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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칼럼] 튀르키예 이슬람이 아랍 이슬람과 다른 점

▲ 이스탄불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는 여성 승객. 사진: 픽사베이

밖에서 보는 이슬람(52)

AD 7세기 초,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한 아랍인에 의해 시작된 이슬람교는 지금 전 세계 인구 거의 4명 중 1명이 믿는 종교로 성장했다. 이제 지구촌 어디를 가도 모슬렘들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게 되었다.

이슬람교의 교리(율법)를 이른바, ‘6신六信 5행五行’으로 집약하기도 하지만,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모슬렘들의 삶은 항상 이 교리에만 머물러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슬람교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모슬렘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 의미는 모슬렘 사회 속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이슬람교가 말하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가 모슬렘이라고 생각하면 모슬렘인 것이다.

모든 모슬렘은 ‘알라’라는 단일 신개념과 최후의 예언자로 ‘무함마드’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공통으로 가진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자기들이 살아가는 사회문화와 전통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를 가지고 살아간다. 이런 차이가 이슬람교 안에서 수니파와 시아파라는 종파를 만들었고, 다시 그 안에서 수많은 학파와 갈래가 나뉘었다. 이렇듯 1400년 동안 전 세계로 퍼진 모슬렘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변형과 변화를 거듭해왔다.

지금 튀르키예(터키) 사람 대부분은 비록 아랍인에 의해 시작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지만 아랍인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백 년 동안 오스만제국 안에서 아랍인들을 지배했으며, 자기들 덕분에 이슬람교가 발전하고 부흥했다는 긍지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아랍인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잔뜩 기가 죽어서 살아간다.

밀레트(Millet) 제도로 다양성을 수용한 오스만제국

총 36명의 술탄이 지배했던 오스만제국(AD 1299~1922)은 제3대 술탄 무라트 1세(AD 1359~1389)부터 다양한 피지배 민족을 다스리는 통치제도인 밀레트(민족, 공동체의 의미) 제도의 기초가 놓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던 메메트 2세(1451~1481) 때부터 통치 제도로 본격화되었다.

밀레트 제도는 로마식의 직접 통치제도를 탈피하여 연공과 유사시에 군대 지원을 조건으로 정복지의 기존 군주를 그대로 인정하고 활용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말한다. 이 제도는 필요한 물자와 정복에 따른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측면뿐 아니라 정복 후에 따르는 피지배 세력의 끈질긴 저항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기존 군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주고 정복지의 문화적 전통을 인정해주는 통치제도로 초기부터 오스만제국의 기본 정책으로 자리를 잡았다.

밀레트 제도에 따르면, 오스만제국 안에서 국민은 종교에 따라 4개의 ‘밀레트’로 구분되었다. 즉, 모슬렘, 그리스 정교인, 아르메니아 기독교인과 유대교인이 그것이다. 모슬렘 밀레트의 대표는 ‘세이훌 이슬람’이라 불렀으며, 그리스 정교인, 아르메니아 기독교인의 대표는 각각 그들 교회의 총 사교장(Patriarch)으로 불렀으며, 유대교인의 대표는 최고 랍비(Rabbi)라 불렸다.

여기에서 모슬렘이 아닌 비모슬렘들은 전부 ‘딤미’라 불렸는데, 이들은 인두세를 지급해야 했으며 이들의 대표는 각각 관할 하에 있는 교인들로부터 이 인두세를 징수하여 중앙에 있는 오스만 술탄에게 낼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 비모슬렘의 밀레트에 속하는 딤미의 세 대표는 수도인 이스탄불에 거주했으며, 오스만 정부는 이들을 통해 제국 안에 딤미 백성과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딤미는 정부 기구의 어떤 직책도 맡을 수 없었으며, 군대에 복무할 의무도 없었다.

이처럼 모슬렘이 아닌 딤미에 분명히 불평등한 대우는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각 밀레트 안에서 고유의 언어, 종교, 문화 및 교육 활동에서 광범위한 자치가 허용되었으며, 이 모든 사항은 오스만제국에 의해 작성된 수락서에 서명함으로 법적 효과를 발효할 정도로 일종의 상호 계약이라는 비강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오스만제국의 말기인 1837년에 술탄 마무드 2세(1808~1839)가 작성했던 각 밀레트를 향한 아래 연설문 내용을 보면 당시 국민의 종교와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기술되어 있다.

