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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만들어진 신(2): 도덕은 절대적일 필요가 없다

사진: pixabay

도킨스의 책 의 두번째 부분을 읽으면 무신론자들이 당연히 따라가야 하는 철학적 결론들에 도달한다. 솔직히 나는 얼마나 많은 무신론자들이 도킨스가 주장하는 결론에 동의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도킨스는 적어도 일관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주장한대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가 내린 결론을 피할 수 없다.

도킨스는 선악의 문제, 도덕의 문제에 대해 여러 인용과 복잡한 말들을 하지만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다행이도 도덕은 절대적일 필요가 없다(352p)

도킨스는 절대적인 도덕 기준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다수가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도덕적인 공감대가 있고,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해간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무신론과 포스트모더니즘이(혹은 다원주의) 무슨 관련이 있냐고 묻는데, 무신론의 선봉에 서있는 도킨스의 주장을 잘 들어보라. 그는 도덕의 기준이 사회 공동체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기준이며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절대성은 사라지고 상대성이 들어선다. 한 가지 기준이 아니라 다양한 기준, 다양한 견해에 따라 빚어진 도덕의 개념이 날마다 새롭게 정립된다. 우리는 이런 특징을 가진 사회를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라고 말한다.

도킨스는 법과 규칙, 절대적 기준 없이도 사람들은 그렇게 악해지지 않는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도덕에 대한 기준은 변하는 것이고 사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인간 내면에 각각 존재하는 양심과 도덕의 기준은 항상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 아프리카 사회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 때의 도덕은 누구의 편을 들어줄 것인가? 두 가지 상반된 도덕의 원리가 공존할 수 있을까?

신이 없어도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도킨스의 말은 참이다. 만약 도덕이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 성격이라면 말이다.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도덕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문제는 살인, 간음, 강간, 사기, 학대, 납치 등 수많은 범죄들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사회적 동의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비도덕적이야”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인 것은 없다. 기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낸다면 오늘의 비도덕은 내일의 도덕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도킨스가 열정적으로 외치는 것이 “인간의 능력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바닥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라는 말이다. 인간 내면에 살아있는 선한 양심을 믿으라는 것이다(물론 도킨스는 양심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지금 선한가? 수많은 사람들이 수십년간 노력하여 만든 것들을 불법 다운로드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 아내 외에 여자친구를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 카메라가 없다면 과속하고 신호위반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 수많은 여성들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만들어낸 성적 상품을 초등학생부터 어른까지 찾는 사회… 이 사회가 정의하고 동의하는 도덕은 무엇일까?

신이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도킨스는 인간의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한다. 한 마디로 인간은 결국 “소멸”한다. 당신은 이 견해에 동의하는가? 무신론자라면 당연히 이 결론에 동의해야 한다. 인간의 죽음은 생명체로서 기능이 종료된 것을 의미하며 다시 시작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생명을 불어넣어준다면 모를까. 신이 없다면, 그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의사가 다시 살려낸 죽은 사람은 없다(거의 죽은 사람이나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단한 사람 말고, 정말 죽은 사람). 자연적으로 죽었다 다시 자연적으로 되살아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도킨스는 “소멸”을 두려워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가는데 주목하라고 말한다. 인생을 최대한 즐기고 누리라고 말한다. 죽으면 소멸되니 말이다. 인간은 그 동안 너무 많은 시간 죽은 사람을 기념하고 그들의 명복을 비는 일에 시간낭비를 해왔다. 소멸하여 사라진 존재의 과거에 대한 회상이야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소망과 기대는 인간 “소멸”이 사실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좋은 곳에 있을 거라는 말은 단지 유가족을 위한 껍데기뿐인 위로의 말이다.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유에서 무로 돌아갈 뿐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알 수 없지만 인생을 되돌아보며 다가올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도 없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헛것이며, 국가와 사회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현재를 즐기는 자들에게 큰 의미가 되었지만, 정작 본인들은 소멸되었을뿐이다. 이 사실이 불편한가? 부인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무신론자의 논리를 벗어난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전제한다면 도킨스와 같은 결론에 이르를 수 밖에 없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일관성 있는 무신론의 논리에 유신론의 개념을 억지로 끼워넣는 것이다. 행복은 현재, 그리고 소멸되기 이전에만 주어지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도킨스의 이 내린 결론을 따라가보자. 그는 생명의 탄생에 대하여 “자연선택설”을 주장한다.

지적 설계는 우연의 적절한 대안이 아니다. 자연선택은 경제적이고 설득력 있고 우아한 해답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제시된 것들 중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대안이다

6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이 설명하지 못하는 두 가지가 있다면 자연은 왜 선택하고 무엇을 선택하는가?이다. 성경에 따르면 지성을 가진 존재(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계획에 의해 만물이 창조되고 기능하게 되었다. 도킨스는 자연선택설에 따라 자연이 선택하는대로 만물이 생겨났고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도킨스가 말하는 “자연”은 지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자연이 선택하는 결과들을 “계획”이라 하지 않고 “우연”이라고 말한다. 자연은 스스로 생각하면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시작부터 현재, 미래는 결국 “지적 설계”냐 아니면 “자연 선택”이냐의 문제고, 창조론, 진화론이 각각을 대표하는 설명이다.

