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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양 칼럼] 현각, 쇼펜하우어를 통해 불교에 입문한 로마 가톨릭 신자

사진: Seongtaek Chee on unsplash

눈먼 기독교(23)

숭산 스님의 제자로서 우리나라 선불교를 계승하고 이를 국제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현각 스님은[1] 자신의 책에서 영적인 고뇌와 방황으로 점철(點綴)됐던 젊은 시절을 소개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로마 가톨릭에서 신앙생활을 했으나 제대로 된 기독교 신앙을 함양할 수가 없었다. 교회에서 성경을 배우고 가정에서 믿음 좋은 부모님과 대화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쇼펜하우어를 만났고 결국 그 과정을 통해 불교를 알게 된다.

나는 여기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고백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쇼펜하우어를 통해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쇼펜하우어는 불교에 대해 아주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중략) 그는 정말 자주, 강하게, 깊이 이른바 불교라는 것에 대해 찬사를 보내며 불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했다.[2]

쇼펜하우어는 인생 후반기로 갈수록 불교에 점점 더 심취했다. 그는 불교를 따로 공부하거나 심지어 불경을 읽은 적도 없지만, 자신의 철학과 불교가 서로 통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만족스러워 했다. 그는 불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곧 자신의 철학이 또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무튼 현각이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예수와 교회를 분리해서 생각한 것이 그 증거다. 그는 예수가 교회의 머리고, 교회는 예수의 몸이란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또한 그는 예수에 대해, 진리를 깨달은 도인 정도로 여기고 있다. 예수는 진리를 깨달은 자가 아니라 진리 자체인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도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냥 현자 정도 되는 인물로 여겨지면 그 다음에는 거칠 것이 없다. 세상에 현자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쇼펜하우어를 통해 또 다른 현자인 부처를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얼마 후 나는 쇼펜하우어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더욱 놀랐다. 말년에 자기 책상 위에 불상을 모셔놓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그를 통해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중략) 어느 날 개신교 목사인 한 친구가 나에게 책을 한 권 주었다. 그것은 스즈키 로쉬의 『선의 마음, 초발심』이라는[3] 일본 불교 책이었다.[4]

현각은 난생 처음 접해본 불교 서적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 책은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즉, 진리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이며, 참선과 수행을 통해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쇼펜하우어를 통해 마음이 열려있던 어설픈 20대 로마 가톨릭 청년에게, 진리는 마음에 있는 것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기독교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예수를 진리로 믿고 또 성경을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데 비해 불교에서는 마음에 숨겨져 있는 주관적인 그 무엇이 진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가 쉽다.

생각해보라. 어떤 특정한 제삼자가 진리이니까 받아들이라는 것과 당신 안에 진리가 있으니 그것을 찾기만 하면 된다는 것, 어느 것이 과연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더 설득력이 있겠는가? 진리를 찾기에 갈급해하는 이 젊은이에게 불교 책을 건네준 사람은 다름 아닌 목사인 친구였다. 목사가 친구를 불교에 귀의시켰다! 물론 그 친구 목사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자신도 이미 영혼은 불교에 귀의한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독교 성직자가 불교 포교에 앞장서는 시대가 이미 도래 했다.

신의 죽음을 외치는 승려

그렇다면 현각은 서양의 기독교인으로 살다가 동양의 불교에 귀의(歸依)하는데 아무런 갈등을 겪지 않았을까? 어찌 보면 신기하게 그러나 어찌 보면 당연하게, 그는 아무 번뇌나 고민 없이 불교를 선택했다. 그것은 예수를 버리고 부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부처를 따르는 것은 곧 예수를 따르는 것과 다름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확신은 완전히 착각이지만, 어쨌든 현각은 아무 문제없이 순식간에 불자가 되었다.

현실은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살아있는 가르침에 따라 평생을 살겠다는 나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나를 철학의 길로, 불교의 가르침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출가에까지 이르도록 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나는 부처님 때문에만 출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출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찾고 싶다면 부모와 형제자매를 떠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5]

사실 성경에는 위와 같은 구절이 없다. 아마도 마가복음 가운데 10장 29, 30절과 8장 34절을 섞어서 기억을 한 듯하다. 예수는 우리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를 만한 가치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현각은 부처를 따르면서 그것이 곧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것은 궤변이며 억지다. 이러한 ‘자기 확신’이 세상에 넘치기에 예수는 ‘자기 부인’이 예수를 따르는데 필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저는 불교나 숭산 스님 때문에만 출가한 게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출가한 것입니다. 진리를 어떻게 찾을 것이냐 하는 점에서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입니다.[6]

이 글은 현각이 불교에 입문하면서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현각은 진리를 ‘찾는다’, ‘깨닫는다’라는 표현을 한다. 엄격히 말해서, 기독교는 진리를 찾거나 깨닫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진리이신 예수를 ‘믿는’ 종교다. 진리는 어떤 가르침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말은 예수 안에서 자유를 얻는다는 말이다. 죄와 죄책으로부터의 자유, 악과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연약함과 무지함으로부터의 자유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의미다. 그런데 진리이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유롭게’ 진리를 생각한다. 그리고 진리가 주는 자유를 또한 ‘자유롭게’ 생각한다.

