서 실제적인 실상이 되도록 초청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러자 랠프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습니다. 랠프는 자신이 사과 박스를 만들기 위해 바쁘게 다닌 길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이제 주님이 내가 섬길 새 박스 공장이 되겠군요. (같은 일을 하지만 이제는 주님을 모심으로 새로움 속에서 그 일을 하게 되었음을 말함).” 새로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복된 친밀한 속함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주님의 것이고 주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인식할 때, 우리의 삶은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Norman B. Harrison – 룻선교회 제공>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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