무신론의 핵심전제 중 하나인 자연선택설에서 하나님의 자리는 자연이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자연”은 계획도 의지도 없는 무지한 존재이다. 생명이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도킨스의 설명이 가진 한계점은 본인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이론이라고 말하지만 도킨슨도 어떻게 최초의 물질이 생겨났는지, 그것이 어떻게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연구해보자!라고 말한다.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예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도킨스의 자연선택설은 왜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는가? 왜 아버지는 자녀들을 사랑하는가? 왜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나 사랑이 생기는가?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주지 못한다. 부모의 마음에 생기는 애정은 호르몬과 같은 생물학적인 기능들이 만들어내는 환각이나 허상일뿐 진짜는 아니다. 우리가 “행복”하면 떠오르는 감정들은 대부분 이 허상에 포함된다.

자연선택은 지향적 입장을 지름길로 삼도록 뇌를 형성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행동을 하는 실체에게 의도를 갖다 붙이도록 생물학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다(280p)

앞에 말한 것과 같이 도킨스의 “자연선택설”에서 “자연”은 거의 하나님 역할을 해낸다. 다만 지적 기능이 없고 우연히 그러한 것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사랑” “애정” “존경” “열정”과 같은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실체들은 다만 자연이 우리에게 프로그램화시킨 허상이라는 것이다. 진짜 사랑은 없다. 다만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생물학적 현상이 있을 뿐이다. 진짜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종족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본능을 자연이 나의 아버지 어머니에게 프로그램화시킨것 뿐이다. 나의 부모님은 그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아내를 보고 느끼는 사랑은 어떠한가? 내 종족을 번성시키기위해 생기는 본능이다. 내 아이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나는 궁금하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실체들이 자연이 선택하여 넣어준 프로그램의 결과라면 나의 행복의 실체는 무엇인가? 자연선택설은 우연이라고 말한다. 아무 특별한 의도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우연하게 주어진 현재를 다만 즐기라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인가? 좋은 기분이 들면 좋아하고, 식상해지면 버려도 되는 것인가? 내 종족을 더 번성시키기 위해 아내 외에 또 다른 사람과 아이를 갖는 것은 어떤가? 사회적으로 동의만 된다면 괜찮은가? 자연이 나에게 프로그램화시킨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나에게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모든 욕구는 그럼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현재 내 몸이 여러가지 생물학적 신호를 보내서 나에게 어떤 열정이나 욕망을 갖게 한다면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이 행복인가?

다시 처음 도킨스가 주장한 말을 되새겨보자.

신이 없어도, 균형 잡힌, 행복하고 도덕적이고 지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배에 올라탄 사람이 나침반 없이 항해를 하고 있다. 그는 바람과 기후가 배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인도해줄 것이라 믿고 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망망한 바다 뿐이지만 내가 느끼기엔 우편으로 배를 돌려 운전하면 거기에 목적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나의 오랜 경험이나 예전 항해자들이 했던 말들을 들어보면 확실히 이 방향이 맞을 것이다. 나는 균형잡힌 운항을 하는 중이며 지금 현재 마음이 행복하다. 나는 논리적으로 생각을 하면서 배를 몰고 있다. 잘못된 것은 없다.

내가 볼 때 도킨스의 핵심적인 문제점이 여기에 있다.

지구라는 행성은 몇 억분의 일이라는 우연적인 과정을 통해 기존에 존재하던 물질들의 빅뱅현상으로 생겨났다. 자연 만물은 진화라는 수십억년의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인간이 세상에 등장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고 그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자연은 생명체 스스로가 공동체 생활을 하며 생존하게 프로그램하였고, 인간은 그들끼리 모여 살면서 암묵적인 동의를 만들어냈으며 그것이 곧 도덕이다. 인간은 자손을 번성시키고 유지하려는 본능에 따라 생물학적 현상에 따라 성관계를 맺기도 하고 아이를 생산하여 그들을 보존하기 위한 본능에 따라 지키려고 한다. 그들은 본능에 따라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욕구가 생기면 사회적 동의를 어기지 않는 한에서 해소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그렇게 프로그램화된 본능에 따라 살아가다가 정해진 기력을 다하면 소멸한다.

나는 도킨스가 설명하는 이러한 삶이 균형잡힌 것도, 도덕적인것도, 그리고 궁극적으로 행복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목적을 가지고 산다는데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본능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본능을 가지고 살지만 그 본능을 가지고 계획성 있게 산다는 것이다. 그 어떤 동물도 다이어트 계획을 짜거나, 인생에 이루려는 목표를 세우지 않는다. 인간은 목적과 계획을 가진 존재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계획과 목적이 없는 자연이 선택하여 우연히 발생한 생명체라면 인간은 그저 고속도로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개와 다를바 없다. 다만 월등히 뛰어난 지능을 가졌을뿐이다.