모슬렘들은 사원에서,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이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중략) 그리스인이나 아르메니아인 모두가 모슬렘들처럼 신 앞에서는 같은 종이요, 내 백성이며 서로 다른 종교가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법 앞에서 보호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정해진 조세의 납부를 통해 여러분 모두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이처럼 오스만제국은 밀레트 제도를 통해 다양한 문화, 종교, 민족을 이미 품고 있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오스만제국이 오랜 기간 여러 다른 민족에도 상생과 공존의 기회를 부여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모슬렘에게 좀 더 많은 권한과 혜택을 제공했다는 면에서 공정하지는 않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런 오스만제국의 이른바 ‘관대함’은 오랫동안 제국 유지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오스만제국의 밀레트 제도는 오스만제국의 쇠퇴기에 이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약화하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미 오스만제국 시기부터 튀르키예의 이슬람은 아랍의 이슬람과는 달리 매우 의도적이고도 정치적, 외교적 이슬람 성향을 보여주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는 이슬람법과 전통을 강조하며 지하드를 외치는 가운데 ‘카피르(무신론자 혹은 비모슬렘)’를 무자비하게 처단하는 최근의 중동 아랍 모슬렘이 보여주는 근본주의 이슬람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이슬람 종파와 교단의 수용

오늘날 튀르키예공화국 안에서 보이는 이슬람의 모든 형태는 이미 오스만제국 시기부터 전해져 왔기 때문에 오스만제국 때 이미 형성된 이슬람의 영향 아래에서 발전해왔다고 보아야 한다. 밀레트 제도 외에도 아랍 이슬람과 비교해서 터키 이슬람을 특징짓는 다른 또 하나는 튀르키예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단 사상을 가진 수많은 이슬람 교단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오스만 시대부터 신비주의인 수피(Sufi) 사상[1]을 가진 메브레비(Mevlevi)[2]와 알레비(Alevi) 교단이 현 튀르키예에서 가장 중요하고 넓게 퍼져 있는 이슬람의 이단 교단들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슬람 종파는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로 양분되지만, 사실 시간과 이념 그리고 고유의 지역 전통과 문화의 차이로 인해 오스만제국 시대부터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크고 작은 이슬람 교단(혹은 학파)이 수니파와 시아파로부터 파생되어 나왔다. 그리고, 이 수많은 군소 교단의 이름은 거의 그 세부 교단을 창시한 창시자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므로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이슬람 종파와 수많은 이슬람 교단의 분류와 특징을 여기에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며 대신 이러한 이슬람의 종파와 교단 중에서 튀르키예공화국 안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성장한 교단을 소개하면서 튀르키예 내에서 발생한 이들의 상호 갈등 요소를 알아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여기에서 튀르키예 이슬람 내 종파에 대해 알아보면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것은 이슬람의 분류에 대해 혼동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를 종파적 분류로 보지만, 여기에서 파생된 수많은 군소 이슬람 집단을 또 다른 이슬람의 종파로 혼동하지 말아야 하며, 이슬람 해석에 따른 교단 혹은 학파의 분류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또한, 종파를 구분하는 주요 기준으로 교리, 신조, 예배 의식, 성전, 숭배 대상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이러한 차이를 가진 종파들은 일반적으로 기존 사회의 법이나 정치권력보다 그들의 신조를 더 앞세우는 데서 발생하는 충돌과 갈등의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이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이원론적인 분류가 아닌 종교와 정치, 종교와 사회, 종교와 문화 등의 관계 속에서의 구분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타당한 지적으로 보인다.

튀르키예 이슬람 교단과 학파

이런 맥락에서 오스만제국부터 현대 튀르키예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이슬람의 거대 두 종파 아래 다양한 수많은 교단과 학파들이 발생했다. 이들의 분류 기준은 일반적으로 크게 세 가지 정도인데, 첫째, 이슬람 정치적인 측면, 둘째, 이슬람 믿음(신앙)의 형태적인 측면, 셋째, 이슬람법(교리) 해석에 따른 측면이 그것이다.

첫째로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튀르키예 이슬람은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의 두 종파로 분류된다. 이슬람의 수니파는 알라의 일을 대행할 칼리프를 혈통과 관계없이 투표와 결의를 통한 선출을 주장하며, 시아파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로부터의 지도자 선출을 주장하면서 제4대 정통 칼리프로 알려진 알리와 그의 혈통을 잇는 지도자들을 칼리프가 아닌 이맘으로 호칭하며 그들만이 모든 종류의 죄에서 깨끗함을 믿고 있다.

튀르키예 이슬람의 분류 기준으로서 둘째는, 믿음(신앙)의 형태에 따른 측면이다. 여기에는 이슬람 이전의 토속 신앙과 종교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제브리예’와 ‘무테질레’ 등이 있었다. 이 교단들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군소 학파로 다시 분열되어 ‘아샤리’, ‘바트니예’, ‘제브리예’, ‘에샤리예’, ‘카데리예’, ‘마투리디예’, ‘뮤르지에’, ‘뮤쉐비헤’ 등으로 복잡하게 나뉜다.

