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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그리스도인의 상투적인 말(7):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

▲ 문둥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사진: 유튜브채널 토미 캡처

우리는 우리의 사회 속에서 죄악을 제거하기로 한 것처럼 보이는 ‘치료 문화’ 가운데에 살고 있다. 간음이나 부도덕의 모든 형태가 성 중독으로 재분류되고 있다. 약물이나 알코올에 대한 중독은 질병으로 분류되어 이제 그것이 고의로 행한 행동의 결과가 아니다. 그리고 총기류는 실제로 방아쇠를 당기는 살인보다 더 큰 악으로 인식되고 있다. 어떤 종류의 죄이든지 간에, 그것을 변명하고, 재정의하고, 혹은 축소할 방법이 있어 보인다.

한 사람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지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나누려는 경향이 교회 안으로도 침투하고 있다. 사람들은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기 위하여, “그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말이 재치있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상투적인 말이 되었다. 죄인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는 것은 두 가지가 모두 맞는 말이지만, 그러한 상투적인 말은 그 두 가지를 분리하므로 비성경적으로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

영지주의의 부활

그러한 종류의 이중성은 주 후 일세기의 영지주의 이단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영지주의의 오류는 너무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그의 첫째 서신에서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하여 직선적으로 지적하는 편지를 보냈다. 존 맥아더는 요한 일서에 등장하는 교회의 상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관찰했다.

영지주의(그리스어로 gnosis[“지식”])는 여러 가지 이방인, 유대인, 그리고 유사 그리스도인의 사고 체계의 혼합물이었다. 그리스 철학(특별히 플라톤)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영지주의는 물질은 본질에서 악한 것이고, 영은 선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한 철학적인 이중성 때문에, 요한이 대항했던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의 어떤 형태는 받아들이지만, 그의 인성은 부인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물질이 악하므로 육체의 몸을 취할 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죄인과 죄를 분리하려는 노력이 오늘날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그들의 이중적인 관점을 개인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의 철학적 이중성은 또한 도덕적인 가치와 윤리적인 행위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육체란 단지 영혼이 갇혀있는 감옥에 불과한 것이므로 육체가 범하는 죄는 영혼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고 영향도 없다는 것이다.

죄인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라는 상투적인 말은 영지주의 이단들이 주장한 것과 같은 이중적인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부터 그리고 죄로 인한 결과로부터 죄인을 효과적으로 분리해야만 한다.

설상가상으로, 그것은 죄인을 사랑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개념 자체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가치 없는 말로 만들어 버린다. 참된 사랑은 의도적으로 모른 체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어떤 암에 걸린 환자에게 무턱대고 그의 병이 나았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혹은 그 병이 저절로 나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으므로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을 모른 체하지도 않을 것이다.

죄인들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은 그들의 죄를 분별없이 모르는 체하거나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하여 맞서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당신 또한 그 사람의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그 죄인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중성이 아니라이중적인 책임

우리가 죄와 맞서는 방법은 그 죄의 특성이나 그 죄인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당신은 그 자신이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분별없는 불신자를 대하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잘 알아야 하는 그리스도인 동료들에게 보다 더욱 온유하게 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조차도,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순결을 보존하기 위해서 여전히 담대하고 분명해야 하지만, 서로 간에 직면한 문제에 있어서 조심스럽고 신중해야만 한다.

사실, 교회의 징계는 교회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이다(마태복음 18:15-20). 존 맥아더는 그 구절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동료 그리스도인을 그들의 죄로부터 회복시키는 일에 깊은 관심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우선 그 자신부터 영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자기 만족적인 냉담함이나 독선적인 경멸은 말할 것도 없이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또한, 거짓된 겸손 뒤에 숨어있는 감상주의나 비겁함도 마찬가지로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관계가 없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한 형제들을 비난하지도 않고,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그의 관심은 죄지은 형제의 거룩함과 축복, 교회의 정결과 정직, 그리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과 영광 드리는 일에 있다.

본질에서 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죄를 맞서는 일에 직면했을 때의 반응에 대하여, 맥아더 목사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세상의 많은 사람과 성숙하지 못한 많은 신자는 이러한 행동이 사랑이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올바른 방법으로 행해진 징계는 가장 깊은 사랑이다. 말하자면 회개하지 않는 죄와 그 결과들로부터 한 형제를 구조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랑의 표시이다. 교회의 영적인 정결함보다 죄를 눈감아 주거나, 교회 안에서의 표면적인 평온함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죄를 관용하는 사랑은 전혀 참된 사랑이 아니며,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상관없는 사랑을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강력하게 설교하지 않으면, 어떠한 교회의 각성이나 부흥이 일어날 수가 없다. 구성원들에 대하여 알려진 죄를 관용하는 그 어떠한 교회도 영적인 성장이나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용은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의 하나의 표준이 되어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은 마치 그의 다른 특성들, 특히 그의 진노 하심을 눌러버리거나 없애 버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맥아더 목사가 강조하여 논박하는 것처럼, 이러한 감상적인 생각은 오히려 통속적인 우상 숭배의 한가지 형태일 뿐이다.

모두 사랑이시며 진노가 없으며, 모두 은혜로우시고 공의가 없으시며, 모두 용서이고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우상 숭배(사람이 만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많은 자유주의 교회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가르쳐 왔던 보편 구제설(인류는 결국 모두 구원받는다.)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간과하신 죄는 용서받을 필요가 없으므로, 구원은 무의미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그가 그의 생명을 구속적인 목적으로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일이 되어버린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고통과 고난과 질병을 허락하셨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질문에 대하여, 변증법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증오를 제거하는 것은 복음을 약화하며, 그것은 복음 전도를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된다.

우리는 죄인들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 두 가지 진리들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의 죄에 대한 증오는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가 요구하는 무서운 결과에 대하여 온정으로, 그러나 보다 분명하게 경고하는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부족하면, 우리가 어찌 그들을 참으로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가 있을 것인가? [복음기도신문]

Cameron Buettel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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