망망한 대해에서 나침반 없이 떠도는 배처럼, 방향을 잃은 인간의 삶은 절대 행복할 수 없다. 기준점이 없는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진배없다. 절대적 원리가 없다면 균형이라는 말조차 성립이 되지 않는다.

신이 없다면, 그것이 정말 진리라면,

인간은 균형을 잡을 수 없다. 지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다.

신이 없다면, 우리가 행복이라고 믿는 모든 것들은 결국 자연이 선택해서 프로그램화시킨 허상에 불과하다.

아마도 당신은 도킨스의 모든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진화론과 무신론을 지지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의 문제는 도킨스보다 더 심각하다. 적어도 도킨스는 무신론이 주장하는 논리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무신론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무신론자들은 도킨스가 주장하는 대부분의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도킨스가 주장하는 모든 것들을 함께 받아들이기 싫어한다. 부모의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기 원하고, 로맨틱한 사랑의 감정이 실질적이라고 말하기 원한다. 세월호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학생들이 좋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하고, 죄질이 악한 범죄자들을 도덕적으로 규탄하고 싶어한다. 매일의 삶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기를 원한다. 미안하지만, 무신론의 논리는 그러한 노력들을 이해해줄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나, 지지해줄 수는 없다. 도킨스를 보라. 무신론의 지성세계를 진두지휘하는 그는 과감히 이러한 노력들을 버리지 않았는가?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조합한 철학적 사고들이 사실은 그 전제가 대립되면서 스스로 비합리적이 된다는 사실을 모른채, 각각의 사고구조가 논리적으로 완벽하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문제는 일관성있게 무신론이 맺는 결실까지 다 삼키는 도킨스의 문제보다 더 심각하다.

자연선택설을 취하면 자동으로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부정해야만 한다. 우연을 신으로 모신다면 당연히 삶의 목적과 계획에 대한 설명도 포기해야 한다. 신이 없다면 당연히 내세는 없다. 지적 설계자가 없다면 도덕의 기준도 없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한 번도 인용하지 않은 성경구절을 하나 소개하며 이 글을 줄이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롬1:19)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분명히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지성을 사용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나는 인간이 신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도킨스의 주장보다는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라는 결론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가운데 지정의를 가진 유일한 인격체 사람이 자연이 선택하여 우연히 생겨났고, 자연이 프로그램한 대로 살아가는 본능에 매여있는 존재이며,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특별한 목적도 방향도 없고, 다만 자연이 선택한 대로 흘러나온 결과물에 따라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존재에 대한 모독처럼 여겨진다.

나는 나를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다. 나는 내 아내를 바라보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타적인 사랑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안다. 나는 자기 자녀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친구들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또한 인간으로서 절대적으로 넘어서는 안되는 도덕적 기준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회적인 동의를 얻어낸다고 해도 절대로 살인이나 간음이 도덕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단지 사람들이 그렇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닌 절대적 기준으로서). 나는 인간의 삶에 행복의 기준과 방향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인간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간은 소멸하여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믿는다. 인류 역사가 그것을 믿어왔고 소원해온 것은 단지 미신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을 감지하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도킨스가 설명하는 것처럼 본능대로 살다가 소멸하는 단지 지능만 뛰어난 개와 같은 동물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도킨스의 무신론보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더 인간에게 균형적이고, 합리적이며, 도덕적이고, 지적인 세계관을 준다고 확신한다. 바로 그 하나님이 지적 설계자이며, 그분이 디자인한 인간의 삶은 그분의 목적에 따라 살 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첫 문장에서 말하듯,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당신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라. 당신이 가지고 있는 존재 가치와 고귀한 인격, 성품을 깊이 묵상해보라. 이것이 진정 우연히 자연이 프로그램한대로 살아가는 존재란 말인가? 당신 안에서 발견되는 그 고귀한 인격은 당신이 바로 그 인격을 가진 지적 설계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에서 바울이 기록한 말씀이다.

나는 당신이 이 글을 읽고 무조건적으로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머리 속에 정립된 무신론의 전제와 그 전제에 정면대립하고 있는 철학들을 함께 움켜쥐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른다. 혹은 성경에 반대하는 단편적 지식을 열심히 찾아보고 성경의 권위와 진실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혹은 몇가지 과학적 이론들을 가지고 도킨스의 사상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덮기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당신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서는 하지도 않을 말들을 인터넷의 익명성 뒤에 숨어 쏟아낼 수도 있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당신 내면의 소리는 당신이 어떤 존재라고 말하는가? 무신론의 열매까지도 삼킬 자신이 있는가? 무신론에서 설명하는 존재가 진정 바로 당신인가?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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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만들어진 신(1): 지적인 무신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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