마지막 셋째 분류 기준은 이슬람법(교리) 해석에 따른 측면이다. 이에 따라 발생한 종파는 현 튀르키예공화국을 포함해서 수니파 모슬렘 안에서는 크게 네 개 정도로 구분되는데, 하니페(Imamiazam Ebu Hanife: 699~767)가 세운 ‘하니피’[3], 이맘 말릭(Imam Malik Bin Enes: 711~795)이 세운 ‘말리키’, 이맘 샤피(Imam Safii: 767~820)가 세운 ‘샤피’, 아흐멧 빈 한벨(Ahmet Bin Hanbel: 781~855)이 세운 ‘한벨리’가 그것이며 현재까지도 이들의 존재와 영향이 계속되어오고 있다. 또한, 시아파 모슬렘 안에서도 자페리(Cafer-i Sadik: 699~765)에 의한 ‘자페리릭’, 제이드(Zeyd Bin Ali)에 의한 ‘제이디릭’, 이스마일(Ismail Bin Cafer el-Mubarek)에 의한 ‘이스마일릭’ 등으로 구분됐다.

이외에도, 메브라나 젤라레띤 루미(Mevlana Celaleddin-i Rumi)에 의해 ‘메브레비’ 혹은 ‘데르비쉬’라고 불리는 특이한 신비주의 교단이 튀르키예에서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튀르키예인들은 비록 이슬람화되었지만, 자신들의 전통적인 숭배 사상인 애니미즘(자연숭배)이나 샤머니즘 등을 완전히 포기하고 절대적으로 이슬람교만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메브라나의 사망일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한 번씩 데르비쉬 교단의 사제가 수피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출처: 픽사베이

튀르키예인들에게 율법적인 이슬람 종교는 그들에게 영적 만족감을 주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전통적인 샤머니즘과 인도의 신비주의를 가미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자기들의 전통 종교에 이슬람을 가미한 수피즘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수피즘은 이슬람 종교에 전통적인 샤머니즘을 혼합하여 오스만제국과 오늘날 튀르키예공화국 안에서 다양한 이슬람 종파를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수피즘은 크게 보면 시아파 이슬람의 한 갈래에서부터 파생되어 오스만제국 안에서 꽃을 피웠으나, 이슬람의 정통 종파를 주장하는 수니파 모슬렘의 측면에서 볼 때는 다분히 비아랍적이었으며, 비정통적이어서 환영받지는 못했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이슬람 종파는 오스만제국 말기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상호 갈등이 심화하여 결국 오스만제국의 멸망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튀르키예 이슬람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수피(Sufi)’라는 말의 그 어원은 ‘수프’(양모)를 몸에 걸친 것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여겨지지만, 지혜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소피아’(Sophia)에서 전해졌다는 설 등 이외에도 몇 가지 이설이 전해진다. 이 말에서 ‘수피’(Sufi) 및 영어의 ‘수피즘’(Sufism)이 파생하였다. ‘알라’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요구하는 신비주의는 ‘쿠란’ 속에 이미 나와 있다는 설도 있으나, 본래의 수피즘은 8세기 이후 이슬람교가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된 후 시아파 속에 나타났다. 초기의 신도 중에는 금욕주의적인 독신자가 있어서 수프(양모) 등을 몸에 걸치고 고행이나 유행(遊行)한 것이 그 시초로서 거기에는 인도, 이란의 종교 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엿보인다. 수피주의는 철저한 금욕주의 입장에서 자기 수행과 고행을 요구한다. 이 수피즘의 특징은 일종의 도취 상태에서 지상(至上)의 경지를 감득하는 데 있는데 이 때문에 자신을 절대자로 자칭하는 이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수피즘을 신봉하는 많은 교단이 형성되었는데, 특히, 터키 ‘데르비시’(Derviş) 교단은 자가도취의 수단으로서의 회전 춤으로 알려져 있다.

[2] ‘메브라나’(Mevlana)는 원래 아랍어 ‘마울라나’(페르시아어로는 ‘모울라나’)에서 유래된 말로서 이슬람의 ‘수피’(Sufi) 교단의 지도자에게 붙여진 호칭이다. 튀르키예어와 페르시아어 문서에서 ‘젤라레띤 루미’(Celaleddin-i Rumi)라는 인물을 기리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사람의 이름 내지는 별명으로 잘못 알려진 때도 있다. 수피 교단을 창시한 ‘젤라레띤 루미’(Celaleddin-i Rumi, 1207~73)는 현 터키의 ‘코냐(Konya)’에서 태어났으며, 그를 따르는 이 종단의 추종자들을 ‘메브레비(Mevlevi)’라고 부르는데, 여성의 치마 같은 특이한 복장을 하고서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 가는 이들의 신비주의 의식이 매우 특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튀르키예 ‘코냐’ 지방에서 그의 죽음을 추모해서 매년 한 번씩 ‘메브레비’들에 의해 수피 의식이 거행된다.

[3] 수니파에서 이슬람법(교리) 해석에 의한 분류 중 하나인 ‘하니피(Hanifi)’파는 전 이슬람 세계 인구 가운데 반이 넘는 추종 세력을 가지고 가장 넓게 분포된 이슬람 교단이다. 현재 튀르키예공화국을 비롯해서 주변 발칸반도, 투르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방글라데시 및 파키스탄 등지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졸업,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FOT 선교회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저널 ‘전방개척선교(KJFM)’ 편집인,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무슬림 이해하기’(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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