현각이 졸업한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은 그 교훈이 각각 ‘빛과 진리’와[7] ‘진리’다.[8] 신학교로 시작한 두 대학이므로 처음에 그 교훈을 정한 사람은 진리이신 예수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교훈을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진리란 단어가 예수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단언컨대 정말로 소수일 것이다. 그 두 학교는 더 이상 예수를 ‘향한’ 학교가 아닌 그냥 세상에 우뚝 선 학교 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인정과 사람들의 호응과는 상관없이 진리는 오직 하나 뿐이다.

기독교 신앙인이었음에도 현각이 아무 것도 주저하지 않고 불교에 입문하게 된 것은 일종의 군중심리가 작용한 듯하다. 그는 불교에 심취해 있는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과 헐리웃 영화배우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자기가 선택한 것을 이미 다른 유명인들도 선택했노라고 말했다. 그들이 들어간 세계로 자신이 들어가는 것이 잘못되거나 이상할 것 없다는 자기 암시가 엿보인다. 하긴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불교에 입문한 유명인들의 면면은 참으로 대단한데 마이클 조던, 리처드 기어, 키아누 리브스, 해리슨 포드, 톰 행크스, 브래드 피트, 윌리엄 데포, 맥 라이언, 스티븐 시걸, 에디 머피, 우피 골드버그, 우마 서먼, 마돈나, 티나 터너, 레너드 코헨, 올리버 스톤 등이 있다.

세계적인 스타들이 불교에 입문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범인(凡人)처럼 뭔가에 의지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들도 똑같다. 마음껏 의지할 수 있으면서도 삶을 구속(拘束)하지 않는 종교인 불교가 현대인에게 어필하는 정도는 참으로 대단하다.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불교의 확장은 바야흐로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현각은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와 독일 같은 유럽에서 불교 신자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가는 추세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프랑스만 하더라도 몇 년 후에는 불교가 가톨릭과 이슬람교 다음으로 신자가 많은 종교가 될 것이라고 한다.

부처의 가르침이 서양에 전파된 결과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신이 죽었다! 목사의 아들인 니체가 앞장서서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다녔는데, 이 시기는 동양의 신비한 사상인 불교가 서양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저 늙은 성자는 그의 수풀 속에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직도 듣지 못하고 있구나!”[9] 그는 또한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창조한 이 신은 다른 모든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조작이며 인간의 망상이었다. 그 신은 인간이었다.”[10]

니체가 불교에 심취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결국 불교가 니체를 통해 기독교의 신을 몰아내는 저력을 발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에는 기독교가 동양으로 침투해 들어가 불교, 유교, 도교, 힌두교 같은 동양 종교를 잠식했는데, 이제는 그동안 당하고 있던 동양 종교 특히 불교가 자기 종교를 지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으로 서양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이미 복음주의 신앙에서 멀어지고, 계몽주의와 인본주의에 젖은 채, 무방비 상태로 지내던 서양의 기독교가 불교의 급습에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그 성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승려가 신을 죽여야 한다고 당당하게 외쳐도 누구하나 반박하지 않는 희한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당신의 신을 죽일 수 없다면 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진정한 신은 이름도 형태도 없으며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만의 신을 만들기 때문에 진정한 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신을 죽여야 진정한 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기독교와 선불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11]

스승은 ‘신을 쏴라’고 가르치며, 제자는 ‘신을 죽여라’고 가르친다. 현각은 아무 것도 없는 빈 마음을 말하지만, 그 빈 마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사람의 내면은 비어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내면은 원래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차야 행복해지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그것을 대치시켰다. 그래서 사람은 가지고 가져도 참된 행복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현자들이 소유는 행복의 절대 조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비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워도 마찬가지다. 그 비운 자리에 다른 것이 순식간에 쳐들어오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1] 미국인으로서 본명은 폴이고 예일대와 하버드대를 나왔다.

[2] 현각,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l』, 열림원, 129쪽

[3] 원제 Zen Mind, Beginner’s Mind

[4] 현각,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1』, 열림원, 130쪽

[5] 현각,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2』, 열림원, 22쪽

[6] 앞의 책 58쪽

[7] Lux et Veritas (라틴어)

[8] Veritas (라틴어)

[9]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청목문화사, 10쪽 一 짜라투스트라가 30살에 산에 올라가서 10년 동안 도를 닦은 후 내려오다가 성자 노인을 만난 후 헤어지면서 하는 말이다,

[10] 앞의 책 32쪽

[11] 현각,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2』, 열림원, 157쪽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눈먼 기독교>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Park Sun

박태양 목사 | 중앙대 졸. LG애드에서 5년 근무. 총신신대원(목회학), 풀러신대원(선교학 석사) 졸업. 충현교회 전도사, 사랑의교회 부목사, 개명교회 담임목사로 총 18년간 목회를 했다. 현재는 (사)복음과도시 사무총장으로서 소속 단체인 TGC코리아 대표와 공동체성경읽기 교회연합회 대표로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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